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는 일찌감치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그 무렵 당신은 물론 침대차는 타지 않았다. 커다란 보따리를 몇 개씩 든 육중한 몸집의 여자들과 함께 딱딱한 의자에 앉아 흔들리며 밤새 달려갈 작정이었다. - P48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후로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복도에서 이어졌다. 얼마쯤 지나자 인상이 험악한 남자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신을 보고 예의상 겉웃음을 지었지만 웃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안 좋았다. - P48
. 당신은 방해되지 않게 꼬고 있던 다리를 슬며시 풀었다. 남자는 또다시 히죽 웃었고, 당신의 손목시계, 청바지, 신발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난데없이 달러가 있느냐고물었다. 러시아어는 아니었지만 슬라브어인 것은 틀림없었고, 당신은 모른 척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 P49
남자는 자기 혼자 덥석 베어 물었다. 소리가 전혀 안 나게 품위 있게 먹었다. 다 먹고 난 후, 창을 열고 뼈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비닐봉지에서 작은 보드카 병을 꺼내더니 또다시 당신에게 권했다. 당신은 거절하고 계속 책을 읽는 척했다. - P49
그때 승무원이 제복 차림의 남자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당신은 기차표와 여권을 건네주었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당신의 여권을 돌려읽더니 어린애처럼 웃으며 뭐라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맞은편 남자는 기차표만 건넸다. - P49
남자는 한숨을 내쉬고, 자기는 여권이 없다고 당신에게 말했다. 당신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남자는 문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이런 짓을 해서 여권이 없다며 칼로 사람을 찌르는 몸짓을 했다. - P50
당신은 책에 열중하는 척하며 생각했다. 설령이 남자가 끔찍한 악인이라도 내게는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좋은 행동만 할지도 모른다. - P50
꿈속에서 텅 빈 투명한 병들이 선로 위에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열차가 지나간 흔적이 병이 된 걸까, 아니면 이제 열차가 와서 그 병들을 산산이 깨뜨리는 걸까. - P50
이제 십 분 후면 베오그라드에 도착하니 거기에서 커피를 사고 싶다고 했다. 당신은 실은 일초라도 빨리 밤의 냄새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말았다. - P51
주위에도 보드카를 마시는 남자들이 보였다. 얼마쯤 지나자 목도리에 턱을 파묻은 야윈 남자가 다가와 당신의 동행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의 동행이 손목시계 세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자, 지폐를 몇 장인가 건네고 사들이더니 아무 말없이 사라졌다. 커피는 쓰기만 할 뿐 향이 없었다. - P51
당신은 친구와 유스호스텔에서 만나기로 했다고거짓말을 했다. 남자는 시선을 피했다. 그때 당신은 남자의 왼쪽 눈 옆에 있던 상처 딱지가 거의 다 벗겨져서 대롱거리는 것을 알아챘다. - P51
남자가 허둥지둥 당신의 팔을 붙들더니 기다리라고, 이제 레스토랑에 가자고했다. 당신이 이제 갈 시간이라고 말하자, 순식간에 위협적인 표정으로 변하더니 레스토랑에 꼭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집게손가락이 이상한 갈고리 형태로 변해 있었다. - P52
남자가 기다리라고 말했다. 이젠 가야 한다고 당신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이 여러 명 모여들었다. 남자는 갑자기 정치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잘 가, 고마워, 라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은 당신과 남자의 얼굴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했다. 당신은 역 출구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P52
다섯번째 바퀴 베이징으로
당나귀 한 마리에실을 정도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가는 여자가 있다. 아이의 손을 이끌고 조급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남자가 있다. 일행인 두 남자. 허리가 굽은 노인, 영화배우처럼 이마가 반짝이는 젊은이, 길가에 지장처럼 늘어선 것은 구두닦이 소년들이다. - P53
당신은 운동화와 배낭에 붙은 상표를 감춰주는 땅거미가 고마웠다. 절대 고가품은 아니지만, 아직 1980년대인지라 자본주의국가 회사의 제품을 몸에 걸친 것만으로도 외국인임이 드러나고 만다. - P53
자기가 탈 열차를 찾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당신뿐이 아닌 듯하다. 두리번거리며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더 있다. 눈앞에 열차가 멈춰 서 있지만, 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 P54
당신은 주머니에서 투명할 정도로 얇은 차표를 꺼내본다. 열차번호가 흐릿한 잉크로인쇄되어 있다. 이게 정말 차표일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스쳐지나갔다. 만약 아니라면, 속았으니 다시 돈을 내고 새 차표를 살 수밖에 없다. 속는 게 가장 좋은 공부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 P54
이렇게 어두운 역은 처음이었다. 표찰처럼 보이는 부분으로 다가가보니, 단순한 얼룩이었다. 차체 아랫부분에 암호 같은 숫자가 적혀 있지만, 이건 기술자에게나 볼일이 있는 기호일 테지. - P54
역무원 제복 같은 옷을 입은 여성이 눈에 띄어 기차를 가리키며 "베이징?" 하고 물어보았다. 여자는 자기 아이를 대하듯 허물없이 ‘어머, 뭐라는거야, 발음을 통 못알아듣겠네. 지금 바쁘니까 방해지 마‘라고 말하듯 당신을 떨쳐버렸다. - P54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등을 만졌다. 뼈와 뼈 사이의묘한 틈새로 손가락을 집어넣듯이. 흠칫몸서리를 치며 돌아보니, 어제 만난 눈썹이 아름다운 학생이 서 있었다. 어제 시안 중심가에서 그 학생이 말을 건넸다. 7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야간열차 차표를 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자기가 사다줄 테니 당신은 관광이라도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하기에, 큰돈을 건네고는 저녁에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 P55
경찰에 얘기해봐야 비웃음만 사겠지. 우리 나라에서도 낯선 이에게 돈을 건네고 뭘 사다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는다. 왜 그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을까. 일주일간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P55
어학 실력이 좋은 것은 분명하지만, 어학이 그렇게 뛰어난 게 오히려 더 수상쩍지 않은가. 착실하게 생활하려는 사람이 7개 국어나 공부할까. - P55
섬세한 손가락, 나긋나긋한 목, 부드러운 목소리, 살짝 수줍어하는 듯한 미소, 나쁜 짓은 못할 것 같은 얼굴이긴했다. 하지만 양의 스웨터를 빌려 입은 호랑이도 있기 마련이다.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인간 중에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간은 없다고 옛중국의 현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 P56
당신은 끝내 저녁에 배탈이 나고 말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일찌감치 로비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자니, 학생이 약속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낮에 봤을 때와 똑같이 해맑은 눈썹으로 야간열차 차표와 거스름돈을 당신에게 건넸다. 거스름돈은 예상보다 많았다. - P56
학생은 당신이 어느 열차를 타야 할지 모르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와준 게 틀림없다. 학생이 검은 열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열차에 올라탔다. 창밖에서 학생이 손을 흔들었다. - P56
지불한 요금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호화로운 침대차였다. 계급 없는 사회의 일등칸이었다. 당신은 새하얀 시트가 덮인 눈빛 침실로 혼자 들어가, 아래쪽 침대에 누워 문고본을 읽기 시작했다. - P56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두시가지나 있었다. 입구에 체격 좋은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에 지방층이 있는 듯 보이는 건 조명 때문일까. 인사를 주고받았다. - P57
남자가 베이징에서는 어느 호텔에 묵을 예정이냐고 거만한 말투로 물어서 모르겠다고 무뚝뚝하게 대답해두었다. 당신은 누워 있다보니 출구를 가로막고 선 상대에게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서 얘기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상대는 불만스러운 듯이 콧소리를 울리며 맥주를 마시겠느냐고 물었지만, 당신은 몸이 안 좋아서 마실 수 없다고 대답했다. - P57
얼마쯤 지나자 화사한 두 여성의 목소리가 뒤엉키며 가까이 다가왔다. 옅은 분홍빛 요염함이 감도는 아가씨가 문을 열고 당신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 등뒤로 엇비슷한 여자 한 사람이 또 나타났다. - P58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이렇게 화려한 옷차림에 화장도 했다. 대체 그녀들은 뭘 하는 사람일까. 당신은 그녀들을 정의할 수 없어, 복숭아 농원에서 야간열차로 잘못 올라탄 요정이라 여기기로 했다. - P58
문가에 선 채로, 위쪽 침대에 누워 있는 복숭아요정들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말할 때마다 두 사람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음소리 사이사이에 말도 섞여 있었다. - P58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자는 문을 닫고 모습을 감췄다. 아무래도 남자는 다른 객실의 침대를예약한 듯했다. 당신은 마음이 놓였다. 머지않아 승무원이 와서 차표를 검사하고, 불을 끄고 나갔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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