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이 어린 시절을 보낸 두 곳은 극단적으로 달랐다. 샹소르는 번잡한곳에서 멀리 떨어진 농지와 가족이 있는 곳이었고, 맨해튼은 임차인과 낮선 이들로 가득 찬 콘크리트 정글이었다.  - P69

. 오히려 마이어 가족과의 만남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비비안에게서 아버지의 부모님과 부유한 알마 고모의 사랑과 지원을받을 기회를 완전히 빼앗아버렸다. 비비안이 학교에 들어갔다거나 친구를사귈 기회가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P69

사랑하는 엄마

뉴욕으로 돌아온 마리는 칼이 곧 가석방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버니에 있는 교정국에 편지를 보내 칼에게 가석방될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편지를 씀으로써 또다시 분란을 일으켰다. - P70

. 마리가 칼의 보호자로 결정된 뒤부터 작성한 편지와 문서에는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인 우울증 환자가 거듭 등장한다. 마리는 자신을 마리 바일이라고 불렀고, 자신의 적법성을 재확인하려는 듯이 이름 이니셜을 필기도구에 새겨넣었다. - P70

 비비안처럼 독서를 좋아했던 칼은 감화원에 있을 때 어머니가 죽고 수녀원에 맡겨진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헤쳐나가는 성장 소설(허비 앨런HerveyAllen 의 장편 소설 『앤서니 애드버스Anthony Adverse』)을 진지하게 읽었다. 이제 칼은 남는 시간 대부분을 할머니 마리아나 동료 음악가들과 보냈다. - P71

1938년이 끝나갈 무렵, 마리의 이성은 다시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핀토 감독관에게는 칼에 관해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그러면서도 콕사키 감화원 관리자들에게 편지를 써 아들을 변호했고, 교도관들이 아들을 난폭하게 대하고 피가 날 때까지 때렸다고 주장했다. - P72

1939년 봄이 되면 마리가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핀토 감독관에게 보낸 편집중적인 편지에서 마리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전남편이 아이를 낳았으며(그렇지 않았다. 그때 찰스의 새 아내는 마흔여섯 살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라고 했다. 마리는자신이 끔찍할 정도로 지쳤고, 심장이 쿵쿵대고, 더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했다. - P72

현대의 연구자들이 마리가 작성한 1940년 인구조사 기록이 완전히 거짓임을 밝히는 데는 몇 년이 필요했다. 마리의 인구조사 기록에는 네 가족이 다시 합쳐 64번가에서 함께 살았다고 되어 있다. 칼은 동생보다도 어린 나이로 기록이 되어 있어서, 비비안의 유산 관리자들은 칼의 생일과 출생지를 찾는 데 엄청난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 P73

1930년대에는 할머니 외제니의 기록을 빼면 비비안에 대한 언급이 어디에도 없다. 마치 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 모두가 비비안을 없는 사람취급한 것 같다. 편지에도, 할아버지 윌리엄의 부고에도, 의붓아들로 칼의 이름이 적혀 있는 아버지의 새 아내 베르타 마이어의 적국 시민 기록에도 비비안의 이름은 없다. - P74

하지만 비비안이 오빠에게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오빠가 동생에게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처음 체포되었을 때 칼은 여동생의 이름조차 모르는 척 했다. - P74

이 시기에 기록된 모든 자료는 가족사를 연대순으로 알 수 있게 해줄 뿐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성격, 다른 가족과의 관계, 각자의 결점을 보여주는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문제가 많았던 가족 중에서도 마리의 상태는 특히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했고 심란했다. - P74

성격장애를 진단하고 치료하며, 부모의 정신 질환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도나 마호니 Donna Mahoney 박사는마리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조소 가족과 마이어 가족의 기록을 살펴보았고,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지고 거부된 경험이 정체성 문제를 야기하여 유전적으로 정신 질환에 취약할 수밖에 없던 마리에게 훨씬 더 복잡한 문제를 초래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냈다. (비비안에게 정신 질환 가족력은 분명히 있었다. 칼 마이어의 훗날 의료 기록을 보면 생물학적 요인으로 인한 조현병이라는 진단 결과가 적혀 있다.) - P74

자기애성 행동은 자아감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그 방어기제로 등장해 심각한 상태를 촉발한다. 관련 주제를 강연하는 자리에서 마호니 박사는 "우울증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으로, 관심을 끌기위해 신체 건강과 관계가 있는 외부 수단을 이용해 내면을 검증받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마리의 행동에 대한 평가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함의는,
그 진단이 무엇이든 그녀의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사실에 있다. - P75

마침내 흩어지다

 비비안이 열네 살이었을 때, 외제니의 친구인 프랑스인 가정교사 에밀리 오마르Emilie Haugmard가 64번가 아파트로 이사 왔다. 아마도 비비안을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외제니는 자신의 유언장에 비비안의 후견인은 마리가 아니라 오마르임을 분명하게 명시했다. - P75

비비안은 키가 크고 말랐고 날카로웠지만, 비비안의 보호자는 땅딸막했고 통통했고 푸근했다. 자신을 찍은 대부분의 사진에서와 달리 비비안은 신뢰하는 친구 옆에서는자신의 몸을 조금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 P76

 비비안은 외제니의 오랜 친구인 베르트린든버거Berthe Lindenberger 의 집으로 들어갔다. 퀸즈에 살고 있던 린든버거는 얼마 전에 남편을 떠나보냈다. 두 여자는 그때부터 8년을 함께 지낸 것같다.
베르트는 자신의 어린 동반자를 위해 보험을 들고, 공동 저축계좌를 열어 1200달러를 예치했다. 비비안은 퀸즈 우체국에 사서함 번호를 개설하고 뉴욕을 떠날 때까지 사용했다. - P76

독립한 칼은 라이브 밴드에서 연주를 하고 라디오에서 공연을 하며 자력으로 살아갔다. 그 당시 음악계는 마리화나가 유행했고, 칼도 빠른 속도로 마리화나에 중독됐다. - P78

칼이 맨 처음 배치된 곳은 뉴욕 야팽크에 위치한 업튼 기지였는데, 그곳에서 군악대에 들어가지 못한 칼은 다시 버지니아주에 있는 랭글리 필드로전출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공군 416 포병중대 칼 W. 마이어 이등병의삶은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칼의 상관들은 칼이 조용하고 우울하다는 사실은 눈치챘지만, 휴가를나갈 때마다 마약을 가져와 엄청난 양을 쌓아놓고 피운다는 사실은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 P79

청문회에서 의무부대 대위는 마이어 이등병이 군대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화물을 받는다. 대위는 "마약 문제는 그저 마약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도덕을 유괴 문제이기도 하다"라는 말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 P79

1942년 8월, 칼은 불명예제대를 했고 향후 퇴역군인을 위한 그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 벌은 훗날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마약에 중독된 스물두 살의 청년은 맨해튼으로 돌아와 외제니가 빌린 34번가의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 P81

2차 세계 대전은 비비안 가족에게는 가족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가혹한 시간으로 이어졌다. 1947년에는 살아 있는 동안 늘 칼의 편에 섰던 할머니 마리아 마이어가 여든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P81

1948년 5월, 외제니는 칼을유언장 집행인으로 지정한 유언장에 서명했고, 마리는 그해 8월에 다시한번 일자리를 찾는 줄 광고를 냈다. 같은 달에 쉰여덟 살이었던 베르트린든버거도 난생처음으로 사회보장 번호를 신청했다.  - P82

이 모든 일은 불행 중에서도 가장 큰 불행을 맞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그해 10월에 사랑스러운 외제니가 예순일곱 살의 나이로 고용주의 집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 P82

외제니의 마지막 유언장과 유서를 보면 마리는 어퍼 웨스트사이드 하숙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 하숙집은 부유한 담배업계 집안의 사람과결혼했지만 가난하게 죽은 릴리언 듀크Lillian Duke가 살던 곳이기도 했다.
1만 달러에 달하는 외제니의 재산은 마리와 칼과 비비안에게 똑같이 분배됐다. - P82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외제니는 비비안의 후견인을 어머니인 마리가 아니라 에밀리 오마르로 정했다. 유언 집행자로 명시된 칼 마이어는 엉뚱하게도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윌리엄 조소, 일명 찰스 마이어 a/k/a Charles Maier‘
라고 적었다. - P83

4
초기 작품: 프랑스

샹소르에서 찍은 내 걸작들을 자주 봐요.
─비비안이 스승 아메데 시몽에게 보낸 편지 - P85

1950년 4월에 비비안은 보르가르 농지를 팔기 위해 배를 예약해 프랑스로 갔다. 샹소르에 도착하고 얼마 안돼 비비안은 아주 작은 박스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40년 동안이어질 사진 촬영 경력이 시작된 것이다.  - P85

. 그 같은 사실이 사진에 대한 초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 모르지만, 비비안은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과거를 빼앗긴 사람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게 되는 것 같다."
처음부터 비비안은 부지런히 사진 기술을 익혔고, 마을에서 사진관을운영하는 아메데 시몽 Amédée Simon 과 존경 어린 우정을 발전시켜나갔다. - P85

샹소르에서 지내던 쌀쌀한 이른 봄날, 비비안은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사진을 남겼다. 사진 속 비비안은 모직 코트, 메리제인 신발, 목까지 단추를 채우는 블라우스, 무릎 밑까지 늘어진 치마, 두툼한 스타킹 등, 그 지역의 보수적인 색채를 여실히 보여주는 옷을 입고 자세를 취하고 있다. - P86

비비안이 엄청난 에너지와 호기심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빠른 속도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미국을 떠나 있는 동안 비비안은 사실상 샹소르에 있는모든 마을을 방문했고, 멀리 떨어진 프랑스 도시들과 이탈리아, 스페인의도시들을 돌아다녔다. 비비안은 좀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 P86

파노라마

프랑스에서 찍은 초기 사진들은 비비안이 정말로 아꼈던 사진들일 것이다. 비비안이 인화한 사진 가운데 절반가량이 이때 찍은 것으로, 비비안은죽을 때까지 이 사진들을 간직했다. 시카고에서 비비안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들을 크게 확대해 액자에 넣었는데, 이때 찍은 사진들은 오랫동안비비안이 방에 전시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했다. - P87

중요한 사건들

비비안의 어머니 역시 기념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리는 자신의 생일인 5월 11일에 결혼을 했고, 아들의 세례식도 같은 날짜에 치렀다. 어른이 된 뒤로 비비안은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부터 길거리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된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만난 사람들이 경험한 중요한 사건들과 그들이 이룩한 업적들을 충실하게 사진에 담았다. - P87

. 비비안은 특히 죽음과 관계있는 의식과 활동에 관심이 있었다. 장례 행렬을 쫓아가면서 그 의식만큼이나 애도자들의 반응을 진지하게 포착했고, 삽으로 흙을 뜨는 행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무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았다. - P89

세례식 사진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쳐서 갓난아기가 내지르는 울음소리가 주변 석조 벽에 부딪혀내는 메아리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다. (중략) 고개를 푹 숙인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이가 곧 묻힐 묘지로 향하는마을 사람들의 행렬에서는 세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의 장례식을 치러야하는 이들의 중압감과 침통함이 느껴진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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