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비슷한 것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금 유희는 아무도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기쁨의 정체는 무엇일까. - P9
종교가 아니라면 영감이 떠오른 걸까? 유희는 성령이내린 순간 복음사가들이 느꼈다던 전율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받은 것은 성령이 아니라 영감일지도 모른다. - P9
유희도 살면서 대여섯 번은 그런 영감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유희는 아무 문제도 고민하고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감정은 그렇게 실용적인 것이 아니었다. - P10
유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깨달음의순간은 일상에 금방 침식되고 휘발된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선 일상을 차단해야 했다.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직업이라는 역할에 너무 깊이 몰입하지 않도록 한 발 물러서야 했다. - P10
유희는 깨달음이 휘발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휴가를 냈다. 책임감 강한 자신의 의식이 행정 절차라는 인위적인 의지에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건성으로 유희 자신이 현장 실사 책임자였으므로 휴가를 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 P11
로봇이 열아홉 대인 것은, 스무대부터 한층 까다로운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또 명목상 팀장은 유희였지만 실제로 현장을 지휘하는 것은 회사 AI었다. 팀장이 굳이 인간인 이유는, 나중에 일이 잘못됐을 때 법적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로봇은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 P12
‘로봇이 필요해. 성능이 좀 떨어지더라도가사 로봇이나 비서로봇이 필요했다. 연락을 대신 받아주고, 누가 찾아왔을 때 지금은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해주도록 기억을 떠올렸다. - P12
자재 창고 문을 열자 조명이 저절로 켜졌다. 문 맞은편 선반앞에 유희가 찾던 로봇이 앉아 있었다. 원통 모양으로 길쭉한머리는 광택이 나는 밝은 파란색이었고, 그 아래에 짧은 몸통이있었다. - P13
고개를 숙여야 보일 만큼 낮은 곳에 달려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서 유희는 생각했다. ‘선반을 바라보다가 동작이 멈췄어. 선반에 놓여 있던 게 아니라.‘ 전원이 켜졌다. 로봇이 두 발로 일어났다가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뜻의 그림을 얼굴 위치에 띄우고는 선 채로 다시 꺼졌다. - P13
1층 로봇 격납고 충전 위치에 로봇을 세우자 회사 AI가 로봇 상태를 점검할지물었다. 유희는 그러라고 대답한 다음, 휴가를 내고 쉴 예정이니 로봇이 깨어나면 자기 방으로 와서 시중을 들게 하라고 덧붙였다. - P13
휴가는 이틀이었다. 하루 반 동안 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명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식이 또렷해졌다고는 하지만 유희의 입장에서는 잡념이 낀 것에 가까웠다. 뭔가 먹어야겠다는 사소한 의지였다. - P14
원 없이 들여다보고는 있었지만, ‘그 감각‘은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겠지만, 원래 그렇게 되는게 맞았다. - P14
‘깨달음을 얻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유희에게는 아직 페이지가 많이 남아 있었다. 삶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었다. 최종회 다음에도 삶은 계속 이어지는 법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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