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거 삼각대 하나는 짱짱한 거 들고 다니는구먼." 인터뷰를 녹화하려고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던 나에게 풍정사계 이한상 대표가 건넨 말이었다. (중략) 그걸 알아보는 이 대표의 한마디에서 ‘아, 이 분이예전에 사진관을 하셨지‘라고 새삼 떠올리게 된다. - P121
그 누룩과 함께 완성된 술이 바로, 2017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방한 당시 청와대 만찬주로 쓰였던 약주, 풍정사계 춘이다. - P122
입속에서 춘은 조금 복잡한 원을 만든다. 달콤함으로 시작해 새콤함이 일어나다가 난데없이 구수함이 노크를 해온다. 끝에 남는 것은 아주가벼운, 싫지 않은 쓴맛, 그리고 그 쓴맛은 다시 달콤함으로 꼬리를 문다. 네 가지 색깔의 색상환, 사태극(四太極)이라고나 할까. - P122
수제 맥주의 향을 다양한 홉이 살려주듯, 누룩에 들어가는 곡물과 여기에 올라타는 미생물의 종류를 다양화하는 게 우리술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23
"우리술이 1960년대 이후 감미료를 많이 쓰면서 달아졌다고들 하는데, 풍정사계의 단맛은 설탕이 들어오기 이전의 단맛이거든요. 저는 이것이 우리술 본바탕에 있는 맛이라고 생각해요. 밥을 오래 씹으면 나오는, 그런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단맛이야 말로 우리술이 가지고 있는 경쟁력이자 매력입니다" - P123
"유럽 술 중에 강화(化)와인이라는 게 있잖아요. 말하자면 이 과하주가 우리 조상들이 마시던 강화와인인 셈이에요. 약주를 만드는 과정에소주를 첨가해서 알코올 도수를 높입니다. 그러면 여름 동안에도 술이 상하지 않아요. 여름을 나면서 계속 곁에 두고 마실 수 있는 술이 되는 거죠" - P124
"춘이 ‘스르륵‘하고 넘어갔다면 이 하는 마지막에 ‘찌릿‘하고 넘어가는 맛이 있네요. 펀치감이 달라요." 질감뿐만 아니라 향에 있어서도, 춘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느낌이었다면 하는 마지막에 살짝 모아주는 견고함이 느껴진다. - P124
"20도가 넘어가면 일반증류주에 속하게 돼서 가격을 더 높게 받아야 하거든요. 약주의 세율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과하주의 특성을 살릴 수있는 도수를 고민하다 보니 18도가 된 것인데, 원래 우리 조상들이 드시던 과하주의 도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높았어요. 이 부분은 저도 아쉽습니다." - P125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온다. 오곡이 익어서 추수를 기다리는 계절에 어울리는 술. 곡식의 향이 가장 잘 살아 있는 탁주, 풍정사계 추를 마셔볼 차례다. 잔을 좀 더 넓적한 것으로 바꿨다. 술 속의 건더기가 살아 있는탁주의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혀끝에 올려놓고 굴리는 것보다 한입 크게 베어 물어 입안을 넉넉히 채워주는 편이 좋다. - P125
탁주에서 이 정도의 상쾌함이라니. ‘밥으로 만든 과일‘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듯했다. "제가 추구하는 맛은 복숭아같이 물 많은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나는 맛이에요. 잘 익은 딸기나 사과를 먹을 때 입안에 과즙이 고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싶었어요." - P126
.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었다. 우리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쌀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원하는 술의 질감에 따라 더러는 밥을 짓기도 하고, 더러는 죽을 만들기도 하며, 더러는 떡을 안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쌀이 누룩을 잘 품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우리술의 출발점이다. - P126
가을 단풍이 지면 서리가 내리고, 처마에는 고드름이 매달린다. 투명한 고드름을 연상시키는, 42도짜리 소주 풍정사계 동을 맛볼 차례다. 최근 이 대표는 제2양조장을 열었다. 여기서는 당분간 소주만 생산할 예정이다. - P127
한 해의 살림살이가 겨울을 맞아 완결을 맺듯, 춘하추동으로 이어지는 시리즈의 정점에 위치하면서 앞의 세 술이 지니는 가치를 하나로 꿰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바로 소주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한국 식당을 하시는 분이 전통 소주를 매장에 내놓고 싶다며 저희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제가 미리 말씀을 드렸죠. ‘저는 누룩으로 술을 빚고 우리 소주에서는 누룩 향이 많이 납니다‘라고요. 저도 막연히 외국 분들은 누룩 냄새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그 분이 ‘술에서 누룩 냄새가 나지 않으면 그게 어디 우리나라 술인가요?‘라고 말씀해 주셔서 너무 큰 힘이 됐어요." - P127
전통주 중에서는 그래도 과하주까지 포함하는 양조주와 증류주의 짜임새 있는 라인업을 갖췄고, 청와대 만찬주에 선정되면서 충북 청주를 대표하는 술로 알려지게 됐지만, 이한상 대표는 여전히 힘겹게 보릿고개를 넘는 중이다. - P128
(중략), 이한상 대표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자기 누룩 하나에 10년을 쏟아부었던 충청도 사람의 고집이 묻어있었다. 그 고집에선 여러 번 덧술을 하고, 고리에 넣고 끓여도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잘 마른 향온곡의 냄새가 났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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