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윤 작가,
마리아 아녜시 생가를 찾다

◆◆ 굳이 가시겠대서 말리지 않았습니다

마리아 아녜시의 저택은 400년째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밀라노의 북동쪽 언덕 꼭대기에서 ‘빌라 아녜시Villa Agnesi‘라는 이름의별장으로 운영되고 있었지요. 지도를 확인한 갈로아 작가는 "매우 멀군요. 하지만 할게 없으니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 P91

◆◆ 아녜시가 교과서용 미적분학 책을 쓴 이유


마리아 아네시가 이런 활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성직자였던 가정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 P93

 일주일에 두 번은 공공병원을 방문해 만성 질환에 걸린 여성들을 도왔습니다. 그중 갈 곳 없는 환자를 집으로 자꾸 데려오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숙식을 제공할 환자의 수를 제한당하기도 했지요.
『이탈리아 청년들을 위한 미적분학Instituzioni analitiche ad uso dellagioventit italiana』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이 같은 삶의 지향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마리아 아녜시는 수학을 청년들이 배워야 할 필수 과목이라고 여겼습니다. - P94

마리아 아녜시는 해석학을 가르칠 선생님이 거의 없는 데다 관련자료도 이런 저런 책에 흩어져 있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책만 보면 미적분학 완성!‘이라고 할 만한 교과서를 썼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당시 미적분학을 둘러싼 논쟁을 살피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P94

1748년 책이 출판되자 곳곳에서 찬사가 나왔습니다. 영국은 물론이고 라이프니츠 지지자가 많은 프랑스에도 번역본이 출판됐습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국 학계 곳곳에서 책에 대한 칭찬이 자자해지자교황 베네딕트 14세 또한 책의 우수성을 높이 사며 축하 편지를 마리아 아녜시에 보냈습니다. 1750년에는 마리아 아녜시를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임명하겠다는 편지를 썼습니다. 교황의 뜻은10월 5일 이탈리아아카데미 회의에서 선언되며 마리아 아녜시는 세계 최초의 여성 수학 교수가 됩니다. - P95

유일한 여성 편집장,
엘리자베스 바이튼

◆◆ 역사학자도 몰랐던 여성 편집장

≪숙녀들의 수첩>이 발간된 140여 년간 여성 편집장은 단 한 명, 엘리자베스 바이튼Elizabeth Beighton 이었습니다. 여성 편집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200여 년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P106

여성의 참여를 최초로 진지하게 분석한 과학사학자 테리 조차 1975년 논문 「숙녀들의수첩 혹은 여성들의 책력, 1704~1841」을 발표하며 엘리자베스 바이튼이 1743년부터 1745년까지 임시로 편집장을 맡았다고 잘못된 정보를기록했습니다.  - P107

◆◆ 편집장 자리를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

테리 펠의 논문 내용과 달리, 엘리자베스 바이든은 편집장 자리를 고작 2년 만에 넘길 만큼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경쟁자는 물리치고 조력자를 찾아내며 16년이라는 긴 임기를 지킨 전투적인 편집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바이튼은 공식 직함을 얻은 뒤에도 2년 이상이 자리를 위협받았습니다. 1746년, 일출 시각과 달의 모양 등을 계산해주던 수학자 토마스 쿠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엘리자베스 바이튼은 자신의 적수와 "힘든 투쟁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 P407

결국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수학자 로버트 해스가 나서기로 했습니다. 1737년 호부터 ≪숙녀들의 수첩≫에 수학 문제와 답을 보냈던 로버트 해스는 뒤끝이 있고 시비를 걸기 좋아해 자주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 P108

◆◆ 헨리 바이튼과 여성 독자의 소외

여러 과학사학자들은 헨리 바이튼이 무려 30년간≪숙녀들의 수첩≫ 편집장을 지내며 잡지의 정체성을 바꿔놓았다고 평가합니다. 초대 편집장 존 티퍼가 일하던 시절에는 수학 문제가 대부분머리를 싸매면 풀 수 있는 산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숙녀들의 수첩>을 ‘심심풀이용 퍼즐 잡지‘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헨리바이튼을 거치며 <숙녀들의 수첩≫은 명실상부 ‘진지한 아마추어수학자‘를 위한 잡지로 자리 잡게 됩니다. - P109

그러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선언과 달리, 헨리 바이튼의 노력은 때로 여성 독자를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틴어를 잡지에 도입한 것입니다.  - P110

이런 소동에도 헨리 바이튼은 라틴어를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급기야는 라틴어 수수께끼를 싣는 바람에 독자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혔습니다. 편집장이 혼자 쓰는 서문과 달리 수수께끼는 인기가 많은 코너였기에 여성 독자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해결책은 라틴어를 없애는 게 아니라 파트를 나누어 수수께끼의 라틴어판을 따로 싣는 방향이 되었습니다.  - P111

과학사학자 론다 쉬빈저는 「두뇌는 평등하다」에서 <숙녀들의 수첩>이 라틴어와 산문체를 받아들이며 남성적인 이미지를 얻게 된 과정이 유럽에서 여성의 과학적 능력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과 함께 일어났다고 설명합니다. - P111

독학으로 탄생한 수학자,
토마스 심슨

◆◆ 그땐 독학만으로 수학자가 될 수 있었다

. 누군가는 재앙의 전조라 했고 누군가는 신의 나라에서 일어났을 일과 관련성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 가운데서 15살의 토마스 심슨은 강한 호기심으로 가득차 일식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수학과 천문학을 배우겠다는 열광을품었습니다. - P122

아마추어 수학자가 전문가의 반열에 오를 기미가 보인 건 1730년대입니다. 점성술가에게 배운 대로 점을 치려다 사고를 치는 바람에 토마스 심슨은 뉴니튼을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점성술을 그만두고 1735년부터 수학에 온 시간을 쏟았습니다. 독학하는 아마추어 학자들의 성지인 ≪숙녀들의 수첩≫도 즐겨 봤는데, 1736년 호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 명성을 얻었습니다. - P123

이처럼 토마스 심슨은 기술학교나 대학 학위 없이도 수학자가 됐습니다. 공식적인 교육이라곤 영어를 배운 게 유일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지금은 학위 없이 수학자와 과학자가 되는것은 불가능하지만, 18세기는 과학이 학문으로 새롭게 등장해 과학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 정립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과학이 무엇인지,
누가 과학자인지,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 등 모든 것이 유동적인 상태였는데요. 이는 여성이 수학과 과학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던 배경으로작용하기도 했습니다. - P124

◆◆ ‘심슨 공식‘은 토마스 심슨이 만들지 않았다

토마스 심슨의 업적이라 하면 ‘심슨 공식‘이 가장 먼저 언급되지만, 이는 사실 토마스 심슨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녜시의 마녀 곡선과 같은일이 토마스 심슨에게도 있었던 겁니다 - P124

심슨 공식은 토마스 심슨이 태어나기도 전인 1639년에 이탈리아수학자 보나벤투라 카발리에리 Bonaventura Cavalieri가 먼저 사용한 기록이있습니다. 그럼에도 토마스 심슨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의 수학책이 무척 잘 팔렸기 때문입니다. - P125

정작 토마스 심슨이 기여한 이론에는 그의 이름이 붙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미적분학에서 쓰는 ‘뉴턴 방법Newton‘s law‘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외에 확률 이론에도 토마스 심슨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한 번 관찰해서 얻은 관측값보다 여러 번 관찰해서 얻은 관측값을 평균하는 게더 믿을 만하다는 주장이 가장 유명합니다. 예를 들어, 천문학자가 천체를 관측할 때 얻은 관측값은 친체의 실제 위치와 다를 수 있습니다.
대기 상태 때문에 빛이 굴절할 수도 있고, 망원경의 렌즈가 빛을 흩뿌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여섯 번 이상 관측을 해서 얻은 천체 위치의 평균값이 한 번만 관측해서 얻은 값보다 더 참에 가까울 거라는게 토마스 심슨의 주장입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독학으로 풀다
소피 제르맹Sophie Germain
1776-1831
수학자

여성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수학계에서 제르맹이노린 건 파리과학아카데미의 논문 공모전이었다. 탄성력과 관련한 논문으로 상을 받은 뒤, 1816년에는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일부 풀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17세기 아마추어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가 낙서처럼 적고는 "여백이 부족해 증명은 생략한다"고 말한 문제로 유명하다. 간단해 보이지만 350년뒤에야 완전한 해답이 나왔을 정도로 어려운 문제라제르맹의 풀이는 대단한 진전이었다. 이 풀이는 현재 ‘소피 제르맹 정리‘라 불린다. - P237

"대학이 아무리 우리를 거부해도"
‘남장한 여자들

◆◆ 의대 수업을 도강하다, 마가렛 킹

대학 교실에서 기초 지식을 쌓은 마가렛 킹은 1814년 이탈리아 피사로 가서 뛰어난 외과의사 안드레아 바카 베를린기에리를 만나 함께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지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진료소와 약국도 열었습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여성은 간호사만이 아니라 의사도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실천한 겁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의 신체 교육에 대해 할머니가 젊은 어머니에게 하는 조언Advice to Young Mothers On the Physical Education of Children Bya Granmother』이라는 책도 썼습니다. - P139

죽어서야 성별이 드러난 군의관, 제임스 베리

새롭게 태어난 제임스 베리는 마가렛 킹과 달리 체구가 작아서 사춘기를 지나지 않은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외모에 맞게 나이를 속여 에든버러대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높고 가는 목소리와 부드러운 피부 탓에 나이가 더 어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습니다. 심지어는 시험을 치르지 못할 위기에 놓이자 삼촌의 귀족 계급 친구가 교수들을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 P140

가파른 승진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완고한 성격을 바탕으로 각 점령지의 의료 환경을 눈에 띄게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베리는 위생 상태가 좋아야 질병을 예방한다고 믿어 다친 군인이 머무는 병원은 물론이고 노예와 죄수, 나병 환자가 있는 곳까지 깨끗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소위 ‘하찮은 사람들의 공간까지개선할 것을 상관과 공무원에게 요령 없이 요구하는 바람에 때로 지위가 강등되거나 체포를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 P141

제임스 베리는 영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외과 의사로는 최초로 제왕절개 수술을 성공시키기도 했습니다. 산모와 아기를 모두 살려낸 이 수술은 케이프타운에서 이뤄져 아프리카의 첫 제왕절개술로 인정되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 제왕절개술은 산모가 죽음에 이를 수 있는위험하고 어려운 수술로 여겨졌습니다.  - P141

제임스 베리의 비밀은 영영 묻힐 예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옷을 벗기지 말고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이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청소부가 제임스 베리의 시체를 확인하고 성별을 폭로했습니다. 영국 전체가 떠들썩해지자 영국군은 군의관이 여성인 것을 몰랐던 사실을 감추려고 100여 년간 모든 기록을 숨겼습니다.  - P142

◆◆ 성별을 숨겼던 여성 과학자들

19세기에는 겉모습을 남성으로 바꾸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성별을 숨겼던 여성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해부학자 마리 티로 다르콩빌은 모든 책을 익명으로 출간했습니다. 프랑스 수학자 소피 제르맹은
‘앙투안 오귀스트 르블랑이라는 남성적인 가명으로 남성 학자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훗날 소피 제르맹은 "주변에서 여성 과학자를 비웃는 것이 두려워 가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남성의 가면을 쓰는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꿈을 펼치는 데 도움이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활동도 제약했습니다. 제임스 베리는 죽을 때까지 속을 털어놓을 동료를 사귈 수 없었고, 소피 제르맹은 뛰어난 학자와 서신을 교환하는 것으로만 연구를 이어나가 최신 수학을흡수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 P143

"생물은 멸종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뒤집다
메리 애닝
◆Mary Anning
✦ 1799-1847
화석수집가, 고생물학자

성경을 믿던 사람들은 기이한 뼈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화와 멸종을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다. 이후에도 애닝은 익룡과 플레시오사우루스의 뼈 화석을 최초로 발견하고 공룡의 똥 화석도 찾아냈다. 애닝의 발견으로 학계는 화석으로 지구의 과거를 알아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 P153

18세기 독일에는
여성 과학자가 많았다

◆◆ 가내수공업자의 딸, 곤충학자가 되다

어릴 적 메리안은 모든 애벌레를 채집한 것도 모자라 누에를 데려다 키우기까지 했습니다. 관찰에 그치지 않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길드화가였던 의붓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상류층 여성처럼 교양으로 배운 게 아니라 일을 돕기 위해 배웠습니다.
길드 장인의 딸들에겐 흔한 일이었습니다. - P154

나비의 변태 과정을 알에서부터 관찰한 것도 혁신이었습니다. 당시는 곤충이 진흙에서 저절로 발생한다는 자연발생설이 널리 지지받고있었습니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연발생설을 두고 곤충은 신이 아니라 악마가 만든다고 말했는데, 17세기에도 곤충은 ‘악마의 짐승‘이라는 악명 높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 P155

이렇게 탄생한 『수리남 곤충의 변태 Metamorphosis insectorum Surinamension』는 자연사 도서관에 반드시 놓이는 필독서가 될 정도로 대중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학계에서도 찬사를 받았습니다. 독일 천문학자 크리스토프 아놀트는 "게스너, 워턴, 펜, 뮈세프가 무시한 것이한 현명한 여성을 통해 활짝 피어났다"고 평가했습니다. - P156

◆◆ 근대과학의 절반은 수공업자가 만들었다

 마리아 쿠니츠는 행성 위치를 계산할 때 쓰던 천체 목록을단순화했고, 마리아 아이마르트는 6년에 걸쳐 달의 모양 변화를 관찰해 250점의 그림에 담았으며, 엘리자베타 헤벨리우스Elisabeth Hevelius는 1888개 별자리를 책 한 권에 정리했습니다. 가장 뛰어났던 사람은 새로운 혜성 ‘Comet of 1702‘를 발견한 마리아 빙켈만이었습니다. - P156

앞서 설명한 천문학자 중 지주의 딸이었던 마리아 쿠니츠 외에는 모두 상류층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상류층도 아닌데 과학적 업적을 낼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의 곤충학계와 천문학계가 모두 가내수공업자들의 조합인 길드와 비슷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157

수공업 전통에서 훈련 받았다고 해서 대학을 나온 학자에 비해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마리아 빙켈만의 남편인 고트프리트 키르히도 대학이 아닌 헤벨리우스의 개인 천문대에서 관측 기술을 배웠습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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