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원에게 이케우치 씨에 관해 묻자 상대방은 놀란 표정을지었다.
"잠깐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이윽고 점장인 듯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 이케우치 씨는 자리에 없다고 말했다. 의도를 탐색하는 눈치기에 시라이시 씨는 이케우치 씨와의 관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 P136

"오늘은 출근할 예정이었거든요. 그런데 안 오는 거예요. 호텔에 문의했더니 그저께 체크아웃 했다고 하더군요. 무단결근은 고사하고 지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니까 여행지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저희도 걱정이 돼서 말이죠………. 댁에도 연락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검토하는 중이랍니다." - P137

이케우치 씨는 열대의 비밀을 풀기 위해 교토로 간 거예요. 하지만 사실은 저희들 모두 『열대』 안에 있고, 그러니까 이케우치 씨의 실종은 『열대』라는 소설에 포함되는 거예요. 그런 설명을 듣고 납득할 인간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 P137

지하상가의 모형 상점으로 돌아온 시라이시 씨를 보고 삼촌은 놀란 듯했다.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고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38

"왜 그러는 건데."
삼촌은 걱정스레 말했다.
"죄송해요."
"너 없는 사이에 우편물이 왔어." - P138

"교토에 아는 사람이 있어?"
삼촌이 무심코 물은 말에 놀라 시라이시 씨는 소인을 확인했다. 정말 교토에서 부친 것이었다. 봉투를 뜯자 낯익은 검정 노트가 나왔다. - P139

시라이시 씨는 황급히 노트를 폈다.
‘시라이시 다마코 씨께‘
이케우치 씨의 또박또박한 글씨가 공책을 빽빽이 메우고 있었다.
‘잘 지내시는지요. 이케우치입니다.
당신은 『열대』를 탐구하는 학파가 마지막으로 맞이한 동료입니다. 저는 이 만남이 새로운 전개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 확신은 옳았습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이런 수기를 쓸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꼭 이케우치 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P139

신칸센이 도쿄역을 출발한 뒤로도 자기가 자기를 뒤따라가지 못하는 듯한 감각이 한동안 이어졌다. 유라쿠정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그녀가 일하는 건물이 보였다. 그곳 지하상가의 모형 상점에서 또 한 명의 자신이 지금도 상점을 지키고 있을것만 같았다. - P140

사야마 쇼이치를 지요 씨가 뒤쫓았다.
지요 씨를 이케우치 씨가 뒤쫓았다.
그리고 지금 이케우치 씨를 자신이 뒤쫓고 있다.
그나저나 이렇게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기는 처음이었다. - P141

시라이시 씨는 무릎 위에 놓인 이케우치 씨의 노트를 내려다봤다.
교토까지 두 시간 조금 더 걸린다. 그때까지 이 노트를 읽자. - P141

제 3장 보름달의 마녀

시라이시 다마코 씨께

잘 지내시는지요. 이케우치입니다.
당신은 『열대』를 탐구하는 학파가 마지막으로 맞이한 동료입니다. 저는 이 만남이 새로운 전개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 확신은 옳았습니다. 그 만남이 없었다면 이런 수기를 쓸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이 수기는 저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그와 동시에 당신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림 동화의 헨젤과 그레텔은 숲속 깊은 곳에 버려졌을 때미리 떨어뜨려놓은 하얀 자갈을 따라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수기가 당신을 인도할 하얀 자갈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헨젤과 그레텔』과는 달리 자갈은 더더욱 열대의 숲속 깊은 곳으로 당신을 끌어들일 테죠. - P145

호텔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밤이 깊어서 널따란 로비에는사람이 얼마 없었습니다. 프런트에서 수속을 마쳤을 때 직원 한 명이 다가왔습니다.
"이케우치 님, 우미노 지요 님께서 전갈을 남기셨습니다."
전갈.
그 말을 듣고 제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습니다. - P146

"어쩌면 아직 교토에 계실지도 모릅니다. 전에 알던 분을 찾아간다고 하셨거든요."
물론 저는 사야마 쇼이치를 떠올렸습니다.
"혹시 사야마라는 분 아닙니까?"
"죄송하지만 성함까지는…………."
저는 직원에게 고맙다고 하고 객실로 올라갔습니다. - P146

저는 전기스탠드를 켜고 그림엽서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내 『열대』만이 진짜랍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는데도 좀처럼 잠들 마음이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침대에 누워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습니다. - P147

일요일 밤에 도쿄로 돌아간다 치면 꼬박 이틀을 쓸 수 있습니다.
교토로 오기 전에 저는 지금까지 『열대』에 관해 메모해 온 노트 몇 권을 다시 읽고 새 노트에 전부 묶어서 정리했습니다.
인양된 이야기, 학파에서 제기됐던 몇몇 가설, 지요 씨와 당신이 주고받은 대화.
역시 지요 씨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겠죠. - P148

시커먼 산비탈에 떠오르는 오쿠리비는 딴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현세로 돌아왔던 죽은 이들을 보내는 거야." 친구는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오쿠리비, ‘보내는 불‘이라고 하는 거지."
"그럼 무카에비, ‘맞이하는 불‘도 있으려나."
그런 말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 P149

사야마 쇼이치는 어떤 생활을 했을까요.
그는 언어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고 합니다. 지요 씨집을 찾아오게 된 계기도 사본 해독이라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 제 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그늘진 외모가 떠올랐습니다. 『열대』라는 수수께끼 같은 소설을 달랑 한편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는 비극적인 기억이 그런 이미지를 자아냈을 테죠. - P149

‘사야마 쇼이치의 눈으로 바라보자‘
일부러 숲길에서 벗어나 낙엽을 밟으며 나무들 사이로 들어가봤습니다. 주위는 색 바랜 겨울 숲이었습니다만, 과거에 사야마는 이 숲에 ‘열대의 숲‘을 겹쳐 봤을지도 모릅니다. - P150

멍하니 걸어 다니다가 묘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양새는 라면 포장마차처럼 생겼는데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게 꼭 이동식 골동품 상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주인인 듯보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중략)
‘아라비야 책방‘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 P150

그곳은 시라이시 씨가 『열대』를 샀다는 헌책방이었습니다.
기상천외한 이름에 어울리는 색다른 상품들은 주인의 취향이 반영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열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P151

"이런 서점은 처음 봤군요."
"재미있지?"
"재미는 있습니다만......."
"왜 이런 산속에 있나 싶지?" 주인은 말했습니다. "며칠 전까진 시모가모 신사 언저리를 얼쩡거렸다고. 난 늘 신출귀몰을 명심하고 살거든." - P151

"......『열대』라는 책을 찾고 있습니다."
"열대?"
주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책꽂이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런 책은 모르겠는데."
"아는 사람이 이곳에서 샀다고 합니다만."
저는 노트 페이지를 넘기며 시라이시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주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당신이 『열대』를 만난 건 히에이산으로 가는 케이블카 앞에서였죠. - P152

주인은 수염을 긁적이며 저를 쳐다봤습니다. 그냥 가기는 뭐해서 뭐라도 한 권 사려는 마음으로 제가 책꽂이를 물색하고있으니 주인이 "부탁 하나 들어주겠어?"라고 묻는 겁니다. - P152

"가게 봐주면 좋은 거 가르쳐 주지."
"좋은 거라고요?"
"댁이 찾는 책에 관해서 말이야."
"뭔가 아시는 겁니까?"
제가 흥분해서 묻자 주인은 눈을 찡긋했습니다.
"그건 나중에 그럼 부탁하자고." - P153

하여간 묘한 역할을 졸지에 떠맡고 말았습니다.
가게를 그냥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도 마음에 걸렸고 말이죠. 흩날리기 시작한 눈을피해 저는 지붕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 P153

「산월기」 이야기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릉이라는 젊은이가 좌절 끝에 호랑이가 된다는 이야기. 저도학창 시절에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남학생이 이백 엔을 계산대에 놓으며 말했습니다.
"별난 가게네요."
"제 가게가 아닙니다만."
"네?"
"부탁받고 잠깐 봐주는 것뿐입니다." - P154

저는 잡념을 떨쳐내고 포장마차의 책꽂이를 살펴봤습니다.
그때 문득 문고본 한 권이 눈에 띄었습니다.
『천일야화』 중 한 권이었습니다.
『천일야화』에 관해서는 당신과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죠.
지요 씨 아버지가 사야마 쇼이치를 자택으로 부른 것도 『천일야화』 사본을 읽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 P155

저는 「짐꾼과 여자들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 P156

(전략). 남자가 동의하자 여자들은문위에 금색으로 쓴 글자를 가리키며 "저걸 읽어라"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여기까지 읽고 나서 저는 움찔했습니다.
물론 시라이시 씨도 기억하시겠죠.
그건 『열대』의 서두에 쓰여 있던 말이었습니다. - P157

이야기를 해서 목숨을 부지한다는 점에서 화자인 셰에라자드 자신의 처지가 생각납니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샤흐리야르 왕에게 참수될 운명을 계속 면하니까요.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문 위에 새겨진말을 빼면 『열대』와의 연관성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P158

주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따뜻한 캔커피를 건넸습니다.
"이거야 원,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수고했어."
캔커피를 받아든 저는 그제야 몸이 싸늘하게 식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집중해서 책을 읽을 때 저는 종종 제 몸의 존재를 잊어버립니다.  - P159

"사흘쯤 전인가, 여자가 혼자 숲에서 나왔어. 색을입힌 안경을 쓴 세련된 부인이었지.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아는 사람이 『열대』라는 책을 여기서 산 것 같다고. 다시 말해서댁이랑 같은 걸 물은 거야. 희한한 우연이잖아?"
"무슨 말을 하던가요?"
"별 대단한 말은 안 했어. 옛날에 이 근처에 살았다느니, 그책 쓴 사람하고 아는 사이였다느니, 그런 이야기." - P160

"그 사람이 고물상에 간다는 말을 했어. 이치조지에 위치한 ‘호렌도‘라는 곳인데 나도 몇 번 거기서 뭘 산 적이 있지. 거기에 물어보면 어떨까."
주인은 제 노트에 간단한 약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P160

"댁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주인은 말했습니다.
"어디선가 또 만나자고."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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