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산 대화면 TV는 아직 다른 가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해 거만한 태도의 전학생, 그것도 도심에서 시골로 온 학생 같은 위화감을 자아냈다. - P9
화면에 비친 점수판에는 0이 줄지어있었다. 8회초 마운드에 오른, 현역 최고 연봉을 자랑하는 에이스는 아주 당당해 보였다. - P10
등을 보이며 달려가는 건 막 수비수로 들어온 선수였다. 몸집은 크지 않지만, 끈질긴 커트와 선구안으로 높은 타율을 자랑하며 올 시즌 팀의 원동력으로 활약했다. 다만 지나치게 독단적으로 지휘하는 감독에게 반발한 탓에 주전에서 제외될 때가 많았다. - P10
관객 모두가 숨을 삼키는 짧은 침묵 후, 중견수가 쳐든 왼손 글러브에 흰색 공이 보였다. 관객석에서 장내 분위기를 뒤집는 환성이 솟아올랐다. - P11
중고등학교의 추억은 사춘기 특유의 창피한 일화가 많아서인지 좋든 나쁘든 실체를 띠고 있다. - P11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는 동안 성적은 뽐낼 수준이 못 되게 뒤처졌고 운동도 고만고만한 수준이 되어 생활이 점점 처량해졌으니 초등학교 시절이 제일 나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 P12
담임 구루메(경칭 없이 이름으로 부르는 데서 내가 그 담임 교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차리기 바라는 마음이다) 마지막 두 문제를 늘 어렵게 내므로 100점 만점을 맞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 P12
게다가 구루메는 독특한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체격이 좋고, 얼굴은 배우처럼 단정하게 생겼고, 치열도 가지런했다. 그 당시구루메는 30대 후반이었으니까, 우리 아버지보다 젊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훨씬 엄격한, 무서운 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 P13
"선생님." 사쿠마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시험지에 잘 안 보이는 부분이 있어서요." 어디가, 하며 구루메가 사쿠마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다. 각오를 다졌다. 사쿠마가 위험을 무릅쓰고 ‘커닝작전‘에 협력해주려고 한다. 내가 결행하지 않으면 어쩐단 말인가. - P14
처음 계획을 세울 때 나는 "어차피 메모를 넘길 거면 정답을적는 역할도 내가 맡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고 제안했다. 산수시험이라면 나도 어느정도 높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있었고, 안자이가 정답을 적은 종이를 내게 넘기고 그걸 내가 다시 구사카베에게 넘기는 과정을 밟기보다 내가 정답을 적어서 구사카베에게 넘기는 편이 훨씬 순조로울 것 같았다. - P15
메모를 받고 나서 왼쪽에 앉은 구사카베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커닝을 실행했다는 죄의식과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에 나섰다는 성취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P15
"가가는 이 미술관에 와봤어?" 묻는 안자이에게 나는 "여기가뭐 하는 건물인지도 몰랐어" 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 P16
책가방을 멘 채 우리 지역에 거주하는 추상화가의 작품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그림, 우리 지역에 사는 작가의 작품이래." 안자이가 작게말했다. "그래? 몰랐어."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대답했다. - P16
알아들은 척하며 대답했다. "이런 낙서 같은 그림이 대단하다고?"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두둔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 그림은 진짜로 낙서 같았다. 선을 그어놓았나 싶더니, 소용돌이 같은 모양이 나오고, 파란색과 빨간색이 사방에 어지러이 튀어 있기도했다. - P17
소묘화가 진열된 벽에서 멈춰 섰다. 엽서 세장 정도 크기의 소품인 데다, 색깔도 없이 거친 밑그림 같은 느낌이라 나는 솔직하게 "이 정도라면 나도 그릴 수 있겠는데" 하고 감상을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안자이가 물었다. - P17
"데생력이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허물어뜨릴 수 있는 거야." 안자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물론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릴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하고 끈질기게 받아쳤다. 그러자 안자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포인트지." - P18
"어땠어? 그림은?" 나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안자이의 손을 보았다. 안자이는 두루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안자이가 세운 작전은 이랬다. "네가 직원의 주의를 끄는 사이에 내가 다른 그림과 미술관의 그림을 바꿔쳐서 가져가는 거야." - P19
전학을 온 안자이는 무뚝뚝하지는 않았지만 붙임성이 좋다고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같이 놀래?" 하고 물으면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끼었지만, 자기가 먼저 끼워달라며 찾아올 만큼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 P20
"가가 같은 녀석한테 골을 먹을 줄이야." 쓰치다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신문사의 높은 사람이라는데 그거랑 관계있는 건지(관계있다고 나는 믿지만 언제나다른 아이들을 깔보았다. 쓰치다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 70퍼센트는 자기 자랑이고, 나머지 30퍼센트는 남을 깔보고 놀리는 말이었다. - P21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무렵 구사카베의 유일한 낙은 집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보는 것으로, 홈런이나 좋은 플레이가 나오면 그 모습을 곧잘 흉내 냈던 모양이었다. - P21
"야, 구사일생 구사카베, 구사코." 쓰치다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들린 듯 구사카베는 허겁지겁 멀어졌다. "구사코?" 안자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 P21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뭐 어쩌라고."쓰치다가 화냈다. 불만 있느냐고, 너도 여자냐고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쭈뼛거리기만 했다. 설마 안자이가그렇게 강하게 자기 의견을 내세울 줄은 몰랐다. - P22
그때 일은 나도 기억난다. 구루메는 상급생의 담임이었지만, 마침 전교 조회가 있었을 때 연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구사카베에게 "넌 옷을 여자처럼 입었구나" 하고 말한 것이다. 놀리는 게 아니라 교과서를 읽는 듯한 말투였지만, 주변의 동급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안자이는 그제야 사정을 이해했다는 것처럼 말했다. "구루메 선생님은 그런 면이 있지." - P22
"아니, 딱히 구루메 선생님을 욕하고 싶은 건 아니야. 다만, 안자이가 말을 이었다. "다만?" 내가 재촉했다. "분홍색 옷을 입었다고 해서 여자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지." - P23
장면이 바뀐다. 집 근처 어린이 공원이다. 거기서 안자이가 들려준 이야기가 잊히지 않는다. 대화의 세세한 내용은 다른 기억들처럼 어슴푸레하지만, 대충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 P23
"해골 마크가 들어간 옷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라니?" "그걸 입고 학교에 가면, 예를 들어 구루메 선생님이나 쓰다가 이렇게 말하겠지. 해골 마크가 들어간 옷을 입고 오다니가가는 촌스럽구나." - P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