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현지 시각) 별 문제 없이 지구에 착륙하다.

상용 추진력(확대): 유지
착륙속도(억제): 상용 추진력 지수 6.3
착륙 순간 속도: Bajo-U1 4, Molina-Calvo9
엔진 용적: AZ-0.3
착륙 지점 지표: 632 (IIB) 28476394783639473937492749
착륙 지점 지명 : 사르다뇰라* - P7

07:15 구르브가 4번 출구를 통해서 비행체를 벗어난다. 가벼운 남풍, 섭씨 15도, 상대습도 56퍼센트, 해상의 물결이 잔잔하다. - P8

07:21 구르브가 원주민과 첫 접촉을 가졌단다. 구르브가 보내온 데이터에 따르면, 그 지구인의 신장은 170센티미터, 두개골 크기는 57센티미터, 눈은 두 개, 꼬리 길이는 0.00센티미터(꼬리 없음.)이다. (중략). 소리 자체의 개념도 거의 없는 편이다. 구르브가 만난 지구인의 이름은 유크 푸익 이 로익이다.(내가 잘못 들었거나 불완전한 이름일 수도 있다.) - P8

* 1966년 마드리드에서 출생한 여가수. 그룹으로 데뷔해 1993년에 앨범「여자(Mujer)」를 발표하면서 솔로로 전향했다. 미모와 열정적인 퍼포먼스로유명세를 탔으며, 지금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발표하면서 ‘에스파냐의 마돈나‘ 혹은 ‘팝의 여왕‘으로 불린다. - P8

07:23 구르브, 연락 없다.
08:00 구르브, 연락 없다.
09:00 구르브, 연락 없다.
12:30 구르브, 연락 없다.
20:30 구르브, 연락 없다. - P9

10일

07:00 구르브, 연락 없다. 나는 구르브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먼저 나는 우주선이 원주민들의 눈에 띄는 불상사를 막기위해 비행체를 지상의 주거 형태로 변형한다. 카탈로그에 의하면, 반(半) 독립형 주거지라고 명명된 주거지에는 침실 세 개와욕실 두 개에다 난방 장치가 설치된 주택 그리고 공동 수영장,
마당 두 곳, 주차장 등 최상의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 P10

07:45 나는 개성 강한 자들의 밀집도가 높은 지역에서 본래의 내 모습으로 변신할 참이다. 이 또한 지구인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방도이다. 나는 해치 대신(변형된 해치는 구조가 단순한 반면, 조작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육중한 사각형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 P11

08:01 나는 노선버스에 이어 오펠 코르사에 치인다.
08:02 오펠 코르사에 이어 배달용 승합차에 치인다. - P11

08:00 (중략) 내가 지켜본 지구인들은 체격이 다양하다. 그들 중에는 키가 아주 작은 자들도 많은데, 키가 더 큰 자들이 그들을 조그만 차에 태우고 다니지 않으면, 그들은 키가 아주 큰 자들한테 밟히는(그리하여 이성을 잃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키가 큰 자들 중에서 200센티미터를 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지구인들의 키가 서 있을 때와 누워 있을 때가 정확하게 똑같다는 사실이다.  - P12

08:00 (중략) 지구인들은 걸을 때 뒤쪽에서앞쪽으로 이동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양팔을 끈질기게 흔들어양다리의 움직임을 이끌어내야 한다. 성깔이 급한 자들이 가죽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방 혹은 다른 행성의 물질로 제작한, 샘소나이트라는 가방으로 팔뚝의 힘을 강화하는 것도그런 이유이다. - P12

11:00 구르브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지 세 시간이 지나가고있다. 부질없는 짓이다. 늦은 시간인데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효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나는 구르브가 이 시간에 내 눈에 띄지 않고 지나갈 가능성을 나름대로 어림해 본다. 대략 73 대 1의 확률이 나온다. - P13

12:00 그리스도의 현신을 기리는 기도 시간이다. 나는 그시간에 구르브가 내 앞을 지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기도에 들어간다.

13:00 무려 다섯 시간을 뻣뻣한 자세로 서 있다 보니 내 몸이 서서히 지쳐 가고 있다. 근육이 마비된다. 나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힘을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중략) - P13

13:00 (중략) 보아하니 지구인들은 그들이 호흡하다라고 하는 행위,
즉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기능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여타의 문명적인 것들이 거부되는, 이른바 과학적인것들만 받아들여지는 지구에서 이러한 자동 기능은 숨을 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신체의 다른 기능들, 예를 들어 혈액순환이나 음식물의 소화 혹은 눈을 깜빡이거나(이것은 언급한두 가지 기능과 달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조절되며, 윙크라고 불린다.) 손톱이 저절로 자라는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P14

14:00 드디어 내 몸이 물리적 한계점에 봉착한다. 나는 왼다리를 뒤쪽으로, 오른 다리를 앞으로 꺾은 채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자세 탓일까. 지나가던 어떤 여자가 무엇인가를 건네준다. 5 페세타짜리 동전이다. 나는 행인들이 불손하다고 비난할까 봐서 동전을 꿀꺽 삼킨다. 섭씨 20도, 상대습도 64퍼센트, 가벼운 남풍, 해상의 물결이 잔잔하다. - P14

14:30 (전략) 비로소 구르브의 위치를 알아내는 일이 예상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우려가 고개를 든다.

15:00 나는 한곳만 지키겠다는 생각을 단념한다. 차라리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찾는 게 나을 성싶다. 그런다고 구르브를 못 만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겠지만, 결과가 어떤 식으로든 불투명하니 어쩔 수 없다. - P16

15:02 이번에는 카탈루냐 전력 회사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15:03 이번에는 바르셀로나 상수도국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15:04 이번에는 국립 전화국 쪽으로 파헤쳐진 도랑에 빠진다. - P16

15:06 나는 청사진 지도가 안내하는 경로를 무시하고 발길닿는 대로 걷기 시작한다.

19:00 마냥 걷고 있다. 네 시간째다. 어디가 어디인지 도통모르겠다. 슬슬 힘에 부친다.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다. 도시가 광대하다. 인파가 끊임없이 밀려든다. 소음이 엄청나다. 필라르 수녀를 기리는 기념탑 같은, 거대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건물이나 상징적인 조형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 P17

20:30 일몰 이후에 가로등만 켜지 않아도 이 도시의 환경은한결 나을 것이다. 시민들은 밤에도 거리가 필요하나 보다. 그들 대부분은 투박하게 생겼는데, 심지어 추악하게 생겼는데,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를 못 보면 살아갈 수 없는 모양이다. 차량들도 눈에 쌍불을 켜며 저희끼리 으르렁거린다. - P18

21:45 내 몸에서 방전된 에너지를 재충전한다.

21:50 나는 파자마를 입는다. 구르브의 부재, 마음이 몹시무겁다. 구르브와 나는 팔백 년 전부터 밤마다 함께 지낸 사이다. 잠이 들 때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해진다. - P18

21:50 (중략) 구르브한테 우주선 관리도 맡겼고, 우주선 출입도(정해진 시간 내에서) 허용하지 않았던가. 구르브가 오늘 중으로 돌아올 것인지,
늦게라도 돌아와 줄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못 오면 못 온다고통보라도 해 주면 더없이 좋으련만.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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