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누군가 誰か

내년 봄 컬렉션에는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저 흰색을 살려보면 어떨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더듬다가 문득 거짓말이라는단어를 입 밖에 내어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래, 전화한 그 남자는 거짓말을 한 거야."
실내가 따뜻해서 창유리에는 흐릿하게 김이 서렸다.  - P110

 내가 그날 밤 우연히 미오리 레이코의 맨션 근처에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맨션 뒤쪽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비상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나를 봤다고 말했다. 마치 내가 레이코를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듯한 말투였다. - P110

오늘 아침 전화한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사체를 발견한 충격으로 내가 얼굴이 창백해지고 벌벌 떨었는지는 모르지만, 비상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발소리를 안내려고 평소보다 천천히 내려왔다. 한 단 한 단 천천히.. 애초에나는 키가 작아서 항상 굽이 10센티미터나 되는 하이힐을 신는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 P111

메마르고 개성 없는 남자의 목소리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또렷이 기억난다.
"내가 지금 일 때문에 도쿄를 떠나야 해요. 모레 돌아온 뒤에, 그래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모레 밤 11시에 이 번호로 다시전화하세요. 어떤 얘기든 받아줄 테니까. 그때까지 그날 밤 나를 봤다는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 P111

 오래전에 내가 ‘악마와 천사, 어느 쪽에 입을 맞춰도 어울린다‘라고 극찬했던 그녀의 입술은 이제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게다가 내가 그날 밤 레이코의 집에서 문제의 사진과 필름을 훔쳐 온 것은 영원히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질 일이 없다. - P112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현재 하는 디자인 일을 반절넘게 맡고 있는 야마가미 아키라가 오늘 패션쇼의 매상을 들고온 것이다. 작년부터 지방에서 하는 쇼는 모두 야마가미에게 넘겼는데 최근 들어 젊은 디자이너들의 활약은 눈부신 데가 있었다. 실은 한 세대 전까지는 디자이너라고 하면 오트 쿠튀르로 유명인사나 재벌가 사모님들에게 특권층이라는 허영심을 채워주는 의상을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 P113

그녀도 언제까지나 이십 년 경력과 견직물의 프라이드에만 기댈 수는 없었다. (중략) 심지어 가구며 주방 용품과 침구에 자신의 이름을 찍어 판매망을 넓히기에 혈안이었다. 냉장고며 이불에까지 ‘기미코 마가키‘라는 이름을 넣는 것은 자부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후략) - P113

이곳 삿포로까지 일부러 찾아온 효과가 있었는지 쇼 행사장은 젊은 여성들로 가득 차고, 프레타포르테라고 해도 보통 기성복보다 몇 배는 비싼 옷들이 쇼가 끝나고 삼십 분 만에 완판되었다. 게다가 목표했던 물량의 두 배 가까운 추가 주문도 들어왔다. - P114

그녀는 곧바로 수표를 손끝으로 헤아리며 액수를 계산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어느새 세월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다, 오 년 전에는 그 여자애도 단지 이런 수표 한 장에 지나지 않았다... - P115

아주 매력적인 표정을 가졌지만, 그게 단지 두 종류뿐이라는 것이다. 화려함의 어딘가에 그늘진 뜨거움을함께 짜 넣은 듯한 신비한 시선, 얼음이 불타오르는 기적마저 믿게 할 듯한 시선뿐이었다.
"그래, 모델이야. 모델로서는 완벽한 표정이지."
그녀는 수화기에 대고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부르짖었다.
실제로 만나보니 예상보다 키가 작았지만 아름다움은 사진보다 훨씬 더해서 얼굴의 화려함이 자그마한 몸매를 커버해주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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