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학자 론다 쉬빈저 Londa Schicbinger의 『두뇌는 평등하다』라는책이었지요. 주변 좀비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가 책에서 엄청난 문장 하나를 읽었다는 사실을요.

"18세기 초기에 가장 놀라웠던 면은 여성들의 수학 공부가 적극 권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저는 침을 꼴깍 삼키고 문장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여성‘들에게 ‘수학‘ 공부가 ‘적극‘ 권장되었다. - P22

여성도 수학을 좋아하고 잘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줘서 담임선생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똘똘뭉쳤죠. 끝내는 이공계 쪽으로 직업을 얻을 생각이 없었는데도 물리학과로 진학하는 괴상한 선택을 했습니다. 이게 마감용 좀비로 가득한 과학잡지 편집실에 온 배경입니다. - P24

 2016년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수학에 대해 낮은 자신감을 보이는데, 그격차가 실제 성적과 흥미의 격차보다 컸다는 연구가 발표됐습니다. 방향은 제각각이지만 여성이 수학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은 개개인의 삶에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편견이 생겨난 지가 300년이 채 안 되었다고 론다 쉬빈저는 말합니다. - P24

◆◆ 영국의 첫 여성지는 수학 잡지가 되었다

18세기 여성에게 수학이 얼마나 권장됐고 여성이 수학을 얼마나 즐겼는지는 ≪숙녀들의 수첩 혹은 여성들의 책력 Ladies‘ Diary and Women‘s Almanack》(이하 <숙녀들의 수첩>>에서 잘 드러납니다.  - P25

 스테이셔너스는 표지를 포함해 분량은 40쪽, 크기는 가로 16센티미터, 세로10센티미터로 손에 쏙 들어오는 ≪숙녀들의 수첩≫을 발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숙녀들의 수첩≫에 처음부터 수학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 P25

 1705년 호에는 더 대담하게 남성보다 여성이 고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이 광물과 식물, 동물, 남성을 차례로 만들고나서야 마지막으로 여성을 만들었다"며, "신은 덜 고귀한 것에서 더 고귀한 것의 순서로 만들었다"고 썼습니다. - P26

단 6년 만에 이런 종류의 콘텐츠는 싹 사라집니다. 계기는 티퍼가 잡지 마지막에 슬쩍 끼워 넣은 수수께끼 문제에서 왔습니다. 독자의 반응은 티퍼의 예상을 뛰어넘어 자신이 답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편지는 물론이고 내년 호에 실어달라며 독자가 만든 새로운 문제도 편집부에 도착했습니다. 그중에는 간단한 산수 문제도 있었습니다. 독자의 반응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있던 존 티퍼는 마침내 1709년 호에서이렇게 선언합니다.

"왕국 곳곳에서 온 편지를 살펴보면서 수수께끼와 수학 문제가 여성들에게 가장 큰 만족과 기쁨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리법 같은 내용을 소개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앞으로는 수수께끼와 수학 퍼즐만 싣도록 하겠습니다." - P26

◆◆ 야, 너도 수학 공부할 수 있어!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한편, 육지에서도 수학을 공부할 이유가 여럿 생겼습니다. 신항로개척으로 교역이 활발해지자 교역품을 사고팔기 위한 상업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국가가 금융기관을 설립하면서 금융업도 성장했습니다.
‘인클로저 운동‘도 한창이었습니다. 울타리를 세워 ‘내 땅‘이라고 표시한 사유지가 1700년에는 농경지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 P38

이처럼 수학은 점점 실용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 선원과 상인을 위해 수학을 가르치는 학교가 생겼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영국이 1597년에 세운 그레샴 칼리지는 당시 전통적인 교육 제도가 낮게 평가하던 실용 수학을 담당했습니다. - P39

 18세기는 자연철학이 유례없는 대중적 인기를 끌던 때입니다. 1687년 뉴턴이 ‘프린키피아‘라고도 불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원리 Philosophi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를 출간해 지구와 달이 궤도를 도는 이유로 중력을 꼽고 이를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을 전후해 자연철학은 다양한 사상 경쟁 속에서 크게 발전했습니다. - P39

이런 주장에 힘입어 프랑스 상류층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학자를 집으로 초대해 ‘살롱‘이라는 사교모임을 열었습니다. 살롱은 학자들이 최신 자연철학을 공유하고 의견을 주고받는 사적 장소로 기능하며, 당시에는 대학이나 학회만큼이나 중요한 학문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 P39

 쉬빈저는 『두뇌는 평등하다』에서 "수학 공부에는 실험실이나 커다란 도서관이 필요 없기 때문에 여성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썼습니다. 닐슨 보어가 화학을 연구할 때는 실험실과 실험 도구가 필요했고, 찰스 다윈이 진화생물학을 연구할 때는 여행 자금과 여행 허가가 필요했던 반면, 아녜시가 수학을 연구할 때는 종이와 펜과 책만 있으면 됐습니다. - P40

현재 대부분의 수학과 물리 문제는 남성에게 주로 권장되는 취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순열과 조합은 스포츠 경기의 토너먼트와 리그전으로, 함수는 자동차로, 미분적분학은 로켓과 미사일로, 힘과 에너지는 야구와축구, 총으로 설명합니다. 여성에게 주로 권장되는 취향인 연애와 그림, 인형, 아이돌 문화 등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 P42

초기 ≪숙녀들의 수첩≫에 등장한 문제들이 그랬습니다. 위 문제처럼 연애와 결혼을 사례로 든 문제가 적지 않았습니다. 1707년부터 1724년까지 발간된 수학 문제 총 110개 중 7개를 차지했습니다. - P43

물론 연애와 결혼보다 더 인기 있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돈‘
입니다. 25개 문제가 상속 재산과 빌린 돈의 이자, 집의 가격, 결혼지참금 등을 다뤘습니다. 땅을 개조하고 분배하는 사례도 17개 문제에서 나와 두 번째로 많았습니다. - P44

토막 지식
영국 출판업자들의 길드, 스테이셔너스

18세기 영국에서 책력을 발간할 수 있는 곳은 단 하나, 스테이셔너스뿐이었습니다. 출판업과 관련한 기술들이 1403년에 설립한 길드인 스테이셔너스는 오랫동안 모든 출판물에 대한 독점권을 누렸고, 1695년 새로운 인쇄법으로 독점권이 축소된 후에도 18세기 후반까지 책력과 같은 몇몇 출판물을 독점적으로 발행했습니다. - P45

대표적으로 공부는 여성이 스스로 억압받고있음을 깨닫고 집을 뛰쳐나갈 용기를 주는 해방의 도구였으니, 따라서금단의 영역이 됐습니다.
이런 생각의 뿌리는 적어도 3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1727년마리아 아녜시가 쓴 라틴어 연설문에도 나타납니다. 연설문에는 박막례 씨의 ‘아부지‘가 한 말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남성들‘의 주장이 소개됩니다. - P56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여성의 교육권을 옹호하는 주장 또한 그에 못지않게 지구력이 강합니다. 여성의 교육권에 대한 목소리는 상류충 여성조차 학교에 갈 수 없던 18세기를 대학에서도 여성의 얼굴을볼 수 있는 21세기로 바꾸어놓았습니다. 18세기 유럽은 여성의 교육권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던 때입니다. - P57

◆◆ 18세기에 일어난 여성 교육권 논쟁

아녜시는 여성의 교육권을 지지하는 라틴어 연설문을 매우 어린 나이에 썼습니다. 태어난 지 고작 9년 2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연설문을 읽은 장소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집이었습니다. - P58

 아녜시의 라틴어 실력이 충분히 성장했다고 생각한 교사가 아네시에게 연설문을 쓴 뒤 이를 라틴어로 번역해 좌담회에서 발표하도록 한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어른들이연설문을 써주고 아녜시가 번역만 했을 거란 주장도 있지만, 아녜시의 연설문을 연구한 파울라 핀들렌은 "아네시의 공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참고할 문헌을 알려주고 아녜시가 연설의 구성을 마무리하도록 했을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 P58

참고했을 만한 책도 아녜시의 집에서 발견됐습니다. 바로 이탈리아 여성 철학자 주세파 바르바비콜라가 번역해 1722년에 출판한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철학 원리Principia philosophiae』입니다. - P59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인류가 동등한 이성을 타고 났다고 강조했던 철학자입니다. 바르바비콜라는 이런 서문을 쓰며여성들이 바느질과 패션, 예의범절 등의 관습적인 교육에만 머무르지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 P59

이는 아녜시의 연설문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녜시는 "(지식을 얻기 위한) 어떤 서툰 노력도 사적인 삶의 조화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아내는 교양 있는 대화를 하다 똑똑한 척 으스대지도, 공격적이지도 않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 P60

이들은 여성이 배운다고 해서 위험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려 했던 ‘우아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우아한 만큼 저항은 소극적이었습니다. 1715년에 태규가 쓴 글에서 보듯이 말입니다.

"나는 두 성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나는 신과 자연이 우리를 하위 계급에 두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명체의더 낮은 부분에 속하며, 보다 뛰어난 성별에 복종하고 굴복할 의무가 있다."

보수적인 관념에 부합하는 태도 덕에 블루스타킹은 ‘영국의 뮤즈‘
라 불릴 정도로 인기와 신뢰를 얻었으나, 한 세대가 지나자 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여성이 등장했습니다. 그녀가 바로 오늘날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입니다. - P60

의외로 『여성의 권리 옹호』는 영국에서 큰 문제없이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18세기 초엽 여성들의 소극적인 저항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입니다. 영국 사회에서 큰 인기와 신뢰를 얻었던 블루스타킹이 여성의 교육권에 대해 많은 부분 동의를 얻은 것이 바탕이 된 것입니다. - P61

◆◆ 독자들은 수학응 어떻게 공부했을까

학교는 라틴어 문법을 주로 가르칠 뿐 수학은 정규 과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였던 존 뉴턴John Newton은 1677년에 "수학을 배울 수있는 어떤 문법학교도 영국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고 썼습니다. - P72

그렇다면 숙녀들의 수첩≫ 독자들은 어디에서 수학을 공부한 걸까요? 아녜시처럼 부유하게 태어난 사람은 가정교사를 고용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플랩스티드처럼 수학적 능력을 지닌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요. 이도저도 아니라면 부유층 집안에 하인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 P72

라이트 자매는 수학에 무척 뛰어나서 1709년 호의 수학 문제를 모두 풀어낸 11명 중 2명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상품이 걸린 문제를 풀어서 ≪숙녀들의 수첩≫ 구독권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이들 자매는 아버지 매튜 라이트 덕에 수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매튜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술학 학위를 받았으며, 일식을 관측한 결과를 ≪숙녀들의 수첩≫에 제공할 정도로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깊었습니다.  - P74

◆◆ 얼마나 많은 여성이 수학 문제를 풀었을까

. 이는 잡지 부록에 기록된 이름이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를 따져서 나온 통계입니다. ≪숙녀들의 수첩≫은처음 수십 년간 편지를 보낸 독자들의 이름을 부록에 실었는데, 코스타에 따르면 1704년부터 1725년까지 부록에 실린 독자 중 68.7퍼센트가 남성적인 이름이었습니다. 그중 단 7퍼센트만이 필명을 사용했으니, 남성이 여성잡지인 ≪숙녀들의 수첩≫을 보는 것을 그리 부끄러워하지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 숫자만으로 여성의 참여가 남성에 비해 저조했다고 쉽사리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 P75

초대 편집장 존 티퍼는 1709년 호에서 "독자가 자신의 이름이 인쇄되기를 원하고 이를 알려준다면,
부록에 올리도록 하겠다"고 안내했습니다. 소위 ‘숙녀‘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를 꺼리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 P76

 바이튼은 1718년 호에서 영국 여성들의 능력에 자부심을 느끼며 "내가 많은 여성들로부터 기하학, 산수, 대수, 천문학, 철학적인 답안을 담은 편지를 400~500개 이상 받는다는 것을 알면 외국인들은 정말 놀랄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수학 문제가 1707년에 처음나왔으니, 여성 독자들이 약 10년간 매년 40~50개 정도의 편지를 보냈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그리 과장된 숫자는 아닙니다. 코스타는 이런단서를 토대로 "1707년부터 1724년까지 편지를 보낸 여성 독자 중 약 75~90퍼센트가 잡지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 P76

반면 메리 라이트는 1712년부터, 안나 라이트는 1713년부터 잡지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잡지에 나온 모든 수학 문제를 풀어대며 열성적으로 잡지를 읽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상당히 의아한 일입니다. 원인은 결혼으로 추정됩니다.  - P77

물론 ‘덕후‘에 가까울 정도로 문제를 풀어댔던 라이트 자매는 그리쉽게 취미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1713년부터는 ‘메리 넬슨‘이라는이름이, 1716년부터는 ‘안나 필로매세스‘라는 필명이 잡지에 등장해 매년 한두 문제를 푸는데, 이 둘은 각각 메리 라이트와 안나 라이트와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메리 라이트가 ‘넬슨‘이라는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점과 비슷한 이름, 결혼 시기, 등장 시기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해석이지요. - P77

이런 이유로 과학사학자 테리 펠은 18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의 얼굴을 했던 수학이 시간이 갈수록 남성의 얼굴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설명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수학 교육 격차가 증가했던 것은 수학이 여성스럽지 않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수학 자체가 발전하며 유용한 도구로서 영국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이 수학을 못한다는 고정관념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만 머무는 한, 학문과 직업의 세계인공적 공간에서 중요한 대접을 받는 분야는 종국엔 모두 남성의 얼굴을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관련 직종을 모두 남성이 차지할 테니까요. - P78

토막 지식
아녜시의 마녀

마리아 아녜시는 ‘아녜시의 마녀‘라는 곡선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곡선은 마리아 아녜시의 책 이탈리아 청년들을 위한 미적분학 두 권 중 1권 381쪽에 등장합니다.
(중략)
그럼에도 마리아 아녜시의 이름이 붙은 것은 영어 번역자의 실수 탓입니다. 마리아 아녜시는 그랜디가 라틴어 ‘vertere(돛을 돌리는 밧줄 혹은 삼각함수의 한 종류)‘에서 따와서 지은 이탈리아어 ‘versiera‘을 그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마녀‘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존 콜슨은 책 번역을 위해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헷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P79

암흑물질 춘추전국시대의
문을 열다

베라 루빈
✦ Vera Rubin
✦ 1928~2016
✦ 천문학자 - P89

‘암흑물질‘은 질량은 있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도반사하지도 않는 투명망토 같은 물질이다.
투명망토 같은 물질이라니, 터무니없다고 느낀 건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여서 1933년 천문학자 프리츠 츠위키Fritz Zwicky가 그 존재를 제안했을 때 학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루빈의 연구는 암흑물질의 첫 번째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됐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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