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하기 싫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이라는 책에서 사색적 삶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 입장에 맞서 활동적 삶의 가치를 복구하고 그 내적 다양성을 새롭게 표현하려고 시도한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활동적 삶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조급함, nec-otium, a-scholia * 로 부당하게 폄하되어왔다.¹⁹

* (옮긴이) 여유 없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표현 - P37

 죽음의 가능성은 행위를 제약하고 자유를 유한한 것으로 만든다. 반면 한나 아렌트에게 행동의 가능성은 탄생을 지향한다. 이는 행동의 영웅성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 P38

아렌트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인간을 노동하는 동물로 격하시키는 노동사회로서 행동의 모든 가능성을 파괴해버린다. - P38

이제는 사유도 계산이라는 뇌의 기능으로 전락한다.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근대를 보는 아렌트의 관점이다.  - P39

그녀는 개인의 삶이 근대에 와서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삶의흐름 속에 완전히 잠겨버렸으며 아직 남아 있는 능동적인 개인적 결단의 가능성은 오직 더 잘 "기능" 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는것"뿐이라고 주장한다.²¹ - P39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노동을 통해 인류의 익명적 삶의 과정 속에 용해되어버릴 만큼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걸코 포기하지 않는다. - P40

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 P41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 P41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 Entnarrativisierung*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욱 강화한다.


* (옮긴이) 근대에 이르러 삶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줄 이야기가 붕괴되었다는 의미 - P41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만일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넘어서는 의미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P42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든지그를 죽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 P42

후기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버린다면,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 P43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 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 P43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 P43

이러한 강제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닌다. 그리고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에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 P44

우리는 후기근대에 신경 질환을안고 살아가는 노동하는 동물 역시 일종의 무제만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들은 강제수용소의 무제만과 달리 영양 상태가 좋고 몸에 지방이 과다한 경우도 드물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 P44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장에서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를 다룬다. - P44

 그녀는 체념적 태도로 이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소수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다. 이어서 그녀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쑥 사유의 힘에 호소한다. - P45

그리하여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사유의 체험에 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카토의 경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 아무것도하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때는 없으며, 홀로 고독에 빠져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운 때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다소 임시변통으로 보인다. - P45

원래 이 경구는 키케로가 『공화정에 대하여』에서 자기 말의 근거로 삼은 것으로, 아렌트가 인용한 부분에서키케로는 "광장"과 "북적대는 군중" 에서 벗어나 사색적 삶의고독 속으로 돌아갈 것을 독자에게 촉구하고 있다. 그는 카토 - P46

카토가 이야기하는 사색적 삶의 고독도 아렌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과 무리없이 연결될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부분에 가서 자기 의도와는 달리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주고있는 셈이다. - P46

 그녀는 바로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무엇보다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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