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차창 뒤에는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창문은 그의 겨드랑이까지 올려져 있었다. 젊은이는 흐트러진 하얀 꽃다발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젊은 여인이 겁먹은 아이를 안고 역을 나선다. 여인은 곱사등이였다.
기차는 전쟁을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꼈다. - P7

아버지가 울타리 앞에 꼿꼿이 서 있는 사진도 있었다. 굽 높은 아버지의 신발 아래 눈이 쌓여 있다. 새하얀 눈 때문에, 아버지는 마치 허공에 서 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는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경례를 붙이고 있다. 윗옷 옷깃에 룬문자*가 보인다.


*고대 게르만 문자. 히틀러는 이 가운데 태양을 상징하는 갈고리십자가 모양을독일 나치의 공식 표징으로 사용했다. 그러므로 여기서 룬문자는 나치의 갈고리십자가를 가리킨다. - P8

모든 사진의 한가운데에서 아버지는 하나의 몸짓으로 굳어있었다. 하나같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 아버지는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진들이 전부 엉터리였다. 이 많은 엉터리 사진들과 엉터리 표정들 탓에 방 안이 썰렁했다. - P9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구두코가 들려 밑창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지금까지 내내 구두끈을 밟고 왔다. 굵은 구두끈이 뒤로 길게 늘어져 하나로 뒤엉켜 있었다. - P9

 남자들의 팔과 밧줄은 길어지고 또 길어졌다. 한참 가뭄인데도 무덤 속에는 물이 차 있었다.
네 아버지는 사람을 많이 죽여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 술취한 남자 중 하나가 말했다.
쉬지나는 말했다. 그땐 전쟁중이었잖아요. 아버지는 스물다섯 명을 무찔러 훈장을 받으셨어요. 여러 개의 훈장을 집으로 가져오셨어요. - P10

남자는 화주를 들이켰다. 그의 뱃속에서 쿨렁쿨렁 소리가 났다. 내 뱃속은 무덤 속 지하수처럼 화주로 그득하지, 남자가 말서했다.
그러고는 묵직한 돌 하나를 관 위에 내려놓았다.
흰색 대리석 십자가 옆에 서 있던 장례관리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양손을 윗도리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 P11

쪼글쪼글 주름지고 비쩍 마른 노파가 가까이 오더니 땅바닥에 침을 탁 뱉고 나를 향해 욕을 한다.
조문객들이 반대편 무덤가에 서 있었다. 나는 내 몸을 훑어보다가 사람들이 내 가슴을 쳐다보고 있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몸이 으스스 떨렸다. - P12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눈이 목구멍을 타고 머릿속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손등에 잇자국이 선명했다. 이가 뜨거웠다. 입가에서 흐른 피가 어깨로 흘러내렸다. - P12

나는 쓰러졌지만 내 몸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사람들의 머리 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방들을 전부 깨끗이 치웠다.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방에는 이제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도살대였다. 그 위에 흐트러진 하얀 꽃다발을 꽂아둔 꽃병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흰 접시 하나가 놓여 있었다. - P13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검은 옷을 입을 거야,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가 머리채 한쪽 끝에 불을 붙였다. 머리채는 도살대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닿았다. 머리채가 화승처럼 타들어갔다.
불길이 너울거리며 활활 타올랐다. - P14

나는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았다. 머리채는 계속 타들어갔다.
연기가 방 안에 자욱했다.
그들이 너를 죽였어. 어머니가 말했다.
방 안을 채운 연기가 너무 짙어 우리는 더이상 서로를 보지 못했다. - P14

눈을 크게 떴다. 방 안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나는 흐트러진 하얀 꽃다발의 공 속에 누워 있었다. 그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 집이 뒤집히고 모든 것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지는게 느껴졌다.
자명종이 울렸다. 토요일 아침, 다섯시 반이었다. - P15

슈바벤 목욕

지난주에 두 살배기 아르니가 찬 바람을 쐰 탓에 코감기에 걸렸다. 어머니가 빛바랜 작은 바지로 어린 아르니의 등을 씻긴다. 어린 아르니는 버둥거린다. 어머니가 아르니를 욕조에서 들어올린다. 가엾은것, 할아버지가 말한다. 저렇게 어린 애들은 아직 목욕시키면 안 되는데, 할머니가 말한다. - P16

그러고는 물이 아직 뜨겁다고 할머니에게 소리친다. 할머니가 욕조에 들어간다. 물은 미지근하다. 비누거품이 인다. 할머니의 어깨에서 거무스름한 때가뭉클뭉클 일어난다. 할머니의 때가 어머니, 아버지의 때와 함께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욕조 가장자리가 거무스름하다. 할머니가 욕조에서 나온다. 그러고는 물이 아직 뜨겁다고 할아버지에게 소리친다. 할아버지가 욕조에 들어간다. - P17

우리 가족

어머니는 가면을 쓴 여인이다.
할머니는 내장안으로, 앞을 보지 못한다. 한쪽 눈은 백내장이고 다른 한쪽 눈은 녹내장이다.
할아버지는 음낭수종*에 걸렸다.



*음낭의 막강 안에 담황색 액체가 고이는 질환. - P19

사람들은 할머니가 순전히 재산 때문에 할아버지와 결혼했으며 원래는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할아버지와는 그야말로 근친결혼이나 다름없는 가까운 친척이어서 그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더 나았을 거라고 한다.
또 어머니가 다른 남자의 자식이고 외삼촌이 다른 남자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 다른 남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각기 다른 두 사람이라는 것이다. - P20

증조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증조할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그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자식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다른 남자와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으며 남편은 따로 있었다. 그 여자는 증조할아버지와 결혼한 후에 또 자식을얻었다. 사람들 말로는, 그 자식도 증조할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자식이라고 한다. - P21

사람들은 마을 밖에 다른 여자와 다른 자식을 둔 남자는 경멸받아 마땅하며, 그것은 근친결혼에 버금가는 짓이라고 말한다.
아니 진짜 근친결혼보다 훨씬 나쁘고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 P21

저지대

울타리 옆에 연보랏빛 꽃, 덩굴풀, 어린아이들의 젖니 사이에 낀 초록빛 열매.
할아버지는 그 덩굴풀을 먹으면 멍청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먹으면 안 돼. 너도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
딱정벌레가 내 귓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딱정벌레가 더 깊이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귀에 에틸알코올을 들이부었다. 나는 울었다. - P22

 마을에는 아카시아 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전부다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해마다 커다란 나무들이 줄줄이 꽃을피웠다.
아카시아 꽃은 먹으면 안 돼, 할아버지는 말했다. 꽃 속에 새까맣고 작은 파리들이 들어 있어, 그 파리들이 목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가면 벙어리가 된단다. 너도 벙어리가 되고 싶진 않지. - P23

우리는 날마다 아이들을 낳는다. 닭장 안에서 옥수수 속대 아이들을 낳고, 닭장 사다리에서 인형 아이들을 낳는다. 판자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면 아이들의 옷이 나부낀다.
새끼고양이들에게 인형 옷을 입히고 요람 안에 끈으로 묶어놓은 다음 요람을 흔들어 잠을 재운다. - P24

핀에 꽂힌 나비들이 파닥거리다가 죽어간다.
슈바벤에서는 동물의 시체를 썩은 고기라 부른다. 나비는 썩은 고기가 될 수 없다. 나비는 부패하지 않고 그냥 바스러진다.
세숫대야 속의 파리들. 발효유 통에 빠져 환풍기처럼 미친 듯이 윙윙거린다. 세숫대야의 잿빛 비눗물에 떠 있는 파리들. 초점잃은 눈, 침을 뻗어 물을 찌른다. 미친 듯이 버둥거리는 아주 가느다란 다리들. - P25

예전에 나비였던 애벌레들이 번데기에서 기어나온다. 포도굴 기둥에 쓸모없는 솜처럼 달라붙어 있는 번데기.
그런데 할아버지, 나비는 어디서 처음 생겨났어요? - P25

어머니의 신혼 첫날밤 이후로 그 침대에 누워 숨을 쉰 사람은아무도 없다.
그때 우리는 너무 피곤했고, 네 아버지는 화장실에서 토하고서 금방 잠들어버렸어. 그날 밤 네 아버지는 내 몸에 손도 대지않았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고 킥킥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5월이었는데, 그해에는 그때 벌써 버찌가 열렸어. 봄이 아주일찍 왔지. 네 아버지랑 나는 버찌를 따러 갔단다. - P26

어머니가 기침을 하자, 머리가 흔들렸다. 목에 자글자글 주름살이 잡혔다. 어머니의 목은 짧고 굵직했다. 그 목도 한때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언젠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의 젖가슴은 탄력 없이 처지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의 다리는 성치 않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는 뱃살이 늘어지고,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어머니는 치질 때문에 화장실에서 고통스럽게 끙끙거린다. - P27

 어머니의 손가락은 투박하고 거칠게 갈라졌다.
그 손가락은 오로지 돈을 셀 때만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매끄럽고 유연하게 움직인다.
어머니는 침실의 벽난로 연통 안에 돈을 보관한다. - P27

어머니의 손은 거칠고, 여름에는 정원의 식물들처럼 초록색이다.
어머니는 엉겅퀴를 뽑으러 간 봄날 저녁에는 수영*을 호주머니에 넣어오고, 여름에는 아주 커다란 해바라기를 가져온다.
나는 뒷마당에서 닭들과 해바라기 씨를 나눠 먹는다. 


* 마디풀과의 식물, 간장 기능을 강화하고 소화를 돕는 효험이 있어 약용 및 식용으로 쓰인다. - P28

벌이 네 입으로 들어가면 넌 죽는단다. 벌이 입천장을 쏘거든.
입천장이 퉁퉁 부어서 숨을 쉴 수 없지, 할아버지는 말했다.
나는 꽃을 꺾으면서 절대 입을 벌리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이따금 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노래를 억눌렀다. 그러다 입술 사이로 흥얼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면 그 소리를 듣고서 벌이 날아오지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방 어디서도 벌은 눈에 띄지 않았다. - P29

나는 그 가르마 탄 머리카락을 가지고 논다.
나는 옥수수 속대에서 옥수수 알 두 개를 떼어낸다. 눈구멍 두개가 멍하니 밖을 내다본다. 나는 옥수수 알을 옆으로 나란히 세 개, 또 위아래로 나란히 세 개 떼어낸다. 그 뻣뻣하게 굳은 입과 움푹 팬 코를 바라본다. - P30

마을 어귀에서 간간이 허공을 쪼아대는 까마귀들과 마주친다.
저 멀리 골짜기에, 뿌옇게 먼지 날리는 들길에 들장미가 피어있다. 들장미의 빨간 꽃머리는 일사병에 걸려 있다. 그 옆에는 파란 스피노자 자두나무가 쌀쌀맞게 서 있다. 곱게 노래하는 새들이 떨어뜨린 석회질 같은 새똥이 스피노자자두나무 이파리에 지저분하게 묻어 있다. - P31

. 새들이 집 가까이 날아오지 않는 것은 마을에 고양이가 많아서이다. 대부분 근처를 떠돌다가 마을로 모여든 고양이들이었다. 마을에는 고양이 못지않게 개도 많다. - P31

남자들은 굽이 높고 딱딱한 신발을 신고 다닌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에는 거칠고 굵은 신발 끈이 단단히 묶여 있다.
개들이 이 신발에 걷어차이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리고 몸을 고부리거나 쭉 뻗은 채로 며칠씩 길가에 방치된다. 파리 떼가 우글우글 모여들고 악취가 진동한다. - P32

우리가 키우는 젖소 한 마리가 언젠가 나를 뿔로 들이받은 채도랑을 뛰어넘었다. 젖소는 자동차들이 지나다니느라 움푹 팬고랑에 나를 떨어뜨리고는 나를 타넘고 멀리 달아났다. 흙탕물이 튄 젖통이 떨어져나갈 듯 흔들거렸다. - P33

나는 털이 나고 불룩한 젖소의 배를 눈으로 찌르고, 손을 뱃속 깊숙이 팔꿈치까지 집어넣어 그 뜨거운 내장을 헤집고 싶었다.
어제 내린 빗물이 꺼칠꺼칠한 황새풀 잎에 고여 있었다. 나는그 갈색 물로 얼굴을 씻었고, 저녁에는 볼이 정말로 빨개졌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점점 예뻐 보였다. - P34

때로는 꼼짝 않고 누워 있는데도 바스락거렸다. 우리 마을 변두리에 어떤 남자가 집을 한 채 샀는데, 꼭 그 키 크고 뼈대 굵은남자가 방 안에 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가 엄청나게 큰 해골을 박물관에 팔아서 다달이 그 돈을 받기 때문에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P35

나는 나방들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손가락에 갈색 가루가 묻어났다. 나방 날개를 만지고 나면 내 손이 닿은 날개 부분이 투명해졌다. 내가 놓아주어도 나방들은 내 무릎 아래서 한동안 파닥거릴 뿐, 더 높이 날지는 못했다.  - P35

두건을 꽉 묶은 늙은 여인들의 턱이 떨렸다. 나는 눈물 젖은 듬성듬성한 속눈썹에 붙은 눈곱을 보았고,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 침대가 관이고 그 안에 누워 있는 사람들은 죽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내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는데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 말이 며칠 동안이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P36

죽음은 언제나 벽 뒤에 있는데도 어째서 눈에 보이지 않는지,
또는 평생을 죽음 곁에서 사는데도 어째서 모든 것이 끝난 후에야 눈에 보이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 P36

나중에 도시로 나가 살면서, 나는 거리에서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이 아스팔트 위에 나동그라져 부르르 떨며 신음하는데도누구 하나 돌봐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가와 그의 손이 뻣뻣해지기 전에 반지와 시계를 빼갔다. 여자들의 목에서 금목걸이를 잡아채고 귀에서 귀고리를 떼갔다. 귓불이 떨어져나갔고 피는 금방 멎었다. - P37

나는 마치 골짜기 아래서 올려다보듯 그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우리 마을에서는 시신들이 거리가 아니라 뚜껑 달린 침대에 누워 있고 사람들은 그 앞에 앉아기도한다고.
그리고 사람들은 시신을 오랫동안 집 안에 둔다. 귓불이 푸르스름하게 부패하기 시작해야 비로소 울음을 그치고 시신을 마을밖으로 내간다. - P38

먼지가 손에 뿌옇게 묻어나고 얼굴에도 내려앉아서, 내가 마치바싹 말라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양쪽으로 손잡이가 달린 버드나무 광주리에 손바닥을 베인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고 물집이 커지면서 열이 나다가 딱딱해진다. 욱신욱신 쑤시고 아리다. - P38

늙은 잿빛 쥐들은 평생 누가 쓰다듬어주기라도 한 듯 푹신해보인다. 소리 없이 쪼르르 내달리며 요리조리 길게 곡선을 그린다. 머리통이 어찌나 작은지, 그런 두개골 아래서는 모든 것이뾰족하고 가느다랗고 납작해 보일 것만 같다.
저것들이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 보렴, 어머니가 말한다. - P39

고양이가 다가와 쥐가 꼼짝도 하지 않을 때까지 이리 벌렁 저리 벌렁 뒤집는다.
그러다 재미가 없는지 쥐의 머리통을 물어뜯는다. 고양이의이빨 아래 우두둑 으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고양이는 이따금 우두둑 씹어대며 이빨을 드러낸다. - P39

광주리에 옥수수가 수북이 쌓인다. 곳간이 점점 커진다. 아마도 텅 비고 나면 가장 커 보일 것이다.
옥수수들이 저절로 내 손으로 굴러와서, 저절로 광주리 안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손바닥에 아무것도 없을 때만 통증이 느껴진다. - P40

10월이다. 10월에는 교회 축성일이 있다.
오락사격장에서 옆집 소년이 나 대신 총을 쏘았다.
함석판에는 닭, 고양이, 호랑이, 난쟁이,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수염 난 난쟁이는 산타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오락사격장의 남자는 외팔이였다. 나는 발돋움하고 서서 남자에게 돈을 건넸다. 남자는 한 손과 무릎으로 총알을 장전했다.
그러고는 내 사수인 소년에게 총을 내밀었다. - P41

선글라스, 목걸이, 뻣뻣한 고무옷을 입은 인형, 벌거벗은 여자들이 그려진 지갑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오뚝이와 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쥐 한 마리가 유난히 어설퍼 보였다. 나는 그 쥐를 골랐다. - P41

쥐는 암회색이었으며 네모난 머리에 헝겊 귀, 가죽 꼬리가 달려 있었다. 흰 실이 감긴 실패가 배 밑에 붙어 있고, 실 끝에는번쩍거리는 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나는 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가 손을 떼었다. - P42

그러다 서리가 내리면, 초록색 얼굴들에 투명한 점들이 박히고 능금 껍질에서는 높이 자란 무성한 풀냄새가 물씬 풍긴다. 골짜기가 얼마나 깊은지 절로 실감난다.
겨울이면 나는 그 야생 능금을 먹었다.
어머니는 오븐팬에 능금을 담아 뜨거운 오븐 안으로 밀어넣었다.  - P43

아버지는 늘 나보다 더 많이 먹었다. 능금 속까지 통째로 먹는데도 한 번도 배가 아픈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능금을 먹고 나서 씨를 털이 덥수룩한 손에 뱉었고,
기다란 갈색 꼭지 끄트머리가 빗자루처럼 보일 때까지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고 나서야 능금 씨와 너덜너덜해진 능금 꼭지를 불 속에 집어던졌다. - P44

집배원의 늘어진 커다란 외투 칼라가 마치 눈 덮인 갈색 수렁처럼 보였다.
집배원의 모자 속에도, 외투 호주머니 속에도, 장화 속에도,
커다란 우편가방 속에도 눈이 내렸다.
어느 날 아침, 펑펑 내리는 눈을 뚫고 텅 빈 바람을 가르고 간신히 날이 밝았다. 신문은 오지 않았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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