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음모

리라와 그녀의 데몬은 부엌 쪽에서 보이지 않게 한쪽 벽으로 바싹 붙어 어두워지고 있는 홀을 지나갔다. 홀에는 커다란 식탁 세 개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반짝거리는 은식기와 유리잔들이 놓였고,
손님들이 앉을 기다란 의자들도 얌전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벽에는 전임 총장들의 초상화가 높다랗게 걸려 있었다. - P13

리라는 총장석에 놓인 가장 큰 유리잔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튕겼다. 쨍하는 맑은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혼날 짓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군. 조신하게 행동해."
리라의 데몸인 판탈라이몬이 말했다 - P13

판탈라이몬이 리라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이젠 됐지? 나갈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이제부터 둘러볼 거야."
넓은 귀빈실에는 윤이 나는 자단(紫檀)으로 만든 타원형 탁자가 놓여있었고, 그 위에는 다양한 크기의 유리병과 유리잔, 그리고 파이프 걸이가 부착된 은제 끽연대(臺煙臺) 등이 있었다. 탁자 근처에 놓인 선반에는 작은 식탁용 보온 냄비와 양귀비가 담긴 바구니도 있었다. - P14

 홀에 걸려 있던 인물들보다 더 오래전 사람들 같았다. 수염을 기르고 예복을 입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들은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듯 엄숙한 눈빛으로 리라를 쏘아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무슨 얘기들을 할까?"
리라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의자 뒤로 숨어, 얼른!"
리라는 재빨리 안락의자 뒤로 가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방 한가운데놓인 안락의자 뒤라는 장소는 숨기에 그다지 좋은 곳이 못 되었다. 만일 작은 소리라도 내 들키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 P15

"아스리엘 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총장이었다. 숨을 죽인 리라의 눈에 집사의 데몬이 보였다. 대부분의 하인처럼 그의 데몬도 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데몬은 총총걸음으로 따라 들어와서는 집사의 발 옆에 조용히 웅크리고 앉았다. 그때 총장의 발도 보였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낡은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예,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비행선 선착장에서도 아무 전갈이없었고요." - P15

총장은 호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은 종이를 하나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황금빛 포도주가 담긴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종이 안에담겨 있던 하얀 가루를 안으로 쏟아 부었다. 그런 다음 종이를 구겨서벽난로에 던져 넣은 뒤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하얀 가루가 다 녹을때까지 포도주를 젓고는 다시 유리 마개를 닫았다.
(중략)
리라가 속삭였다.
"판, 너도 봤지?"
"물론이지. 이제 사무장이 오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자." - P17

만약 총장이 포도주에 하얀 가루를 넣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리라는 사무장에게 들켜 꾸중을 듣거나 말거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것이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복도를 이용하면 요행히 들키지 않을 수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리라는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 P17

리라는 사무장의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사무장이 은제 끽연대 옆의 파이프들을 나란히 정리하는모습을 보았다. 사무장은 포도주병과 유리잔을 한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옆머리를 매만진 다음 자신의 데몬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의 데몬 역시 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P18

"밖으로 나가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
리라가 속삭였다.
"아니면 총장이 포도주에 독약 타는 걸 못 봤을 거야. 너도 총장이 집사에게 토케이에 대해 물어보는 것 들었지? 분명 삼촌을 죽이려는 거야." - P18

"틀림없이 독약이야. 총장은 집사를 내보낸 뒤에 그 일을 했어. 만일 나쁜 짓이 아니라면 집사가 봐도 상관없잖아. 뭔가 정치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벌써 며칠 동안 하인들이 그런 얘길 하고 있었거든. 판, 우리는 살인을 막아야 해!" - P19

"그래, 난 겁쟁이야. 그러는 넌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뛰쳐나가 손에 쥔 유리잔을 빼앗기라도 하겠단 말이야?"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 눈으로 다 봤는걸. 그러니 어쩔 수 없잖아.
너도 양심이란 말은 들어 봤겠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면서 도서관 같은 데 앉아 볼펜이나 돌리고 있을 순 없어. 절대 그런 짓은 하지않을 거야. 알겠니?" - P20

"하지만 그 문제는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들이 자신들만의 비밀을 즐기고 싶다면 넌 그저 네가 더 잘났다고 생각하며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 거야. 숨어서 엿보는 행동은 정말 어리석어."
"알고 있어. 그러니 잔소리 좀 그만 해.."
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라는 옷장의 딱딱한 바닥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판탈라이몬은 예복에 닿은 더듬이를 신경질적으로 휙 잡아당겼다. 리라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 P20

리라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정작 걱정하는 사람은 삼촌 아스리엘 경이었다.  - P20

아스리엘 경과 총장은 모두 수상의 특별자문기구인
‘각료회의‘의 위원이었다. 그러니 오늘 그가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도 각료회의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각료 회의라면 마땅히 이곳 조던 대학의 귀빈실이 아닌 궁전에서 열려야 했다.
요즘 대학 내에는 여러 날째 수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소문인즉 타타르족이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입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북진했다는 것이었다. - P21

집사는 서둘러 호주머니에 양귀비 잎을 쑤셔 넣고는 방에 들어온 사람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스리엘 경이시군요!"
집사의 말에 리라는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아스리엘 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리라는 몸을 돌려 삼촌을 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오랜만이네, 렌."
아스리엘 경이 말했다. 리라는 삼촌의 걸걸한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 P22

. 이제 눈에 띄지 않게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용히숨죽이고 앉아 들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스리엘 경의 데몬인 흰 표범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곳에서 그 영상들을 보여 주시려고요?"
표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강당으로 옮겨 가는 것보다 덜 번잡스러우니까. 게다가 학자들은 표본도 보고 싶어 할 거야. 곧 짐꾼을 보내야지. 지금은 어려운 때야, 스텔마리아."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해요."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몸을 쭉 뻗었다. 리라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 P23

"총장님께서 특별히 아스리엘 경을 위해 준비하신 겁니다. 1898년산은 서른여섯 병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은 모두 사라지는 법이지. 쟁반은 내 옆에 놓아주게. 그리고 짐꾼에게 내가 별장에 놓아둔 가방 두 개를 이곳으로 가져오란다고 전해 주겠나?"
"여기에 말입니까. 아스리엘 경?" - P23

"렌, 자네는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군."
아스리엘 경이 나무랐다.
"내게 질문할 생각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하게."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코슨 씨에겐 알리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알겠네. 그렇다면 말하도록 해."
코슨 씨란 다름 아닌 사무장이었다. - P24

아스리엘 경은 벽난로에서 몸을 돌렸다. 리라는 이제 그를 완전히 볼수 있었다. 그리고 삼촌이 뚱뚱한 집사나 허리가 굽고 기력이 쇠한 학자들과 대조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새삼 놀랐다. 아스리엘 경은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거무스름한 얼굴은 사나워 보였고, 큰 소리로 웃을 때조차 눈초리는 번득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도전적 내지 호전적인 분위기를 풍겼으며, 결코 동정이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 아니었다.  - P24

아스리엘 경이 토케이가 든 유리병 마개를 열고 포도주를 따르는 것을 보자 리라는 갑자기 위장이 뒤틀리는듯했다.
"안 돼요!"
미처 깨닫기도 전에 리라의 입에서 조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스리엘 경은 즉시 몸을 돌렸다.
"거기 누구냐?"
리라는 비틀거리며 옷장 밖으로 걸어 나와서는 이스라엘 경의 손에서 술잔을 낚아챘다. 술이 넘쳐 탁자 가장자리와 카펫으로 튀는 동시에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 P25

"전 방금 삼촌의 생명을 구한 거라고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아스리엘 경은 무섭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리라는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니?"
아스리엘 경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포도주엔 독이 들어 있어요."
리라가 앙다문 이 사이로 말했다.
"총장님이 그 안에 하얀 가루를 넣는 걸 제가 봤다고요." - P25

 아스리엘 경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는 듯했다. 리라는 감히 그의 얼굴을 쳐다볼엄두도 내지 못했다.
"전 그냥 방이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서 들어왔어요. 저도 잘못했다는건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 들어오기 전에 빠져나가려고 했어요. 바로 그때 총장님이 오는 소리가 들렸고, 저는 도망갈 데가 없었어요. 옷장이 유일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이었고요. 그래서 그가 포도주에 하얀 가루를 넣는 것을 보게 된 거예요. 만일 제가.....!" - P26

"그래, 슈터. 둘 다 이 탁자 옆에 두면 돼."
리라는 긴장을 풀었다. 어깨와 손목이 아팠다. 평범한 소녀라면 큰소리로 울고도 남을 만한 통증이었다. 하지만 리라는 이를 악물고 아픔이 가라앉을 때까지 팔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때 유리잔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런, 슈터 조심해야지. 자네가 한 짓을 좀 보라고." - P26

삼촌은 토케이가 든 유리병을 탁자 가장자리에 놓아 떨어뜨리고는 마치 짐꾼이 실수한 것처럼 꾸며 대고 있었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내려놓고는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생각보다 탁자에 가까이 있었나 봅니다."
"어서 닦을 것을 가져와 카펫이 젖기 전에 빨리!" - P27

노인이 카펫에 걸레질을 하고 있을 때 집사가 아스리엘 경의 하인 소롤드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놋쇠 손잡이가 달린 묵직한 나무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짐꾼이 하는 일을 보고는 제자리에 멈춰섰다.
"그래, 토케이가 담긴 유리병이 깨졌어. 안타깝지만 말일세. 그게 환등기인가? 소롤드, 옷장 옆에 세우게. 내가 다른 쪽 끝에 스크린을 걸겠네."
리라는 옷장 문틈으로 스크린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삼촌이 일부러 그곳에다 스크린을 거는 것인지 궁금했다. - P27

리라는 삼촌의 시선이 마치 화살이나 창이라도 되는 듯한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데몬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데몬은 조용히 아스리엘 경의 옆으로 다가갔다. 민첩하면서도 우아하게, 그리고 조금은 위협적으로 보이는 흰 표범은 초록색 눈으로 방을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때 홀 쪽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가 돌아갔다. - P28

"총장님, 드디어 제가 돌아왔습니다. 손님들을 들어오게 하세요. 아주 흥미로운 것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아스리엘 경이 말했다. - P29

알 수 없는 북극

옷장 속의 리라는 총장의 눈을 볼 수 있었다. 과연 총장은 토케이가 있었던 탁자쪽을 흘끗 돌아보았다.
"총장님, 제가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공연히 식사하시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 이곳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부총장님.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제 차림새를 양해해 주십시오. 지금 막 도착해서 그렇습니다. 아! 총장님, 알아차리셨군요. 토케이는 사라졌습니다. 짐꾼이 탁자에 몸을 부딪히는 바람에 그만…………. 하지만 다 제 불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사제. 최근 논문은 정말 흥미롭던데요." - P30

그녀는 그곳에 있는 학자들을 잘 알았다. 사서, 부총장, 조사 담당자들은 리라와 함께 생활하며 그녀를 가르치고, 꾸짖고, 달래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리라에게 가족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리라는 하인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꼈다. 학자들에겐 우연히 그들에게 떠넘겨진 선머슴같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으니까. - P31

리라는 매우 조심스럽게 모피가 달린 기다란 옷을 옷걸이에서 빼내 바닥에 깔고 앉았다.
"낡고 따끔거리는 옷을 깔아야지. 너무 편안하면 잠이 올 텐데."
판탈라이몬이 걱정했다.
"네가 깨워 주면 되잖아."
리라는 가만히 앉아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P32

아스리엘 경이 말을 이었다.
"우선 여러분께 보여 드릴 슬라이드가 몇 개 있습니다. 부총장님, 이리로 오시죠. 이곳에서 슬라이드가 가장 잘 보일 겁니다. 총장님께서도의자를 옷장 가까이 옮겨 주시겠습니까?"
나이가 많은 부총장은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스크린 근처로 자리를 옮기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총장은 사서 옆에 앉게 되었다.
총장과 사서가 앉은 곳 바로 곁에 리라가 웅크리고 있는 옷장이 있었다. - P33

 총장은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자마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교활한 놈! 포도주에 대해 분명 알고 있었어."
이번에는 사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금을 요구할 겁니다. 만일 투표라도 하자고 하면..………….
"그러면 당연히 반대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아스리엘 경이 펌프를 이용해 공기를 밀어 넣자 환등기에서 쉿 하는소리가 났다.  - P33

아스리엘 경은 첫 번째 슬라이드를 집어넣고 렌즈 뒤로 미끄러지게 했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강하게 대비되는 둥그런 포토그램 (Photogram,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지 위에 직접 피사체를 놓고 찍는 실루엣 사진)이스크린에 나타났다. 사진은 보름달이 뜬 밤에 찍은 것으로 중간쯤에 통나무집이 있었다. - P33

"이 사진은 보통 쓰이는 질산은 감광유제로 찍은 것입니다. 이제 다른 사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1분 후에 찍은 것으로 특별히 준비된 새로운 감광유제를 사용했습니다."
아스리엘 경은 첫 번째 슬라이드를 꺼내고 다른 것을 넣었다. 이번 사진은 훨씬 더 어두웠다. 마치 달빛을 걸러 낸 듯 보였다. 여전히 지평선과 오두막집, 눈으로 덮인 지붕은 볼 수 있었지만 복잡한 도구들은어둠 속에 가려진 상태였다. 특이한 점은 남자의 모습이 전혀 달라인다는 사실이었다. - P34

"내려가는 겁니다. 하지만 빛은 아닙니다. ‘더스트‘라 불리는 거죠."
아스리엘 경이 그 단어를 입 밖에 낼 때의 분위기 때문에 리라는 그것이 평범한 ‘먼지‘가 아님을 직감했다. 학자들의 반응은 그녀의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 P34

"저 남자의 데몬 아닌가?"
조사담당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 당시 데몬은 뱀의 형체로 그의 목을 감고 있었습니다.
희미하게 보이는 저 형체는 어린아이입니다."
"분리된 아이?"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말을 갑자기 중단한 것으로 보아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말인 것 같았다.
방 안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 P35

"하늘에서 내려와 빛처럼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겁니다. 원하신다면이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셔도 됩니다. 떠날 때 두고 갈 테니까요. 이새로운 감광유제의 효과를 알려 드리기 위해 이 사진을 보여 드린 겁니다. 이제 다른 사진을 보시죠."
아스리엘 경은 슬라이드를 교체했다. 다음 사진 역시 밤에 찍은 것이었다. 하지만 달은 없었다. 낮은 지평선에 대비되어 희미하게 윤곽이 드러난 몇 개의 텐트가 가장 눈에 띄었다. 
- P36

"저게 뭐요?"
부총장이 물었다.
"오로라 사진입니다."
"아주 잘 찍었군요. 지금까지 본 것들 중 최곱니다."
파머리언 교수가 말했다.
"무지해서 죄송합니다만, 저것이 혹 북극광이란 겁니까?"
늙은 성가대 지휘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P36

아스리엘 경은 슬라이드를 꺼냈다. 리라는 총장이 나지막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투표를 강요하면 주재 기간 조항을 들어 반대하자고. 그는 지난 52주 중 30주를 대학에서 보내지 못하지 않았나?"
"그는 벌써 사제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게다가......"
사서가 우물거렸다.
아스리엘 경은 새로운 슬라이드를 환등기 틀에 넣었다. 그것은 같은장면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바로 전의 사진과는 달리 많은 물체가 훨씬더 희미하게 보였고, 하늘에 나타난 오로라도 마찬가지였다. - P37

왜냐하면 하늘에 떠 있는 것은 분명 도시였기 때문이다. 탑과 둥근 지붕, 벽, 건물, 길 등이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닌가!
캐싱턴 학자가 말했다.
"저건・・・・・・ 도시 같은데?"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아스리엘 경이 말했다.
"분명 다른 세계의 도시겠지?"
학장이 경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리엘 경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몇몇 학자는 흥분한 듯 보였다.
마치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이론상으로는 유니콘의 존재를 인정한 사람들에게 지금 막 잡아 온 유니콘을 보여 준 것 같았다. - P37

"저도 사실이 아니길 바랐습니다만・・・・・・ 여기 증거를 가지고 왔습니다."
갑자기 귀빈실 안은 흥분과 걱정이 뒤섞여 술렁거렸다. 아스리엘 경의 지시에 따라 두세 명의 젊은 학자가 나무상자를 앞으로 옮겼다. 아스리엘 경은 마지막 슬라이드를 꺼냈지만 환등기는 그대로 켜 두었다.
그는 강렬한 불빛을 받은 채 상자를 열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리라는 습기 찬 나무에서 못이 빠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P38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잠시 후리라는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공포에 찬 외침이자, 크게 항의하는 소리이자, 분노와 두려움에 떠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설마 저게 사람......."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총장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스리엘 경, 대체 그게 뭐요?"
"이것은 슈타니슬라우스 그루만의 머리입니다." - P39

"스발바르 지역의 빙하 속에서 그의 시체를 찾아냈습니다. 그루만을죽인 자들이 머리를 이렇게 해 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머리 가죽을 벗기는 의식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부총장님께서 특히 이런 의식에 정통하시리라고 생각하는데요."
부총장이 천천히 설명했다.
"타타르족의 풍습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베리아와 퉁그스카 지역 원주민들이 시행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스크렐링까지 퍼져 나간 것입니다. 비록 뉴 덴마크에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말이죠. 좀 더 자세히 살펴봐도 될까요, 아스리엘 경?" - P40

"그런데 타타르족의 손에 넘어가다니......."
"하지만 그 먼 북극에서?"
"그들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숙이 침입했던 게 분명하오!"
"분명 스발바르 근처에서 발견했다고 했습니까?"
학장이 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판제르비에르네가 이 사건과 관계 있다고 보십니까?"
리라는 그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 P41

리라는 다시 삼촌을 바라보았다. 그는 냉소를 띠고 말없이 학자들을바라보고 있었다.
"이오푸르 락니손이 대관절 누굽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스발바르의 왕이죠."
파머리언 교수가 말을 이었다. - P41

리라는 학자들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파머리언 교수의말도 전혀 논리에 맞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게다가 머리 가죽을 벗기는 풍습과 북극광, 신비한 더스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아스리엘 경이 자신의 수집품과 사진 설명을 끝내자 다른 탐험대 조성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 P42

누군가 어깨를 흔들자 리라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조용히 해!"
삼촌이었다. 옷장 문은 열려 있었고 그는 빛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학자들은 모두 갔다. 하지만 아직 하인들이 주위에 있을 거야. 이제네 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오늘 본 것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해서는 안 돼, 알았지?" - P42

판탈라이몬의 하얀 털이 곤두섰다. 리라는 목이 간지러웠다. 아스리엘 경이 잠시 웃었다.
"철없이 굴지 마라. 총장의 얼굴은 봤니?"
그는 슬라이드와 표본 상자를 포장하며 물었다.
"네, 그는 제일 먼저 포도주병을 찾았어요."
"잘했다. 지금쯤 무척 화가 나 있을 거야. 이제 가서 자거라."
"삼촌은 뭐 하실 건데요?"
"북극으로 떠날 거야. 10분 뒤에 출발할 거다." - P43

"왜요? 왜 전 이곳에 있어야 하죠? 왜 삼촌과 북극에 가면 안 되나요? 저도 북극광, 곰, 빙하 같은 것을 보고 싶어요. 더스트에 대해서도알고 싶고요. 공중에 뜬 도시에 대해서도요. 그것은 또 다른 세계인가요?"
"얘야, 넌 가면 안 돼.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려라.
지금은 아주 위험한 시기야. 내가 시키는 대로 어서 침실로 가. 착하게행동한다면 에스키모인들이 조각한 바다코끼리 엄니를 가져다주마.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면 삼촌이 화낼 거야." - P44

총장과 사서는 오랜 친구이자 동맹자 관계였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끝난 뒤에는 브랜튄을 한 잔씩 마시며 서로를 위로하는 것이 버릇처럼되어 있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아스리엘 경을 떠나보낸 후에도 총장의서재에 앉아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벽난로에는 새로 지핀 불이 활활 타올랐고 커튼도 내려져 있었다. 두 사람의 데몬들도 편한 장소에 엎드려 있었다.
"총장님께서는 아스리엘 경이 그 포도주에 무언가 섞였다는 사실을 정말 알고 있었다고 믿으십니까?"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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