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번째 바퀴
하바롭스크로

호수치고는 너무 크다. 일본 혼슈 지역 면적과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혼슈보다 클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물에는 바닷물에서만 사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한다. 요컨대 옛날에는 그곳이 바다였다는 말일 수도 있다. - P75

이 호수 근처에 이르쿠츠크라는 도시가 있다. 당신은 그곳에서 묵었다. 낮에는 도시를 산책했다. - P75

당신은 그 도시에서 더 동쪽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이제 모스크바가 상상도 못할 만큼 멀어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사흘만 더 타고 가면 이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 닿는다. - P76

이게 꿈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화장실에 가고 싶은 인간과 잠이 깨버린 인간과 일어나기 싫은 인간을 다 더해도 결국은 단 한사람이다. 자신이 혼자라고 이토록 절절히 느껴지는 순간은 없다. 설령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동행을 깨워서 화장실에 갈 수는 없다. 인간은 화장실에 갈 때는 늘 혼자다. - P76

눈을 감은 채 더듬더듬 볼일을 보고 곧바로 침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화장실 문 손잡이에 손을 얹고 힘을 꽉 주며 밀었다.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반대편으로 움직였고, 그 바람에 당신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발바닥이 바닥에서 붕떴다. 커다란 암흑이 입을 쫙 벌리며 당신을 집어삼켰고, 순식간에 음량이 열 배로 높아진 선로와 기차 바퀴의 마찰음이 파도처럼 엄습해왔다. - P77

나는 지금 열차에서 떨어진 것이다. 시베리아 한복판의 초원에 혼자 누워 어둠 속에서얼어가는 것이다. 내일까지 열차가 지나가지 않을 게 뻔하다. 설령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해도, 내가 여기 누워 있는 것을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두툼한 트레이닝복을 잠옷 대신 입었는데도, 벌써부터 냉기가 목 언저리로 비집고 들었다.  - P77

그렇게 생각하고 당신은 걸음을 내디뎠다. 바람은 없었지만, 걷기 시작하자 앞에서 맞부딪쳐오는 공기 저항이 얼음벽으로 변했다. (중략)
그래도 계속 걸어가자 몸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공도 조금은 어둠에 익숙해졌을 즈음, 굵직한 나무 다섯 그루가 오른쪽앞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 P78

천만다행이라 생각한 순간, 당신은 아주 잠깐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오열도 마치 딸꾹질이나 재채기처럼 우스꽝스럽게 지나가버렸다. 감동에 젖어들 여유가 없었다. - P78

당신이 러시아어 단어를 늘어놓으며 손짓발짓으로 야간열차에서 떨어졌다고 설명하자, 이해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턱짓을 했다. - P79

남자는 사모바르*에서 뜨거운물을 졸졸 받아 홍차를 넣고, 거대한 설탕단지와 함께 당신 앞에 내려놓았다. 죽을 다 먹은 당신은 후유 한숨을 내쉬고 홍차를 마셨다. 어느새 추위가 어떤 감각인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러시아 전래의 특유한 주전자 - P79

당신은 이르쿠츠크를 가리키며 "어제 난 여기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조금 동쪽으로 옮기고 열차를 탔는데, 화장실에 가야 해서 화장실 문을 열었죠. 그랬는데" 하면서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떨어진다는 동사를 몰라서 움직이던 손가락을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 탁자 테두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흉내를 냈다. 남자는 웃으며 당신의 어깨를 두드렸고, ‘내 집처럼 편히 생각하세요‘라는 듯한 말을 건넸다. 적어도 당신에게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 P80

이미 열차에서 떨어졌으니 더이상 떨어질 리 없건만 지금부터 정말로 떨어져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를 다 마시자, 남자는 당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따라오라고 했다.
부엌 찬장 뒤쪽으로 돌아서자, 커다란 통이 놓여 있고 뜨거워 보이는 물에서는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 P80

통주위에는 낡은 모피가 깔려 있었다. 곰의 털가죽이었다. 자기 손으로 사냥해서 잡았을까.
찬찬히 보니 얼굴도 붙어 있다. 곰의 얼굴은 누군가의 얼굴과 아주 비슷했다.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아 불안해졌다.  - P81

 몸을 정갈하게 한다고 뭐가 변하겠느냐고 생각해본들 아무 소용도 없는 지금 당신은 자기가 평소에 어떤 순서로 어떻게 몸을 씻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물에 희미하게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저건 여자의 얼굴일까 남자의 얼굴일까 생각해본다. 어느 쪽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느 쪽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젖어 있어서 분명치 않다. - P82

물은 식어가기는커녕 오히려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육수가 되어버린다. 통 밑에 아궁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전에 먹은 새콤달콤한 사과 무스가 장 속에서 발효되기 시작해, 하반신이 왠지 모르게 불안정해졌다. - P82

당신은 눈을 번쩍 떴다. 어두운 천장이 눈 바로 위에 있다. 차체가덜컹덜컹 흔들리는 소리, 선로와 기차 바퀴의 마찰음. 화장실에 가고싶다. 시계를 보니 새벽두시 반이었다. 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 성가셔도 일어나서 갈 수밖에 없겠지. - P83

여덟번째 바퀴

빈으로

아주 최근의 일이다. 당신은 빈에서 있는 공연에, 비행기를 타지 않고 야간열차로 가기로 했다. 당신은 몇몇 댄스 페스티벌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후로 초청이 잇달았고, 교통비는 늘 상대방이 부담해서 이제 더이상 조금이라도 싸게 가는 방법을 고심할 필요가 없었다. - P84

함부르크에서 워크숍을 끝내고 다음날 야간열차로 빈으로 이동한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의욕이 샘솟았다. 요즘에는 재미있는 사람을 별로 못 만났다. 재미있는 사건도 접하지 못했다. 돈 걱정이 사라져 최단거리를 택하게 된 탓이 아닐까.  - P84

당신은 무거운 트렁크를 질질 끌며 게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객실에 트렁크를 들여놓았다. 그리고 복도에 서서 창으로 플랫폼을 내다보았다. 역 뒤편에 새로들어선 호텔의 레스토랑이 보인다. 레스토랑 벽은 투명한 유리로 만든데다 조명이 밝아서 실내가 또렷이 보였다. - P85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혼자 올라탔다. 대기실에서 나온 승무원은 젊은 여성이었다. 그 여성이 막 차에 오른 여성의 얼굴을 보고 놀라며 "어머나" 하고 소리쳤다. 두 사람은 복도에서 길음을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재미있는 일이 시작될 게 틀림없다. - P85

당신 머릿속에서 염가판 시나리오 서너 개가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죠. 최근에 이 열차를 타셨나요?"
"아뇨, 야간열차는 오늘이 처음이에요. 하지만 저도 당신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요. - P85

그때 또 한 사람 다른 승객이 올라타서, 승무원은 일단 그쪽으로 가버렸다.
발차 시간이 되자 그녀가 잰걸음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기억났어요."
검은 드레스 여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지금 막 생각났어요."
그러더니 두 사람은 소리를 맞춰 키득키득 웃었다. 당신은 따돌림을당한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았지만, 그렇다고 가르쳐달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 P86

다음날 아침 아홉시, 당신은 시무룩하게 아침을 먹었다. ‘희망하는항목에 표시해주세요. 세 가지까지는 무료, 그 이상은 한 가지당 추가요금 1 마르크 50페니히를 받습니다‘라고 어젯밤에 건네받은 주문서에쓰여 있어서, 빵 두개, 버터, 치즈, 커피에 표시를 했다. - P86

 역시 버터와 치즈 혹은 버터와 잼이 필요하다. 그것만 택하고, 빵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난센스다. 아무래도 네 가지가 되고만다. 네번째는 사치가 아니라 필연인데, 왜 추가요금을 받아서 욕심부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할까, 그 정도 금액은 아예 처음부터 요금에포함시키면 좋을텐데. 아니, 어쩌면 사람은 일단 지갑을 열면 그 이상으로 이것저것 사고 싶어지기 마련이니, 그것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 P87

아아, 한심하긴 야간열차 아침식사에 제아무리 사치를 한들 낭비까지도 안 되니, 아침식사 가격에관한 생각은 이제 그만 집어치우자. - P87

 하노버 역에서 열차가 멈춰 차에서 내리는 몇몇 사람들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객실 문이 열리더니 여자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아침이 된 후에 침대차에 타다니 이상하다. 아마도 함부르크행 보통열차에 타려다 잘못 알고 급히 올라탔겠시. 흐트러진 시트를보면 누구나 금방 자기 실수를 알아챌 텐데, 그 이자는 망설임 없이 벡씨 맞은편의 구깃구깃한 시트 위에 자리를 잡고, 창밖 상황을 열심히살폈다. - P88

"누구에게?"
"저를 죽이려는 남자가 있어요."
벡 씨는 곤란해지고 말았다. 혹시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일어나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건 망상일 뿐이라고 여기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 뭔가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다.  - P89

문이 섬뜩해 보인다.
금방이라도 노크 소리가 들릴 것 같다. 그것은 전염성 공포였다. 무슨수를 써서든 자기를 죽이려고 결심한 사람이 있다. 설득하려 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리 도망쳐도 따라온다. 문을 닫고 집안에 숨으면, 자기가 나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문밖에서 기다린다. 길을걸어도 어느 모퉁이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다. - P89

여자의 손을 잡고 둘이서 달리는 열차 창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이렇게 두려워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심정을 처음으로 이해할 것 같았다. - P90

 언뜻 보기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여자의 겉모습에 백 씨는 휘말려버렸지만, 막상 여자의평범하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고 보니 불안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평범하고, 상대는 평범하지 않다는 마음이 갑자기 든 것이다. 그것은 이 여자의 불안이지 나의 불안이 아니다. 이 여자가 살해당할 거라는 말은망상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 - P90

. 그러나 발견한 것을 지그시 바라보다보면, 머지않아 불안이 그 자리에 깃들면서 자기 안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야간열차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눈에 흡혈귀임을 알아챌 수 있는 상대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다.  - P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