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니 방이 엉망이었다. 로봇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희를 찾는 메시지 또한 하나도 처리되지 않고그대로 쌓여 있었다. 처음 온 메시지는 심해도시를 중심부 기준수심 100미터까지 하강시킨 후 다음 단계 점검을 시작하겠다는것이었다. - P15
유희는 방에서 나와 로봇을 찾았다. 숙소는 처음 명상에 들어갔을 때보다 더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로봇이 한 짓이었다. - P15
유희는 회사 AI에게 시설물 균열 사실을 확인했다고 알렸다. 인간 책임자로서 따로 조치할 일은 없었다. - P15
"이 친구 점검한 거죠? 이름이 있던가요?" 회사 AI에게 물었다. ‘사로‘라고 했다. 다시 물었다. "사로, 기능은 정상이에요? 할 일을 하나도 안 한 것 같은데." AI가 대답했다. - P16
"수다스러운 로봇이었구나. 왜 꺼버렸는지 알겠다." "그래? 아무 말도 안 걸길래 어색해서 먼저 말해봤어. 아까 그애송이 인공지능이 한 이야기 말인데, ‘사로는 원래 기능이 거의없습니다.‘ 틀렸어. 나는 기능도 있고 임무도 있어. 들으면 깜짝놀랄걸" - P16
"나 걸을 수 있는데." "느리잖아." "존엄하게 두 발로 걸어가고 싶다고." "걸음걸이가 존엄해 보이지 않았어." "다리 늘어나거든." "걸어 다니는 오징어처럼 보일 텐데." - P17
심해저 같은 어둠 속에서 유희가 말했다. 마사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싸우는 로봇이야?" 마사로가 한참 만에 되물었다. "네가 한 말이야?" "그럼, 나 말고 또 누가 있어?" - P18
"그런 일 하는 회사들, 파괴를 실적으로 환산해서 돈 벌잖아. 살상은 몇 포인트, 기물 파괴는 몇 포인트 하는 식으로 나는 파괴도 생산 못 해. 무질서 정도나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건 온 우주가 다 하는 일이니까 생색낼 건 아니지." - P18
읽다가 덮어둔 책을 다시 열 듯, 방금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물음이었다. "그럼 어떻게 세상을 구한다는 거야? 할 줄 아는 게 뭐야? 창작로봇이야?" "그런 어마어마한 생산 활동을 하라고? 나더러?" - P19
"무슨 소비자?" "뭐든.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제자리에 갖다놓는 로봇이야. 수요곡선의 수호자지. 공급곡선에는 참여하지 않아. 펑펑 쓰고원 없이 써, 사람이 만든 건 뭐든지 살 수 있어. 그러라고 만든 시험용 로봇이야. 성공한 시험용 로봇. 멋지지?" - P19
마사로는 연구소에서 제작되었다. 공장이 아니었다. 대량생산된 완제품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진 시제품이었다. - P20
그 무렵 인공지능은 인류에게 재앙이었다. 인류가 직면한 수많은 위기 중 하나이기는 했지만, 피부에 와 닿기로는 온난화나 해수면 상승보다 심각했다. - P20
기계들은 일을 잘했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만들어내고 아무대가도 받아가지 않았다. 아예 퇴근을 안 했다. - P20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이 곧 취미마저 잃고 만 것이었다.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 활동도 의미가 없어졌다. - P21
사람들 사이에서는 골판지학이라는 학문이 유행했지만, 그 분야 최고 논문을 인공지능이 썼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5일 만에 골판지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논문 900편이 제출되었다. 보통 사람은 그걸 다 읽는 데만도 50일은 걸렸을 테니, 누가 쓴 논문인지는 따져보나 마나였다. - P21
"왜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급 사이드 인공지능이하는 거랑 똑같은 일을 소비 사이드에서 하겠다는 아이디어인가?" "그렇지! 과잉생산을 상쇄하는 과잉소비." - P21
"그게 당신들의 비극이지." "너는 여기 창고에 잠들어 있었고." "그건 내 비극이고, 그리고 보니 나 비극 좋아하는데. 그래도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 유희는 시계 쪽을 바라보았다. 시계가 동작을 감지하고 불빛을 밝혔다. 마사로가 안광이냐고 물었던 빛이었다. - P22
유희는 마사로 쪽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나머지 서른아홉은 어떻게 된 거야?" - P23
"그럼! 인간은 단순하니까. 그런데 이거 사실 모자 같은 거야. 안쪽은 텅텅 비어 있으니까. 마술사처럼 뭘 숨겨놔도 좋을 것같은데 스스로 머리 뚜껑을 여는 건 섬찟해서..." 마사로가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수다를 떨었다. 머리 위쪽이재빨리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 P24
공급 사이드의 잉여금이 세금이나기부금의 형태로 환수되면 소비 로봇이 등장해 이 자금을 다시시장으로 흘려보낸다. 생산자는 결코 실직한 노동자에게 직접돈을 나눠주지 않을 것이므로 그런 구상이었다. - P24
마사로의 목소리가 쨍해졌다. "아, 진심으로 소비해야 하는 거였구나. 공급 사이드 로봇들이 진짜 제대로 생산하는 것처럼. 시장 기제를 활용해야 공공기관이 예산 쓰기도 편하고." - P25
감정은 배합이었다. 어떻게 맛을 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이국적인 음식도 누군가는 간단한 향신료의 배합으로 풀이할수 있듯, 감정 또한 몇 가지 기본 감정의 섬세한 배합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 P26
아무튼 이 연구가 지옥 훈련이 된 까닭은, 주재료가 될 기본감정 중 맨 먼저 태어난 것이 공포인 탓이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소장님은 양질의 기본 감정을 뽑아내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었다. - P26
마음이나 자의식이 생겨나기전에도 로봇의 내면은 늘 경고음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어떤 금기는 아무 경고음도 내지 않고 그냥 단순히 동작을 멈춰버리기도 했다. 내면을 거치지 않은 반사신경이었다. - P26
"그래서 마흔 대가 다 공포 체험에 투입됐어." 마사로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유희는 그 말투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실험은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소비 로봇들은귀신이 나온다는 온갖 장소를 다니며 공포를 소비했다. - P27
유희는 무서운 장소에 관한 마사로의 이야기를 듣다가 깜빡잠이 들었다. 악몽이었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 P27
모범생으로 자라 온 유희에게 지각은 상상만으로도 공포를일으켰다. 늘 두려웠으므로 실제로 지각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 P28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문을 나섰다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마사로를 옆구리에 꼈다. "아, 내 존엄." 마사로가 버둥거렸다. 사무실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희는 얼른 작업 현황을살폈다. 로봇 열한 대가 한 지점에 모여 있었다. 심해도시 맨 아랫부분, 껍데기 바깥 바다 쪽이었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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