1 내면아이

우리 정서의 구조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와 같다. 성인의 정서 인형 내부에서 뭔가 덜거덕거린다면 그 안에는 상처 입은 어린아이의 정서 인형이 들어 있다.
요쉬카 브라이트너, 『귀한 내면아이』 - P12

1년 전만 하더라도 내면아이에 관한 책은 임신부들이나 읽는 줄 알았다. 남성들에게 파트너의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정보를 아주 많이 주기는 하지만 그들 자신의 정신생활을 위해서는 별 의미 없는 책들 가운데 한 권이라고. - P13

내면아이에 몰두하는 일은 내 문제의 원인을 없애는 데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나는 이 문제가 불러온 결과를 매일 신중하게 줄여갔다. - P13

내가 마흔세 살이 되어서야 내 내면아이의 아버지가 된 여러이유 중 하나는, 지금 별거 중인 아내와 피임하지 않은 채 싸웠기 때문이다. 카타리나의 문제 해결 방식은 늘 무척 효율적이었다. 문제 발생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 언제나 아내의 문제 해결에 책임이 있었다. - P14

지금까지 내 분노 폭발은 그저 사소한 일에 한정되었다.
밤에 집 건너편 공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에게 각 얼음을 던졌다.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의뢰인들에게는 변호사로서 일부러틀리게 조언했다. - P15

그렇게 9월 초 어느 비 내리는 저녁, 휴가에서 돌아온 지일주일 되던 때 나는 다시 요쉬카 브라이트너의 문 앞에 섰다. 마지막으로 상담을 받은 지 거의 반년 뒤였다.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일단 문 앞에서 내 안을 들여다봤다.
지난 반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때는 봄이었고, 여름이 목전이었다.
지금은 가을이고, 겨울이 가까워졌다. - P16

내 삶은 원래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행복해야 했다. 지난 반년 동안 나는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에 사랑과 마음을 듬뿍 쏟아부어 그 영역을 늘 꿈꾸던 대로 바꾸었다.
심신이 마비될 것 같은 대형 로펌의 정규직에서, 재정적으로 단단한 안전장치를 확보해둔 개업 변호사가 되었다. - P16

지난 몇 달 동안 일어난 모든 변화는 반년 전 내가 드라간을살해한 일과 관련이 많았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 나에게는 꽤 중요한 행운이었다. 앞으로도 아무도 몰라야하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드라간의 이름으로 그의 범죄 조직을 계속 운영했다. 또한 드라간 일당에게는 그들의 보스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 P17

내 인생의 오류는 단 하나의 오류도 일어나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내 현재는 과거보다 아름다울지 몰라도 미래는 엄청나게 두려웠다.
이것이 스트레스였다. 이 스트레스를 명상으로 다스릴 수있었다. 하지만 원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명상은 다람쥐 쳇바퀴를 늦췄지만 나는 어쩐 일인지 그곳에서 완전히 탈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요쉬카 브라이트너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 P18

하지만 나를 무겁게 억누르는 사건들은 말할 수 없었다.
지난봄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말아야해.
그 후로 지속하고 있는 이중생활에 대해서도 입 다물어야지.
보리스 이야기도 물론 절대 하지 않을거고. - P19

내 삶과 딸의 삶을 구하려고 내가 반년 전 납치한 보리스.
하지만 살인이 싫어 그냥 살려두고 싶은 보리스. 내가 살인을 거부했다는 살아 있는 증거인 보리스. 그러나 나는 그를 평생 포로로 잡아둘 수도, 언젠가 풀어줄 수도 없었다. 그의 미래에 대해 나는 여전히 아무런 해결책도 찾지 못했다.
지금 살아 있는 게 부담스럽지만 죽더라도 똑같이 나에게부담이 될 보리스,
보리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겠군. - P19

내가 재킷을 벗는 동안 그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나를 빤히바라봤다.
"달라지신 것 같네요." 그가 가치 중립적으로 말했다.
나는 나를 내려다봤다. 반년 전에는 맞춤 정장과 명품 옷을입었다. 오늘은 나도 청바지에 티셔츠, 스웨터와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 P21

"오래간만에 뵙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가 물었다.
나는 미지근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곰곰이 생각했다. 사람을 네 명 죽였고, 예전 고용주를 협박했고, 딸이 유치원에 자리를 얻도록 유치원의 예전 경영자를 위협해 지분을 팔라고 강요했고, 러시아 마피아를 납치했지. 이 중 이번 상담에서 다룰만한 것은 전혀 없군. - P22

"그런데 있잖아요, 당신이 제게 전화해 상담 예약을 요청한계기가 있을 겁니다. 그렇죠?"
"네." 산장 종업원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상담하러 오게 된, 예기치 못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내 내면아이에 매우 깊이 몰두하는 첫걸음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내면아이는 내가 6개월 전쯤 안도하며 그만뒀던 일, 그러니까 명상 살인을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조만간 재개하게 할 존재였다. - P24

2
휴가

휴가의 의미는 차단이다. 일상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자극을 철저하게 차단할수록 긴장 완화는 극대화된다. 차단은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휴대전화로 들어오는 부담스러운 소식을 휴가지에서만난 사람과의 대화로 대체하라.
요쉬카 브라이트너, 『추월차선에서 감속기 명상의 매력』 - P25

"아내는 저와 같은 침대를 쓸 때면 수면 안대와 귀마개를사용한답니다. 그러니 무척 일방적인 대화가 되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성생활의 부재 때문이 아닙니다."
"2분 전까지만 해도 당신은 여기에 온 이유를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일단 제게 전화한 계기부터 이야기하죠. 여기 온 이유는 그다음에 다루기로 하고요. 더 길게방해하지 않겠습니다. 가족 여행을 가셨다고요. 계속 말씀해보세요." - P27

"왜 알프스로 가셨죠?"
세 살배기를 데리고 마요르카로 가서 여행 첫날, 그리고 특히 마지막 날을 공항에서 술에 취한 패키지 여행객들 틈에서보내고 싶지 않았다는 말은 너무 세속적으로 들릴 것 같았다.
"저희는 산에 꼭 가고 싶었답니다." - P28

농장은 두 마을 사이의 분지에 놓여 있어 목가적이었다. 통신망 서비스를 벗어난곳이라는 점에서도 기대가 컸다. 이곳에서 디지털 디톡스는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이었다. 디젤 모터는 사람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래 목적에 맞게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데 사용됐다. - P28

나는 한시간반째 어깨에 에밀리를 태우고 있었다. 딸의 눈으로 다시 한번 산꼭대기와 케이블카를, 소들이 풀 뜯는 초원을 본다는 게 기뻤다. 카타리나가 이렇게 느긋한 것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다른 사람들 험담을 하지 않았다. - P29

 날씨가 환상적이어서 어느 자리에서든 탁 트인 알고이 지방의 그림 같은 풍경이 거의 100킬로미터까지 내다보였다.
"에밀리와 배낭을 내려놓자 가루 설탕을 뿌린 김이 오르는카이저슈마른(오스트리아식 팬케이크-옮긴이) 한 접시와 얼음처럼 차가운 알름두들러 (탄산음료- 옮긴이) 한 병과 반짝반짝윤이 나는 란트예거(납작한 반건조 소시지옮긴이)만 있으면 완벽하게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도요."
"왜요?" 브라이트너 씨가 물었다. - P30

"아니, 그게 아니라 왜 하필 그런 음식들의 조합이냐고 질문한 겁니다. 김이 오르는 접시, 가루 설탕을 뿌린 카이저슈마른,
얼음처럼 차가운 알름두들러, 반짝반짝 윤이 나는 란트예거 모두 무척 구체적이고 눈에 보일 듯 그림 같은 표현이라서요." - P30

"어쩌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자, 계속 말씀해보시죠."
그의 대답에 잠시 당황했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카타리나는 양지에 앉아 있고, 에밀리는 산장 옆 초원 가장 가까이 있는 소에게 달려가고, 저는 화장실로 갔습니다." - P31

"전 그저 정중하게 물어보려던 건데..." 나는 이 산장에서어쩔 수 없이 보내게 된 휴가의 일부를 평화롭게 만들고 싶어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쉬는 시간입니다." 서빙하러 금방 온다던 닐스는 몸을 돌려 휴식 시간을 시작하고는 오직 자기 휴대전화 시중 만들었다. - P32

나는 "금방 갑니다"라는 말이 병참학적 장애물에 걸려 실패하지 않도록 화장실에 가기 전에 우리를 찾는 데 필요한 모든정보를 알려줬다.
"알겠습니다... 저흰 입구에서 세 번째 테이블에 앉아 있어요. 쉬는 시간이 끝나고 보면 금방 눈에 띌 겁니다. 바깥 테이블은 거의 모두 비어 있으니까요."
"예, 예." 닐스는 이번에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닐스와 내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모두에게 더 나았을 텐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