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0 나는 경찰 앞으로 불려 간다. 경찰은, 술에 취한 내가인사불성 상태로 잠들어 있을 때, 손님들이 소란을 주도한 인물로 나를 지목했단다. 나만 혼자 놔둔 채 돌아간 손님들은 이시간에 주점에 있을 것이다. 나를 까맣게 잊은 채 어디 하나의지할 데 없는 처량한 나는,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아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키린*으로 변신한다.  - P44

13:00 눈을 뜬다. 개운하다. 간단한 요기.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을 참이다. 나는 『톤톨리나, 휴가 중』, 『톤톨리나, 기숙사에서』, 『톤톨리나, 긴 일몰』을 단숨에 읽어 치운다.*

* 작가가 지어낸 가상의 작품들. - P45

16:00 아무래도 손대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나 보다. 어찌된 영문인지 비행체 내부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나는 밖으로 나간다. 아뿔싸, 터빈이 거꾸로 작동하고 있다. 내 탓이다. 부주의로 인해 터빈이 카드뮴과 플루토늄의 분열 에너지를 배출한 게 아니라 거꾸로 그 일대의 하수를 빨아들인 것이다. - P45

16:17 나는 우주 비행선을 방치하기로 결정하고, 구르브가 돌아올 것에 대비해서 메모를 남긴다. ‘구르브, 나로서는(명예롭게) 비행체를 방치할 수밖에 없음. 돌아오거든, 동네 바르에(바르 주인 호아킨 씨나 메르세데스 부인에게) 메시지를 남길 것. - P46

17:23 나는 페로카릴 델라 헤네랄리타트*라는 대중교통을이용해 시내로 나간다. 지구상에 살아 있는 것들(일례로, 양배추에 기생하는 풍뎅이 같은 것들)이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저 홀로 움직이는 것과 달리 사람들은 다양한 교통기관을 이용한다. 교통기관은 편하지만 반대일 경우도 허다하다.

* 카탈루냐 지방 도심 철도 - P46

18:30 나는 밤을 보낼 곳을 찾아 나선다. 어제처럼 난리법석을 떠는 곳은 피할 생각이다. (중략). 내 경험에 따르면, 도시는 꼭 필요한 시간 이상 머무는 것을 권장할 만한 곳이 못 된다. 하늘이 개어 있다. - P47

19:30 나는 호텔을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난 뒤다. 어찌된 영문인지 도시 전체에 빈 방이 없다.  - P47

20:30 나는 다시 한 시간을 더 돌아다닌 끝에 가까스로 호텔 방을 구한다. 팁의 실용성 덕분이다. 욕실을 갖춘 그 방은 전망이 좋아서 대규모 공사 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P47

22:30 나는 파자마로 갈아입는다. 잠시 TV를 시청한다.

22:50 침대에 몸을 눕힌다. 나는 돈 소폰시오 베유도*의 회고록 『알바세테 토지대장과 함께했던 사십 년』을 읽기 시작한다.

*작가가 지어낸 가상의 인물. - P48

나는 기도를 하고 불을 끈다. 구르브, 여전히 연락 없다.

02:27 굉음. 방에 비치된 미니바가 폭발한다.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반시간 동안 바닥에 어지럽게 널린 것들을 치운다.

03:01 비상. 대로 공사로 인해 가스관이 터졌단다. 다급하게 방을 빠져 나온 투숙객들이 비상구로 대피한다. - P49

06:05 나는 이른 시간에 체크아웃을 한다. 노천에서 간밤을보냈다는 손님이 내가 비운 방을 차지한다. 식품업계 영업 사원인 그는, 자기 회사가 뼈 없는 닭 요리를 개발했는데, 뼈 없는 닭이 요리에는 더없이 좋지만 사육을 어떻게 할지 암담하단다. - P49

14일

09:30 나는 부동산 중개소를 찾아간다. 중개인한테 호감을사기 위해 켄트 공작 부부**로 변신한다. 부동산 중개소에는 집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09:50 나는 《올라!》***를 펼친다. 발두이노라는 인물과 파비올라라는 인물의 결혼****에 관한 특집 기사를 싣고 있다. 발행일을 확인하니 오래된 과월호다.

**영국 왕실의 로열패밀리인 에드워드 공작과 그의 부인 캐서린.
*** 에스파냐에서 발행하는 연예 패션 잡지.
**** 벨기에 왕 발두이노 1세와 에스파냐 출신의 파비올라의 세기적인 결혼. - P51

11:25 나는 분양받은 새 아파트로 들어선다. 과히 나쁘지않다. 주방과 욕실을 꾸며야 하는데, 크게 신경 쓸 일이 없다.
나는 요리를 할 줄 모르고, 목욕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결코. - P52

17:58 나는 식탁 세트와 그릇 세트를 구입한다.

18:20 실내복과 커튼을 구입한다.

19:00 청소기, 마이크로 오븐, 증기다리미, 토스터, 프라이팬, 헤어드라이어를 구입한다. - P53

21:30 나는(오늘만큼은) 평소의 독서 목록 대신에 지구인들사이에서 위대한 명성을 향유하고 있는 영국 여작가의 추리소설을 챙겨 침대에 눕는다. 줄거리가 단순하고 고루하다. A라는 인물이 도서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누가, 왜 A를 죽였는지 알아내려고 B라는 인물이 나선다. B는 일련의 허술한 추론을 바탕으로 (공식 3(x2-r)n±0)에 적용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용의자 C를 살인자로 확신한다.(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 P53

04:17 나는 자다가 깨어난다. 다시 잠을 이룰 수 없다. 침대에서 내려와 텅 빈 실내를 서성이고 있다. 옆구리가 허전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

05:40 피로감이 물밀듯이 밀려든다. 나는 나를 옥죄는 어떤 미지수를 떨쳐 내지 못한 채 다시 잠을 청한다. - P54

15일

07:00 (중략). 메르세데스 부인한테 내가 여자를 사귈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내가 여자에 대해 진지한 마음을 갖고 있느냐고, 아니면 잠시 스쳐 가는 애인을 두고 싶은 거냐고 반문한다. 내가 진지하다고 항변하자, 그녀는 그렇다면 구혼자가 넘쳐날 거라고 대답하고는 안뜰을 둘러봐야겠단다.*

*곤혹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사용하는 관용적인 표현. - P55

09:15 (중략). 실망. 아, 구르브가 아니라 안타레스 성좌에 있는 AF 기지의 최고 위원회에서 발송한 메시지다.  - P56

10:40 암호 해독. 우주 조사국에서 루이시토 수아레스*가 왜 루이스 미야**를 선발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당장 답신을 줄 수 없다. 

* 1990년 월드컵 당시 에스파냐 국가대표 축구 팀 감독.
* 전 에스파냐 국가대표 축구선수. - P56

15:00 나는 방법론적인 효과를 구하기 위해서 세 가지 난제를 분류한다. 하나는 생물학적 문제, 다른 하나는 심리적 문제 마지막은 실천적 문제인데, 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 P57

17:05 나는 가판대를 찾는다. 《플레이보이》 달력을 재킷 속에 감추고 부리나케 뛰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 P57

19:00 남자는 어떤 때에 여자한테 존중을 받는가? 남자의 도덕적 품성과 사회적 위치, 옷맵시와 청결한 모습이 여자한테 각인될 때다. 가끔은 폭력을 쓰기도 하는데, 그것은 경우에 따른 선택 사항일 뿐이다.  - P58

20:00 나는 거울 앞에서 여러 인물로 변신해 본다. 여자들은 눈으로 사로잡아야 하며, 그래서 첫인상은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오란테스*로, 비리아투스**로, 아르마니로, 아이젠하워로변신을 거듭한다.

* 에스파냐 출신의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군에 대항해 결사 항전을 벌였던 루시타니아족의 용사이자 지도자. - P58

23:30 엘리세오는 에스파냐를 넘어 유럽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대극장이지만 재정 압박으로 인해 공연의 질적 수준이떨어지고 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오늘만 해도 오케스트라와 합창대가 불참했단다. 체불 임금 탓이다. 그들 대신 엔지니어들로 구성된 투나**가 등장하는데, 그런 탓인지 「보리스 고두노프」***가 기대에 못 미친다.

** 원래는 대학생으로 구성된 에스파냐의 전통적인 악단으로, 고풍스러운의상을 입고서 민요를 연주한다.
*** 모데스트 무소륵스키가 작곡한 4막의 러시아 오페라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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