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1 칸제이, 패거리 그리고 노동
사물과 달리 외적으로 감지해 낼 수 없는 체험으로서의 에류티즘
(전략) 인간의 행위도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렇게한다면 인간의 행동들은 곤충의 행동이 아니듯이 인간의 행동일 수도 없다. 물론 인간은 일단 동물이다. 인간은 인간의 반응들을 동물의 반응들에 대해 연구하듯 연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171
기존 관념은 인간의 짐승 같은 부분을 감추려하고 침묵시키며 우리의 의식 속에 그것의 합법적인 자리를 갖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겉보기에는 동물의 행위와 달라 보이지 않아도, 구분해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71
인간은 비록 일시적일 망정 어느 정도 절대적 목적성을 지닌다. 양도 불가능의어떤 절대적 목적성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죽이는 일도, 먹는 일도 못 하게 한다. 인간을 죽이는 일이나, 드물게는 먹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냥 지나쳐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 P172
오늘날 세상에서 사물로의 환원이 가능한 것은 동물뿐이다. 인간은 동물을 아무런 제한 없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으며, 동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인간이 근본적으로는 그가 죽이는 동물과 크게 다르지않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 P172
정신은 주체적이고 내밀한 진리이며 사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그것뿐이다. 정신은 불경스러운 육체에 머물지만 신성한 것이다. 그리고 육체는 죽음이라는 통과 제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정신이 지니는 신성을 획득할수 없다. - P175
정신의 반대편에서 들끓는 성적 과잉은 우리 안에 들어앉아 있는 집요한 동물적 삶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육체의 편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성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물처럼 고찰할 수 있는 대상이다. - P173
한마디로 성은 한쪽 발이 사물이듯이 사물이다. (엄격히 말해서 손은 인간적인 것이며, 눈은 정신적 삶의 상징이지만, 성기와 다리 등은 아주 동물적인 것이 아니던가.) 게다가 흥분이 극에 달하면 우리는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했다고 생각하지 않던가. - P173
어떤 것들은 내용에 겉모습을 부여하는, 즉 내용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물을 통해 접근하기만 하면 파악이 어렵지 않다. 반면 어떤 뚜렷한 외적인 결과들과 결부시킬 수 없는, 그래서 오직 내부로부터 인지될 뿐인 것들이 있다면, 어찌 그에 대해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을까?¹
1) 내가 나에 대해서 명백하게 말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나를 마치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의 개별적현실로 간주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에게 개별적인 모습을 부여해 사물로 대할때만 나는 그들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 P173
현상들은 그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내적으로 관찰된 것들이다. 그것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은 사실이지만 응답자들의 고백이나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결과들에 대한 검증, 특히 사람들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결과들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검증은 체계적이긴 하지만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 P174
인간의 성행위가 그들의 방대한 조사 덕분에 이제 거의 우리의 사정권 안에 들어온 듯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그들이 보여 준 엄청난 노력은 성행위에 관한 현상들이 그들의 기계적 작업이 행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결코 사물이 아니었음을 반증해 준다. 보고서가 나타나기 전까지 성생활이 뚜렷한 사물의 특성을 지니려면 가장 천박한 수준으로 타락해야 했다. - P174
지적 활동은 결국 하나의 통로이다. 그런데 그것은 원하던 결과 너머로 기대 이상의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 P174
즉 의식은 사물의 내용들을 가능한 한 외적인 관찰을 통해 파악하려고 하지만, 외적인 관찰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때는 내적인 관찰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때가 있다. - P175
성행위에 대한 외적 관찰을 반대하는 나의 입장은 관례 때문만은 아니다. 성의 어떤 전염성이 관찰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 P175
그러나 어쨌든 성행위 또는 성행위를 예고하는 것, 말하자면 설령 거의 눈에 비치지 않을 정도의 약간의 동요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약간 흐트러진 옷일 수도 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 금방 참여하게 한다.(육체의 아름다움은 망가진 옷매무새조차 게임을 의미하게 만든다.) 그러한 혼란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체계적인 또는 과학적인 관찰을 배제한다. - P175
바로 그런 점에서 웃음이나 흥분(하품을 포함하여)은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돌이나 나뭇조각에 참여할 수는 없다. - P175
레비브륄이 원시인이라고 부른 사람은 돌과 함께할 수도 있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의 돌은 원시인 앞에서 사물이 아니었다. 원시인이 보기에는 돌도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였다. 레비브륄은 그러한 사고방식이 오직 원시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잘못 보았다. - P176
오늘날 너무 흔해빠져서 식육(肉)의 차원으로 타락해 버린 성행위에 시의 특권을 부여하는 듯해서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사실을 말하자면 시도 오늘날에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저질을 원하며스캔들을 지향한다. 그리고 성적 현상을 놓고볼때 더욱이상한 것은육체는 사물의 비속성을 예고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로 동물성 때문에 시적이거나 신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 P176
그리고 성적 현상을 놓고 볼 때 더욱 이상한 것은육체는 사물의 비속성을 예고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로 동물성 때문에 시적이거나 신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사용한 방법의 기이성과 폭넓음은 대상을 대상으로(객관적 고찰 대상으로) 대할 수 없음을밝히는 동시에 기실 육체가 시적이고 신적인 것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 P176
그것은 바로 보고서들이 도표나 곡선 너머로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사물과는 대립적인) 어떤 내적인 요소이다. 그 내적 요소는 결코 빈도수, 행위방식, 나이, 직업 그리고 계급 등의 외적인 관찰만으로는 파악이 안 되는 것이다. - P176
우리는 솔직히 그 책이 성생활을 주제로 다룬 책인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사람 수, 키, 몸무게, 나이 또는 눈의 색깔 등에 관한 연구가 인간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의미하는 것은 그러한 개념 너머에 있다. 그러한 것들이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지의 사실들에 비본질적인 다른 사실들을 첨가시키고 있을 뿐이다.³
3) 신체인류학의 기초 자료라 해도 그것들이 의미를 가지려면 기지의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 때 또는인간을 동물군 안에서 파악하게 할 수 있을 때이다. - P177
예를 들어, 어떤 도표를 보면 열 번째 칸에 미국 국민에게 있어서 오르가슴의 원천이라는 제목이 있으며, 자위, 성희, 혼인 관계 또는 혼외 관계, 수간, 동성연애 등등의 어휘에 숫자가 덧붙여 있는데, 만약 그러한 내용을 읽고 우리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면 그 웃음은 그것이 보여 주는 불가능에 가까운 몰상식 때문이다. - P177
그러나 적어도 그 불행은 성행위가 역할을 하는 그러나 끄집어내는 순간 진실이 박탈되는 심층을 지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구자들 자신도 그들이 보고하는 성적 현상이 얼마나 깊은 곳에 묻혀있는지를 모르지는 않았으면서도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방향과 취약성은 그들이 방법(관찰을 하는 대신 피관찰자의 이야기에 의존하는 방법)에 예외를 둘 때보다 분명히 드러나는 때가 없다. - P178
관찰과 관찰 대상의 모순, 사물에 유효한 방법과 언제나 불편할 수밖에 없는 내밀성의 모순은 우리를 웃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만든다. 성인에 대한 관찰은 더한 난관이 기다린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경우만을 가지고 우선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그 앞에 있으면 우리를 무장 해제시키는 한없는 해맑음은 시계의작동을 무색하게 하지 않는가. 연구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명백히 드러난다. - P178
우리의 의식과 관계하는 동시에 사물의 객관성과 관계하는노동은 성적 충동을 억제한다충동을 억제하지 않고 사는 집단은 패거리일 뿐
(전략) 다만 보고서에나타난 자료들을 나름대로 분석해 나가면서 내가 제기한 문제를 밝혀볼 생각이다. - P179
갤럽연구소의 방법을 생각나게 하는 그들의 보고서는 한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우리는 방대한 자료의 집적과 엄청난 노고에 대해 치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보고서의 자료를 낳게 한 이론적 개념은 찬사를받을 수 없다.) - P179
최초의 보고서에 나타나는 일련의 아주 흥미로운숫자는 오르가슴의 주당 빈도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이, 사회적 부류에 따라 변하긴 하지만, 오르가슴의 빈도수는 전체적으로 7회에 못 미치며, 7회 이상은 높은 빈도수(높은 비율)라고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유인원의 오르가슴 빈도수는 하루에 한 번이라고 한다. - P179
그러나 정상적인 유인원의 오르가슴 빈도수는 하루에 한 번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주장하기를 정상적인 남자의 빈도수도, 만약 종교적 제약만 없다면, 다자란 원숭이의 그것에 못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 P179
신교도들 중 독실한 사람들은 7.4퍼센트,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11.7퍼센트가 주당 7차례 또는 그 이상의 빈도수를 나타냈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독실한 사람들은 8.1퍼센트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20.5퍼센트가 주당 7차례 이상이었다. - P180
왜냐하면 종교적 의무감은 명백히 성행위에 제동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평하고 지칠 줄 모르는 관찰자들 앞에 있다. 그들은 그들의 원칙에 알맞은 자료를 작성해 내는 일에 만족하지 않는다. - P180
노동은 노동자를 하나의 수단이 되게 한다. 인간에게만 있는인간의 고유한 노동은 동물성과 유일하고도 분명하게 대립한다. 그러나 숫자와 통계를 중시하는 이 보고서는 전적으로 내적인 그래서 사물화가 불가능한 성은 배제한 채 사물화가 가능한 노동과 노동자의 세계만을 떼어 내 관찰하고 있다. - P180
처음에 말했듯이 인간과 사물의 근본적 대립은 동물과 사물의 동일시를 내포하지 않고는 언급 자체가 불가능했다. 한편에 외부 세계, 다시 말해 동물을 포함한 사물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 내적인 인간의 세계, 다시 말해 (주체적) 정신의 세계가 있다. - P181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 사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동물은 사물일 수 없다. 다만 인간이 그렇게 취급할 뿐이다. 동물들은 노동의 대상(사육) 또는 노동의 도구 (짐바리, 또는 수레용)로서의 사물이다. 동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유용한 활용의 범주에 들어가면서 사물로 환원된다. - P181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부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채 때를 기다려 머리를 쳐드는 집요한 인간의 동물성, 즉 성적 충동도 우리에게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그것을 무시하고 살 수 있을 때에만 사물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동물성을 부정해 보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 P181
인간이 소나 돼지의 노동력, 도구 또는 사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안에서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성의 내부에는 (동물성의반대 의미에서) 동물로도 사물로도 환원시킬 수 없는 요소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결코 종속될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 - P182
인간의 시간 안에서 노동하는 반 동물적인 인간성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물화시키는부분이며, 반면 동물성은 우리 안에서 자신을 위한 주체적 실존의 가치를 지켜 내는 부분이다. 이 말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동물성‘, 즉 성적 충일은 우리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물이 되지 않게 하는 어떤 것이다. - P182
성적 충일과의 대립으로서의 노동, 사물에 대한 의식의 조건
킨제이의 보고서 중 숫자로 나타난 자료들은 이러한 나의 일차적 원칙에 아주 정확하게 답하고 있다. 노동은 하지 않은 채 온통 ‘인간성‘ 부정의 행위만을 일삼는 패거리만이 49.4퍼센트라는 높은 빈도수를 보여 준다. - P182
세부적인 지표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전체적으로 수치는 인간화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사람들이 인간화된 만큼 성적 충일은 줄어든다. 상세하게 옮겨보면, 인부들은 15.4퍼센트라는 높은 빈도수를 나타낸 반면, 노동공은16.1퍼센트, 숙련공은 12.1퍼센트, 하급 ‘화이트 칼라‘는 10.7퍼센트, 고급 화이트 칼라는 8.9퍼센트의 빈도수를 나타냈다. - P183
고급 ‘화이트 칼라‘로부터 지도 계급에 해당하는 중역으로 넘어가면 수치는 세 단위 이상 건너뛰어 12.4퍼센트에 이른다. 이 수치들이 얻어진 조건을 생각하면 소수점 이하는 무시할 수 있는 수치이다. 인부로부터 고급 ‘화이트칼라‘에 이르기까지의 감소는 아주 일정한 반면, 고급 화이트칼라와 중역 간에는 오히려3.5퍼센트 증가하는데 이 수치는 실질적으로는 약 30퍼센트가 증가한것이다. - P183
그러므로 그 계급은 명백히 노동 계급보다는 더한 성적 충동 속에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계급은 다른 계급보다 인간화되었지만 그렇게 보상받는 것이다. - P183
지배 계급의 예외는 더욱 명백한 다른 의미를 지닌다. 동물성의 신성한 측면과 인간성의 비굴한 측면을 지적하면서도 나는 한 가지 사실은 유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83
그러한 현상은 어떤 사회 계층에서나 확인할 수 있지만 특히 지배 계급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하다. 사실 사물로의 환원은 상대적 의미밖에 없다. 사물로 존재한다는것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물건, 동물, 사람은 사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그것들은 어떤 한 사람의 사물이다. - P184
원칙적으로 마지막에 남는 그 몫은 인간성을 사물로의 환원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사람, 자기 안의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지도 계급에게로 돌아간다. 대개 최종 단계의 지도 계급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성 에너지가 측량 가능하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사실 그 계급은 그것을 원칙적으로 패거리에 필적할 만큼 활용했다.⁵ - P184
비교적 지수는 낮지만그래도 그것은 상류층의 정력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 P184
사실을 말하자면 성생활에 소비된 에너지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는 사정 횟수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적 유회가 요구하는 에너지의 소모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의 오르가슴에 약10초 정도의 시간을 소비하는 유인원의 에너지 소모량과 성희를 즐기면서 수시간을 보내는 인간에게 있어서의 에너지 소모량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성희를 지속시키는 기법은 계급 간에 불균등하게 나타난다. - P185
내가 상류 사회 남자들의 성적 유희를 비호하려는 의도로 이러는것은 아니다. 나의 고찰은 다만 위에 설명된 자료의 전체적인 의미를파악하고, 내적 생명의 충동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기 위한 고찰일뿐이다. - P185
그런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성적 충일은 우리를 의식에서 멀어지게한다. 그것은 우리의 분별력을 약화시킨다. - P185
인간이 노동과 의식으로 정의되는 한 인간은 성적 충동을 조절해야 하며 때로는 그것을 무시하기도하고 저주하기도 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외면은 인간을 대상에 대한 의식으로부터는 아니더라도 자아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었다. - P186
동시에 그러한 외면은 세상에 대한 외면, 자아에 대한 무지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만약 노동 덕분에 인간의 의식이 깨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아직도 동물의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을것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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