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으로 가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당신 열차는 저겁니다"라며 거대한 쇳덩어리를 가리켰다. 하얀 증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른다. 그는 어떻게 당신이 탈 열차를 알았을까. - P65

검은 재가 날벌레처럼 공중을 떠다녀서 기침이 나오고 눈물도 번졌다.
통로 유리창은 얼음벽 같아서 그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춥다. 당신은새우등을 하고 객실로 들어갔다. 쉰 살쯤 되는 아름다운 러시아 여성이 뺨을 붉게 물들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 P65

 무슨 얘기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남자 쪽이 "그렇지만, 마리"라고 하는 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두 사람이 당신의 객실 문앞에 나타났다. "여기야"라고 말한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당신은 너무 놀라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 P65

열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파스텔 색조로 칠한 통나무집이 눈밭 속에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자작나무는 눈범벅이 되기 전에 스스로 하얀 껍질을 덮어써버렸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 P66

복도에서 스쳐가는 순간, 켄이 눈짓을 보냈다. 당신은 시선을 피했다. 멋대로 공범자취급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마리가 호텔에서 폭탄에 날아갔다는 뉴스를 듣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만, 객실 문은 거의 다 닫혀 있고, 조그만 들창도 안쪽에서 커튼이 쳐져 있다. - P66

잠은 밋밋하고 얕았다. 당신은 잠의 시야의 테두리가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 P66

위쪽 침대의 켄과 마리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다. 당신은 꾸물꾸물 굼뜨게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세면실에서는 흔들리는 열차를 따라 수도관이나 변기 뚜껑, 거울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 P67

 당신은 자기 방에서 남이 멋대로 밀회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것처럼 살짝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나가도 딱히 갈 곳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마리 옆에 앉으며, "이름이 마리 씨라고 했던가요?"라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 P67

이대로 푹 빠져서 갈 수밖에 없다. 당신은 우선 배낭에서 문고본을 한 권 꺼내들고, 단어를 하나하나 확인하듯 읽기 시작했다. 줄줄 읽으면 금세 다 읽어버린다. 그러면 그후에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곤란해지겠지. 마리와 켄은 이따금 속삭이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 P68

마리는 잠시 뺨을 부풀렸지만,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딱히 말을 받아치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서두르는 편이 좋겠군, 찻집 주인은 젊은 아가씨가 아니면 싫어할 테고,
너도 이미 그리 젊진 않으니까 청춘의 아름다움은 다리가 없어도 쏜살같이 도망친다고들 하잖아"라고 켄이 말하자, 이번에는 마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난 결혼 같은 건 안 해" 하고 말했다. - P69

여기에서는 모든 바다가 멀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직 바다를 못 본 사람도있겠지. 사샤는 좌석 밑에 밀어넣어둔 보스턴백에서 보드카 병을 꺼내작은 컵에 따르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유리컵은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한 잔을 더 따르는데 양이 너무 많아 흘러넘쳤다. 자고로 욕심에는 - P70

사샤는 별다른 말 없이 이따금 당신에게저민 생선을 건네며 보드카를 마실 뿐이었지만 그런데도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차츰 안구 언저리가 안쪽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에따라 열차의 진동이 커졌고, 그런데도 밖에 혼자 내동댕이쳐졌다기보다는 공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취해버렸는지도 모른다. - P70

 켄이 몸을 구부려 당신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있잖아요, 그 그림엽서 얘기는 마리에게 하지 마세요. 그건 조라는 나쁜 녀석에게 속아넘어갈뻔한 그녀를 구해내기 위한 트릭이었으니까. 그때 마리는 사랑에 눈이멀어 내 충고도 이상하게 오해만 할 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리가 신뢰하는 마이크의 이름을 빌린 겁니다." 만약 이 말이거짓이라면 상당히 잘 꾸며냈다는 생각에, 당신은 칼날을 더욱 벼리며
"그리고 당신은 마리 씨에게 푹 빠진 거죠"라고 몰아쳤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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