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몽골은 고려에 부마국을 강요한 적이 없다. 오히려 고려 왕실은 싫다는 원나라 황실에 박박 우겨서 자발적으로 사위국이 됐다. 이로써 고려는 정치적 문화적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 P153
고려가 대몽골제국을 상대로 벌인 대몽항쟁 (1231~1270)의 실체는 이 책에서 논할 주제가 아니다. 다만 단행본 책 한 권 분량은 될만큼 잘못 알려진 일들이 이 대몽항쟁 역사에 관해 쌓여 있다. - P155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고려와 원나라 결혼동맹에 대해 폄하하는 것이 무슨 지성의 조건처럼 생각되어 왔다. 또 원나라가 고려왕에게 강압적으로 결혼을 강요하였고, 그 결혼동맹이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지름길로 알고 있다.¹⁰² - P155
사실이 아니다. 고려는 결혼동맹을 강요당한 적이 없다. - P155
1206 년 건국 이후 불과 50년 만에 모스크바를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집어삼킨 몽골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나라 고려는 정복하지 못했다. 1225년 1월, 서경(평양)에 왔던 몽골 신고가 귀국길에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누군가에게 피살됐다. - P157
민심은 천도 거부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 침착하고과묵하면서도 겸손하던¹⁰³ 종2품 문신 참지정사유승단이 입을 열었다. "섬에 숨어 구차하게 세월을 연장하면서 백성과 장정을 칼과 화살에 죽게 만들고 노인과 아이들을 노예와 포로가 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장계가 아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P157
그런데 정작 항쟁을 결정한 권력자 최우는 공무원 월급 운반수레인 녹전거車 100대를 징발해 자기 재물을 싣고 강화도로 떠났다.¹⁰⁴ - P158
섬으로 숨은 지 21년이 흐른 1253년 강화를 주장하는 관료들이 고종 둘째 아들 왕창몽골로 보내자고 결정했다. 고종이 머뭇댔다. 참지정사 최린이 말했다. "아들이 중요한가. 지금 백성 중 살아남은 자가 열에 두셋이다. 강화 한 곳을 지킨들 어찌 나라가 되겠는가.¹⁰⁵ - P158
지옥 그리고 항복
긴 항쟁에 지쳐 있던 고종은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몽골은 고려 왕실에 공물과 인질은 물론 입조를 요구했다. 왕이 공식적으로 항복하고 속국이 되라는 것이다. - P158
1253년 항복 요구에 쫓긴 고종이 승천부(현 개풍군)에 새 궁궐을 짓고 몽골 사신 뭉구다이 만났다. 뭉구다이가 말했다. "우리를 대군이 고려 땅에 들어온 이래 하루에 죽는 이가 몇 천, 몇 만을헤아린다. 왕은 어찌 자기 몸만 아끼고, 만민 목숨은 돌아보지 않는가 일찍 육지로 나와 맞이했다면 무고한 백성이 간과 내장을 땅에 쏟아내며 죽었겠는가. 지금부터 만세토록 화친을 맺자.¹⁰⁶ - P158
5년이 흐른 1258년 3월 26일 마침내 고종 측근인 대사성 유경, 낭장 김인준, 별장 차우가 최씨 무신정권 마지막 권력자 최의를죽였다. 이들은 무신정권에 종지부를 찍고 권력을 왕 고종에게 반환했다.¹⁰⁹ - P159
재위만 45 년이었다. 병들고 지친 그 긴 세월 끝에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왕좌를 탈환했다. 평화를 되찾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 P159
열리는 지옥문
태자가 대륙으로 떠난 사이 고려는 침몰 직전이었다. 6월 10일 몽골 사신이 와서 왕에게 강화도에 설치된 성곽을 허물라고 요구했다.¹¹¹ 항복 의사를 눈으로 확인시켜달라는 뜻이다. - P160
6월 18일에는 사신들이 외성까지 허물라고 요구했다. 고려 정부는 이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둘러 성곽을 허물었다. 이를 보던 많은 사람들이 앞 다퉈 배를 사는 바람에 배값이 폭등했다. - P160
쿠빌라이와 세자의 만남
태자가 국경을 넘고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항복을 받아야 할 몽골 황제 현종이 죽어버린 것이다. 바로 헌종 동생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 P160
그런데다 아버지 고종까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그래서 태자 일행이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바로 이 쿠빌라이를 찾아간 것이다. 쿠빌라이는 아리크부카가 칸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끌고 북상 중이었다. - P161
그래서 태자 일행이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바로 이 쿠빌라이를 찾아간 것이다. 쿠빌라이는 이리크부카가 칸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끌고 북상 중이었다. - P161
당장 항복하라던 강경한 예전 어투와는 딴판이었다. 이뿐 아니었다. 두 달 뒤 쿠빌라이는 다시 명을 내렸다. "고려는 의관은 본국 풍속을 따르고 위아래로 모두 고치거나 바꾸지 말라. 또 개경 환궁은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 내 진심을 말하였으니 의심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¹¹⁴ - P163
고려 국가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킨다는 이 「불개토풍不改土風」정책은 몽골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됐다. 쿠빌라이로서는 태자 왕전은 수세에 몰렸던 권력투쟁을 역전시킬 수 있었던 은인이었다. 하지만 권력이 안정되면 언제 바꿀지 모를 불안하기 짝이 없는 약속이 아닌가. - P163
1270년 2월 원종은 몽골로 직접 가서 군사를요청했다. ‘아직도 속을 썩이는 무신 잔당을 함께 제거해주면 개경으로 환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 아들을 사위로 맞아달라고 쿠빌라이에게 요청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귀국에 청혼한 것은 영원히 좋은 인연을 맺자는 것으로 분수에 넘는 일인가 하여 오랫동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어주셨으며 마침 세자도 입조하여 있으니엎드려 바라건대 공주를 세자에게 내려주셔서 혼례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만세토록 영원히 제후로서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할것입니다."¹¹⁵ - P164
무시할 수 없는 요구이긴 했다. 자기를 황제로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이 네 살 아래 원종이었으니까. - P164
황당한 요청에 세조는 관료들과 논의 끝에 "서두르지 말고 찬찬히 생각하자"며 미뤘다. 딸들이 다 결혼했다는 핑계도 붙였다. 사실은 쿠빌라이에게는 아속진眞후궁)이 낳은 쿠툴룩켈미시忽都魯揭라는 열한 살짜리 딸이 있었다. - P165
그러자 충렬왕을 수행한 몽골 사신이 다루가치에게 말했다. "우리가 돌아가 (네 무례함을) 황제께 보고하면 죄가 없을 것 같은가?"¹¹⁷ - P165
역대 몽골황실은 고려 배짱을 거부하지 못했다. 이를 세조 쿠빌라이가 만든옛 제도, 「세조구제世???」라고 한다.¹¹⁸ 이후 고려왕은 황실 부마 자격으로 황실회의에 서열 7위로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했다. - P166
이후 충선왕은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다 고려 출신 몽골 환관과고려 왕실 출신인 인종 후비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티베트로 유배됐다가 죽었다. 충선왕을 축출한 인종 후비 바얀후투그[伯顔忽篤. 백안]홀는 충선왕의 여섯 번째 왕비 준비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딸이다. 그러니까 충선왕의 의붓딸이다. - P167
고려는 그 억압구조를 역이용해 천하무적 몽골로부터 국내외 정치와 국제정세를 좌지우지하던 국가였다. 말기로 갈수록 썩어간 내부 부패가 문제였지, 고려는 대단한 나라였다. 태자 왕전을 쿠빌라이에게 보낸 그 고려 고종은 지금 강화도에 묻혀 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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