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마가키 기미코도 그날 밤 그녀의 집에 갔던 게 아닐까. 아마도 내가 다녀온 다음에? 그리고 침실에서 사체를 발견하고 자신이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도망치듯이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온 것일까....
그렇다, 나는 전화를 받고 그다음 날 밤에 레이코의 맨션에갔었다. 문을 열어준 그녀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에 나는 오늘 밤으로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 P152

테이프에 고백한 대로 칠 년 전, 나는 사람 한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건 살인이 아니라 과실이었다. 근무처 병원에서 죽어가는 환자에게서 불과 일 분쯤 눈을 떼고 곁에 있던 만화 잡지를 읽은 것뿐이다.  - P152

어차피 그다음 날에는 죽었을 환자였다. 그 과실은 단지 죽음을 하루 앞당긴 것뿐이다. 하지만 그게 세상에 알려지면 나는 몇십 년의 장래를 모조리 잃지 않으면 안 된다. 단일분, 줄이 입에서 떨어진 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을 수있다. 인간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건 너무도 간단하다. - P152

왜냐하면 나는 의사니까. 그녀의 얼굴은 헤벌어진 입술에 비명의 여운을 남긴 채 추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에서딱 한 번만 교통사고 후의 흉물을 떠올리고 이제는 다 잊자고 생각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되고, 나는 마침내 그 점토 얼굴을 완전히 짓뭉개버린 것이다…. - P153

예상대로 사사하라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예상치못한 일 두 가지가 생겼다. 우선 사사하라가 나에게 진범을 찾아달라고 부탁해온 것이다. - P153

는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나와 그녀의 관계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큰돈을 들여 병원에서도 최상급의 일인실에 입원한 가장 큰 이유는 나를 협박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베개 밑에서 테이프를 꺼내 한밤중의 복도에까지 들릴 만큼 큰 음량으로 내 목소리를 왕왕 울려서 나를 벌벌 떨게 했다. - P153

오늘 아침에 전화가 연결된 것은 두 사람뿐이다. 아직 네명이 남았다. 내일 아침에 할까 하다가 오늘 밤 안에 끝내버리기로 했다. 사사하라가 호텔 메모지에 적어준 용의자 목록을 꺼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 밑에 그가 직접 알아낸 자택과 직장,
두 개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맨 앞의 두 명은 이미 연락을 끝냈다. - P154

 범인일 리 없는 사람이 살인을 고백하고 자살하는 건 상상도 못했다. 또 한 사람,
마가키 기미코에게도 혹시 상상조차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그녀도 이번 사건에서 뭔가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갖고 있다. - P155

사사하라가 이 물음표를 영원히 풀지 못하기를 기도했다. 그곳에 적혀야 할 이름은 ‘하마노 야스히코‘, 자신의 후배이자 누구보다 성실하다고 믿었던 자라는 것. 그것만은 사사하라가 끝까지 알지 못하기를 빌었다.
목록의 세 번째 이름 기타가와 준의 두 개의 전화번호 중에어느 쪽에 연락할지 망설였다 - P155

그는 결국 작업실 쪽을 선택했다. 손가락이 일곱 개의 숫자를 눌렀다. 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갔다. 겨울밤의 정적 속에 단지 그 차 소리만 울렸다.
그렇다, 오늘 밤 안으로 끝내버리는 게 좋다. - P1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