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쓰가와 씨가 책상 위의 전기스탠드를 켰다. "실은 칼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확신할 수 없겠죠. 도망치려고 하면 내가 살인귀로 표변할지 모르니까요." 그곳은 복도처럼 길쭉한 형태의 기묘한 방이었다. - P130
시라이시 씨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가씨하고 한번 차분히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늙은이가 젊은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다거나 그런 하잘것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당신은 분명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내가 하고 싶은 건 『열대』 이야기랍니다." - P131
‘신조 군도 참 난감한 친구죠. 『열대』의 수수께끼를 자기가풀었다고 생각해요. 그 또한 『열대』가 만들어 내는 마술 세계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불굴의 탐정 정신이 안 좋게 작용한 셈이에요. 저래서는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들 테죠." 시라이시 씨는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생각했다. - P131
그녀는 나카쓰가와 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거래할까요." "어떤 거래죠?" "실은 저 『열대』를 입수했거든요." 그녀는 가방에서 가짜 『열대』를 꺼내 보였다. - P131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요? 아무튼 여기 『열대』가 있어요. 저를 무사히 보내주면 이건 당신한테 드릴게요." - P132
"하지만 난 가짜에는 관심 없어요. 아가씨." "이건 가짜가 아닌데요." "아니,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는 이미 입수했으니까요." 나카쓰가와 씨는 유유히 커피를 마셨다. 이 노인은 허풍을떠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열대』를 손에 넣었나. "핵심은 무풍대에 있어요. 아가씨." - P132
"우리는 이 공백 지대에서 이야기의 줄기를 놓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학파는 존재해야 할 유일한 이야기를 발견하려고 이야기 체계를 세우는 데 부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일한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잘못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고로는 이 가공할 책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어요. 지요 씨가 남긴 말을 생각해 봐요." - P132
"다시 말해 『열대』는 우리한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거죠 모두 진짜인 동시에 모두 이본異本인 겁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열대』는 마술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 P133
"우리는 제각각 『열대』를 만납니다." 나카쓰가와 씨는 말했다. "그리고 책장을 넘겨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이윽고 이야기는 각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마치 사막을 흐르는 강이가지를 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 그 물줄기들은 어디로 이어질까요. 마술적 정신으로 생각하면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어째서 우리는 『열대』의 결말을 모를까요. 어째서 『열대』는 사라졌을까요?" 나카쓰가와 씨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 P133
"왜 우리가 『열대』를 끝까지 읽을 수 없었는가 하면 현실과의 경계가 되는 결말이 『열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시 말해 무슨 뜻인가. 우리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날 당신이 책을 펴 읽기 시작한 이야기는 그대로 이 방으로 이어집니다. 알겠어요?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읽고 있습니다. 이 『열대』라는 세계의 책장을 넘기는 중인 겁니다." - P134
"만약 우리가 『열대』 안에 있는 거라면." 시라이시 씨는 중얼거렸다.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죠?"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하지만 『열대』는 이야기잖아요." "아닙니다. 아가씨." 나카쓰가와 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게 그녀가 기억하는 나카쓰가와 씨의 마지막 말이었다. - P135
그녀는 무거운 발을 끌며 달리기 시작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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