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는 잠옷을 입고 우리 집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까지 올 분별력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머리가 깨질듯이 지끈거렸다. - P174
나를 본 가즈미의 얼굴에 안도와 탄식이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취했는데 용케 택시를 잡았네." "몇시쯤에 돌아왔어?" "새벽 네시 다 돼서 서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였다니까. 그렇게 취하다니 당신답지 않아. 대체 누구랑 그렇게 마신 거야?" - P174
"회사에 결근한다고 전화해줬어. 당신 요새 너무 무리했잖아. 아직 사건의 상처에서 회복되지도 않았고, 당신도 피해자라는거 몰라? 그젯밤에도 당신 잠 못잤지? 알고 있었어. 당신 계속이러다가는 몸이 견디지 못할 거야." - P175
"미우라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면서?"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어제 아버지가 전화로 알려주셨어. 미우라가 아니면 대체 누가 범인이란 거지? 경찰이 제대로 찾아낼 수 있을까?" "경찰은 못 믿어." 나는 말했다. "왜?" "범인은 미우라야 확실해." - P176
"그러고보니 어제 도미사와 씨한테도 전화가 왔었어." 미치코가 전화를 했다! 방심한 탓에 충격이 컸다. 하마터면주스 잔을 넘어뜨릴 뻔했다. 하지만 아내는 내 동요를 눈치챈 것 같지 않았다. - P176
"당신하고 둘이서 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네." 가즈미가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중략) 그림만 보면 평화로웠다. 예전과 다름없이 신뢰와 행복으로 충만한 우리 집 풍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풍경이 믿기지 않았다. 지독한 위화감마저 들었다. - P177
나는 자문했다. 그러기 위해 지금 무얼 해야 하는가라고. 답은 하나밖에 없다. 시게루를 죽인 범인을 직접 밝혀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미치코의 마음속에 쌓인 나를 향한 증오의 에너지를 모두 살인범에게 돌려야 한다. - P178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목적지는 나카노 뉴하임305호다. 금요일에 시게루를 감금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거기밖에 없다. 그제 방문했을 때 어지러웠던 집 안 상태를 생각하면 시게루가 감금돼 있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삼십 분은 미우라를 집에서 내보내야만 한다. "다 마셨어?" - P179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어.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에 당신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도와줘." "대체 뭘 하려는 건데?" "미우라를 만나줘." 가즈미는 너무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 P180
5장 칩임 / 앉아 있는 시체
"하지만 내가 미우라를 잘 붙잡아둘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 "그냥 평범한 얘기를 하면 돼. 동생에 관련된 추억이든 뭐든. 미우라도 당신까지 의심하지는 않겠지." 가즈미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차에서 내려 기모노의 소매 주름을 폈다. 나는 아내에게 기모노를 입고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 P183
계획은 단순하다. 가즈미가 미우라의 집으로 찾아가서 밖으로 불러낸다. 그녀의 뜬금없는 방문에는 그저께 나의 폭행에 대해나 대신 사과한다는 번듯한 구실이 있다. (증략)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다카시를 두고 갈등이 있었지만 미우라가 가즈미를 매몰차게 내칠 리는 없다. 그에게 가즈미는 내 아내이기 전에 죽은 쓰구미의 단 하나뿐인 언니니까. - P184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고 305호 미우라 야스시‘라고 적힌 우편함을 열었다. 나는 미우라의 버릇을 알고 있었다. 걸핏하면 열쇠를 잃어버려 여벌 열쇠를 우편함 뚜껑 뒷면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놓는다고 예전에 아내의 동생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P185
너무 어질러져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처음에는 붙박이장을 열어서 먼지 쌓인 옷가지들에 머리를 쑤셔넣었다. 아이가 감금됐던 흔적은 없었다. 작년에 일어난 여아유괴 사건이 떠올라서 비디오테이프 선반을 다 뒤집어보고 잡히는 대로 두세 편 재생해봤지만, 시간 낭비였다. - P186
실망감과 초조감이 밀려왔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전화기를 조사했다. 사건 당일 열시 이후의 연락은 이 방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 집 전화번호 메모를 남길 만큼 바보는 아닐 것이다. 메모리가 부착된 다기능 전화기라 마지막에 건 전화번호가 저장돼있을 거라 생각하고 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 P187
아니, 가즈미와 귀가했는데 현관 앞에 미치코가 기다리고 있는 그림이 눈에 그려져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 방 어딘가에 내가 놓친 증거가 분명 남아있을 것이다.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깔끔한 활자가 인쇄된 종이 몇 장이눈에 띄었다. 이게 노리즈키가 말한 추리소설 초고인가? - P187
(전략) "뭐가 보여, 미우라? 뭐가 보이는지 얘기해줘. 이 작자들 모두가여기 살게 되는 거야? 그런 뜻이야. 미우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사는게 보여?"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사정이 멈췄다. "나쁜 놈, 자기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주제에." 사정, 사정.
이게 전부였다. 나는 종이를 작게 접어서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해 고개를 돌렸다. 뒤에 미우라가있었다. 여전히 얼굴이 부어 있었다. 미우라의 입가에 흉포하게 경련이 일었고, 한껏 팔을 쳐들더니 나를 향해 내리쳤다. - P190
2
이번에는 내가 기절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였다. 전과는 달리 기억의 혼란도 없었다. 미우라에게 딱딱한 뭔가로 얻어맞고 쓰러진 일이 뚜렷이 기억났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뜰 때보다 훨씬 정신이 온전했다. 안주머니를 더듬어보고 미우라의 원고가 아직 있는 걸 확인했다 - P191
이 상태로 문을 박차고 나가 맨손으로 미우라와 맞서는 건 무모하다. 무기가 될 만한 게 있는지 욕실 안을 둘러봤다. 방망이같은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스프레이식 욕실 세제에 눈길이 멈췄다. ‘취급 주의. 원액이 눈에 들어갔을 경우 바로 물로 세척‘이라고 적혀 있다. - P192
엉거주춤한 자세로 집 안을 재빨리 둘러봤다. 실내에 인기이 없었다. 이 공간의 주인은 나를 내버려둔 채 모습을 감춘 듯했다. 일단 신변의 위협은 사라졌다. 순간 내 모습이 서부의 총잡이같이 우스꽝스럽다는 걸 깨닫고 스프레이 세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 P193
내가 잘못 생각했다. 미우라는 현관에 있었다. 현관문에 기댄채 내 구두를 깔고 앉아 있었다. 거기에 있으면서 아까 내가 이름을 불렀을 때 대답하지 않은이유를 알았다. 붉고 커다란 반점이 미우라의 스웨터를 뒤덮고있었다. 늑골 아래 부분이 찢어지고, 검은 칼자루가 꽂혀 있었다.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 P193
일목요연했다. 내가 욕실에서 정신을 잃은 사이 누가 찔러 죽인 것이다. - P193
현관으로 돌아가서 다시 미우라와 대면했다. 양다리를 팔자 모양으로 쭉 뻗었고 무릎에 양손을 얹은 자세였다. 문에 기댄 상반신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졌고 얼굴도 옆으로 살짝 돌아가 있었다. 눈은 반쯤 감겼고 입은 맥없이 벌어졌다. - P194
미우라를 찔러 죽인 자는 어디로 나갔지? 어쩌면 아직 이 안에 숨어서 내 빈틈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급히 집 안을 뒤졌지만 숨어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화장실, 옷장, 침대 밑, 어디에도없었다. 어제 노리즈키가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중략) 이 방의 상황은 그야말로 노리즈키가 정의한 바로 그 밀실 상태가 아닌가. 현관문은 잠겼고 열쇠는 죽은 미우라에게 있다. - P195
나는 스프레이 세제를 욕실에 돌려놓았다. 그냥 내팽개치고가도 상관없지만, 무의미하게 수사에 혼란을 야기할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장갑을 끼고 와서 한 번도 벗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 P196
베란다에 로프나 사다리 같은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뒤질 시간은 없었다. 의지할 것은 내 몸뚱이뿐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려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 P197
아드레날린이 내 등을 쉼 없이 떠밀었다. 심호흡하고 다음 동작을 취했다. 한 번 성공하자 요령이 붙었다. 높이도 더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사야마 공원에서 겪은쓰라린 경험이 있다. 내려가는 도중에 1층 집에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 P198
베란다에서 내려오는 동안 아무도 도둑이라고 외치지 않은걸 보니 나를 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행운이라고밖에 말할 수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행운이 지속될지 알 수 없다. - P198
3
(전략)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가즈미가 내 양복이 젖은 걸 알아차렸다. "여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미우라가 뭘 어쩐 거야?" "미우라는 죽었어." (중략) "설마...... 당신이 죽인 거야?" "아냐." - P199
"당신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가즈미가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욕실에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겠지." "누구 짓일까?" "모르겠어. 하지만 유괴랑 관계있는 자인 건 틀림없어. 그럴거야." - P200
"큰일났어! 좀전까지 미우라와 내가 커피숍에 있었잖아. 가게직원이 날 기억하면 어떡하지? 아니, 틀림없이 기억할 거야. 그 사실이 경찰에 알려지면 내가 죽였다고 믿을지도 몰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즈미의 말이 맞다. 내 문제에만 신 - P200
"경찰은 날 금방 찾아낼 거야. 여보, 어떡하지? 나 사실 미우라의 집 근처까지 갔었단 말이야.‘ "뭐라고?" "약속을 어겨서 미안해. 걱정돼서 그랬어. 하지만 건물 앞만 서성였지 아무 짓도 안 했어. 결국 약속 장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알리바이도 없어." - P201
가즈미는 내게서 몸을 떼고 양손을 입 앞에 모으고 대시보드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아. 경찰이 아무리 물어도 난 아무 대답 안 할 거야. 당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안심해." "아니야."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러면 안 돼. 내 결백은 내가 직접 증명하고 싶어. 솔직히 말하면 이 일에 당신까지 끌어들인 게 잘못이었어. 반성하고 있어." - P202
"그뿐만이 아냐." 틈을 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을 숨겨봐야 미우라를 죽인 범인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미우라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그 범인에게 용건이 있어." "뭔데?" 가즈미가 물었다. "유괴에는 공범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어." 갑작스레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미우라를 죽인 건 그 공범일지도 몰라." - P203
둘만 있게 되자 극단적으로 말이 줄어들었다. 마음은 통했지만, 위안의 말을 나눈다고 전망이 밝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운전에 집중했다. 도로가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슬슬 퇴근길 정체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경시청으로 가서 수사 1과 구노 경부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 P206
4
경찰의 반응이 생각보다 빠르다. 구노가 나카노 서에 있다는건 미우라의 죽음과 유괴 살인과의 관련성을 급히 재조사하고있다는 방증이었다. 경찰에서 가즈미에게 묻고 싶은 게 뭔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 P207
구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던 남자에게 눈짓을 보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정수리 쪽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뚱뚱한 남자였다. 첫눈에도 형사로 보이는 그는 나카노서 히라타 경부라고 했다. 히라타의 안내로 수사계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사면이 벽인 취조실은 아니었다. 장의자를 마주 놓은 자리에 네 사람이 앉았다. - P208
"오늘 오후 JR 히가시나카노 역 근처 커피숍 ‘쓰구미‘에서 피해자와 만나셨죠?" 가즈미는 순간 내 얼굴을 쳐다봤지만 주저 없이 수긍했다. 그러고는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상당히 빨리 알아내셨네요." - P209
"종업원이 우연찮게 두 분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진술에 따르면 피해자가 함께 온 여성에게 ‘처형‘이라고 여러 번 불렀다고하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바로 스기나미 서로 연락해 가즈미 씨의 특징을 체크했습니다. 그 결과 ‘쓰구미‘에서 목격된 기모노 차림의 여성과 가즈미 씨의 외모가 유사하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본청에서 연락이 왔을 때 마침 구가야마의 댁으로 찾아뵐까하던 참이었습니다." - P209
"별실이라뇨?"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노가 곧바로 되물었다. "왜 격리하는 겁니까?" "격리? 천만에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분 말씀을 따로따로 들으면 두 분을 붙들고 있는 시간도 반으로 줄어드니까요." 궤변이다. 하지만 이러는 것이 경찰의 상투적인 수법일 것이다. 괜히 반발하면 오히려 안 좋은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 P210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구노가 말했다. "사모님은 담화실로 모셨습니다. 취조실처럼 막혀 있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담화실이 어떤 공간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하고 철제의자에 앉았다. - P211
"진술서를 작성해야 하니까 아까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해주시죠." 히라타가 말했다. 구노에게 한 말을 처음부터 되풀이했다. 히라타는 중간 중간이야기를 자르면서 몇 번이나 질문을 던졌다. "욕실에 있었던스프레이 세제 이름이 뭐죠?" 같은 너무나 하잘것없는 질문들뿐이었다. - P212
"이번에는 사소한 부분도 생략하지 말고요." 사소한 부분을 생략한 기억은 없었지만 일일이 불평을 늘어놔봐야 쓸데없을 것 같았다. 요컨대 여기는 경찰서 취조실이고 상대는 경찰이었다. 거스르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 P213
"부인의 진술과 야마쿠라 씨의 진술을 대조해야 하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시간을 벌려는 구실이라 생각했다. 그런 수고를 들일 거면 처음부터 두 사람의 진술을 함께 받았으면 됐을 텐데. 내 말을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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