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번째 바퀴 함부르크로
좁은 이마에 우울해 보이는 주름을 새기고, 충혈된 탁한 눈으로 원망스러운 듯이 이쪽을 노려보는 남자 같은 도시, 골격은 탄탄하지만, 키에 비해 어깨 폭이 너무 넓어 팔근육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다. 아니, 이건 좀 지나친가 당신은 린츠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 P102
빈에서 출발한 야간열차는 열시 반이 넘어야 이곳에 도착하고, 당신은 그때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죽여야 한다. 시간을 죽인다는 말은 얼마나 끔찍한 표현인가. 마치 시간이 파리라도 되는 것 같다. 시간파리라는 종류의 파리가 있다. 타임 플라이스 라이크언 애로Time flies likean arrow.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쏜살같이 이 문장을 컴퓨터 번역기에 돌리면, ‘시간파리들은 화살을 좋아한다‘는 번역문이 나온다는 얘기를 어제 막 읽은 참이었다. - P103
선로처럼 배후에 궤적을 남긴다. 달팽이는 전철의 일종일까. 머리에 안테나 두 개가 뻗어 있어 멀리 있는 누군가와 통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P103
. 지난주에 댄스 워크숍에 왔던 참가자 중 한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식물원이에요. 춤추고 싶어하는사람이 식물처럼 움직임 없는 것에 끌리는 게 이상할진 모르지만, 전늘 뭔가를 생각할 때면 식물원을 찾아요." 당신은 식물 같은 데 흥미를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왠지 식물원에 가보고 싶어졌다. - P103
식물의 움직임에 비한다면 달팽이는특급열차 급이 아닐까. 느린 동작은 체력을 많이 소모해서 쉽게 지친다. 해바라기처럼 한 시간 동안 고개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라고 한다면 큰일이다. 해바라기는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고도 피곤하지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왠지 무작정 식물원으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 P104
식물에게는 양성구유가 보통인 것이다. 당신은 문득 자기 마음속에도 여자와 남자가 다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란은 홀연히 피었다가 꽃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홀연히 떨어져버릴 것 같다. 수국은 아무리 햇살이 내리쬐어도 비 내리는 날의 기억을 살갗에 머금고 촉촉이 피어 있다. - P104
어느새 오솔길 양옆으로 떡갈나무가 서 있었다. 당신은 떡갈나무라면 질색한다. 소위 알레르기가 있어 가까이 가면 재채기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황급히 발길을 돌린다. 떡갈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는 축축하고 어둡다. 공기 중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입자가 떠다녀서 그것이콧속 점막을 찌른다. - P105
온실로 들어선 순간, 온몸에 꿀을 들쓴 것 같았다. 팔에 닿자 끈적끈적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콧속 점막도 축축해져서 편안했다. 그래, 이대로 내 몸이 녹아드는 대로 두고 녹아들면 되는 거야, 하고 생각했다. - P105
아직 저녁에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오후 후반이다. 시간을 때우는게 상당히 힘든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미술관에 가자. "그 전람회는 봐두는 게 좋을 거야"라는 목소리가 아직 귓가 어딘가에 남아 있으니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런 전람회는 좀처럼 보기 힘들어. 최근에는 미술도 메인스트리트뿐이니까." 누구의 목소리더라. 역시 워크숍에 왔던 사람이다. 이미 이름도 잊어버렸다. - P106
그러나 밤이 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당신에게는 밝은 태양 따윈 그저 우울할 뿐이다. 저토록 밝으면 밤은 아직 멀다. 그러나 현대회화로 장식한 미술관에는 낮에도 밤이 있다. 그래서 홀로 찾는다. 아아 그건 그렇고 이 얼마나 희한한 그림인가, 마치 초점이 어긋난 흑백사진 같고, 늦은 밤에 열차 창가에서 플래시 없이 찍은 역 사진 같기도하다. - P106
크기는 밤기차 창과 같다. 이제 곧 야간열차를 타야 해서 모든 그림을 야간열차와 연결짓게 되는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걸까. 물어보고 싶지만 주위에는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오직 혼자 언제까지고 이 훌륭한 건물 내부를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 P107
미술관에서 나오자 당신은 갈 곳이 없다. 도서관도 식물원도 동물원도 다 닫았으니 술집에 갈 수밖에 없을까. 당신은 술집에 가고픈 마음은 없었다. - P107
어딘지 모르게 빛깔이 으스스한 날 도나우 강변을 따라 산책이라도 할까. 강변길도 불쾌할지 모른다. 작년에 왔을 때, 바짝 깎은 머리에 하켄크로이츠* 문신을 한 무리가저다리 밑에 떼지어 있지 않았던가. 가고 싶지 않다.
* 나치의 상징으로 쓴 갈고리 십자형의 휘장 - P108
우연하게도 열차 이야기로, 같은 객실에 마주앉은 초로의 숙녀와 젊은여성이 친해져 식당차에서 같이 차를 마시기도 했는데, 초로의 여성이도중에 모습을 감춰버린다. 걱정이 된 젊은 여성은 차량의 맨 앞부터뒤까지 찾으며 돌아다니지만 끝내 찾을 수 없다. 게다가 이상하게도같은 객실의 다른 사람들도 식당차의 보이도 그런 여성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주장한다. - P108
영화가 끝나자 노면전차를 타고 역으로 가기에 딱 좋은 시간이 되었다. 플랫폼은 어둡고, 역무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행선지 표시판만고독하게 함부르크 - 알토나행‘이라는 표시를 밝히고 있었다. - P109
4인실이었고, 나머지 세 침대는 이미 구릉처럼 이불이 봉긋이 솟아 있었다. 당신은오른편 위쪽 침대였다. 살며시 사다리에 발을 얹고 위로 올라간다. 그순간 당신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짙은 꽃향기를 들이마셨고, 어쩔어찔해져서 하마터면 사다리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 P109
기겁하며 도움을 요청하듯 침대 테두리를 움켜잡고 바로아래 침대를 들여다본다. 그러자 거기에는 수국 꽃이 누워 있다. 말도안 돼. 승무원에게 말해서 내 눈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자. 아니지, 노이로제라면서 이상한 수면제를 먹이면 곤란하다. 그럴 바엔 나만의 비밀로 덮어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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