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로를 삐걱삐걱 울리며 육중한 차량이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그때 당신은 침대권 같은 건 당연히 없었다.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자는것이다 - P37
당신은 아무도 없는 객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뒤를 쫓듯 남녀 세 사람이 같은 객실로 들어왔다. 여기 말고도 빈 객실이 많을 텐데 이상하다 싶었지만, 헬로라며 친숙하게 건네는 인사를 받자 다른 객실로 옮기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 P38
당신이 배낭을 선반에 올리려 하자, 눈꺼풀 한쪽이 부은 남자가 갑자기 당신 팔에 손을 얹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눈짓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서, 트렁크가 꽉 차서 더이상 넣을 데가 없으니 이 커피봉지를 당신 배낭에 잠깐만 넣어달라며, 5백 그램쯤 되는 원두커피 종이봉지 두 개를 외투 안주머니에서 꺼내 당신에게 건넸다. - P38
낯선 타인에게 넣을 데가 없으니 커피를 잠깐 배낭에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이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 당신은 아무 생각 없이 기꺼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 P38
커피를 품에서 꺼내고 나니 세 사람은 생각보다 마른체형이었다. 그들뿐 아니라이 열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날씬한데 밀수품 솜옷을 두껍게 껴입어서 위풍당당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 P39
이윽고 열차는 서서히 움직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슬라브 쪽 언어로 조용히 잡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 당시 당신은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었고, 『세르보크로아트어 회화집」이라는 책도 주머니 속에 있었지만, 물론 그들의 대화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금은 세르비아어가 있고 크로아티아어라는 전혀 다른 언어가 있어서, 세르보크로아트어라고 말하면 꾸중을 듣는다. - P39
당신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경쾌한 언어의 리듬에 흔들리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것은 유년기로 되돌아간 느낌이기도 했다.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눈다. 그 내용을 이해 못하는 것 따윈 신경쓰이지 않는다. - P39
별안간 관리직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담소가 중단되었다. 당신은 눈을 번쩍 떴다. 제복을 차려입은 남자 두명이 권총을 어깨에 메고 서있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턱으로 파리를 쫓는듯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어서서, 신분증명서를 건네주고 범죄자처럼 양손을 들었다. - P40
마지막으로 당신 차례가 왔다. 당신의 자본주의국가 여권을 본 제복 남자는 당신 짐이 어떤 거냐고 물었다. 당신이 배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도 복도로 나갔다. 제복을 입은 두 남자는 모두 나간 객실의 의자를 차올리고 좌석 밑에 뭘 숨기지 않았는지 조사했다. 그리고 등받이의 바느질 솔기를 조사했다. 등받이 속에 밀수품을 넣고 꿰매는 사람도 있는 걸까. 그후 짐 검사가 시작되었다. - P40
당신은 차츰 침착함을 잃기 시작했다. 그들은 당신이 커피를 3킬로그램이나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뭐라고 할까. 이탈리아에서 커피를 들여오는 게 금지된 건 아닐까. - P40
영문도 알 수 없는 나라에 와서 이런 부조리로 감옥에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옆 마을에 발을 들여놓는 것보다 쉽다. - P41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다른 세 사람의 짐을 철저히 조사한 후 객실에서 나갔다. 놀랍게도 당신 배낭에는 손끝도 대지 않았다. 애초에 검사하는 수고를 한 사람분 줄이려고 당신 짐이 어느 건지 먼저 물어본 모양이다. 당신은 속은 기분이었다. - P41
나머지 세 사람은 그후로 십오 분가량 얼어붙은 듯한 무표정으로 있었지만, 한 사람이 갑자기 미소를 되찾자 다른 두 사람도 표정을 풀며당신에게 미소를 건넸고, 당신 배낭에서 커피봉지를 꺼내 각자의 짐속에 넣었다. 그리고 감사의 표시인지 달지 않은 조그만 비스킷 같은것을 두 개 건넸다. - P41
네번째 바퀴 베오그라드로
자그레브 역에 도착한 때는 이른 아침이었고, 밤에 푹 젖은 무거운몸을 이끌며 당신과 함께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 밖에도 분명 많았을 것이다. - P42
역에서 나온 당신은 무편에서 누가 오면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오직 교회만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해 보인다. 그 밖에는 생명체의 기척조차 없다. 좌우로 시야를 가로막는 벽이 이어져 있다. - P42
여자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얼굴을 들고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당신의 얼굴을 봤지만, 웃지도 놀라지도 않고 마치 그 자리에 있을 리 없는 뭔가를 보고 만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이내 다시 대야로 시선을 돌렸다. - P43
당신은 불현듯 지난밤 발끝에 묘한 감각이 느껴졌던 것을 아주 오랜 옛일처럼 떠올렸다. 발목까지가 내 몸이고, 거기서부터 끝까지는 크기가 안 맞는 신발을 대충 꿰신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게 정말로 내발등,발가락일까. 마비되어 있다. 차갑고 감각이 없다. 그래도 제발자르거나 하진 마세요. 도끼를 손에 든 나무꾼의 구레나룻이 보여 당신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자르지 마세요. 그쯤에서 잠이 깼다. - P43
당신은 벽이 끊긴 부분을 지나친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돌아가서 그 여자에게 길을 물어볼까 했지만, 망설임이 앞섰다.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딱히 걱정되지 않지만, 우리가 같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는사실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느껴졌다. - P43
오늘 발바닥에서 불안이 느껴진 것은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당신은오늘 아침 야간열차에서 플랫폼으로 내려설 때, 가파른 계단이 무서워서 노인처럼 난간을 꽉 움켜쥐고 내려왔다. 고작해야 세칸이고 차체와 플랫폼의 높이차는 1미터도 채 안 될 정도였지만, 마치 건물 외벽에설치된 나선계단을 10층에서 뛰어내려오는 것 같은 공포에 다리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 P44
높이가 꽤 되는 건물인데 층수는 3, 4층뿐이었고, 세기世紀를 견뎌온 칙칙한 벽색깔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은 차츰 갰다. - P45
당신은 이 마을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갈 곳이 아무데도 없다. 숙박을 하지 않고 그날 야간열차로 베오그라드로 향할 예정이었다. 환한 낮 시간을 마을에서 보내고 또다시 밤의 시간으로 돌아갈 셈이었다. - P45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어쩌면 하고픈 말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아직 언어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다. 말이 되기이전의 ‘뭘 찾고 있는가‘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야간열차의 선로 소리같은 걸까. - P45
청년이 자기랑 같이 미술관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당신은 망설임 없이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미술관에 가고 싶지않을 이유가 없다. 마침내 갈 곳이 정해지자 마음이 놓였다. - P45
청년이 데려간 곳은 미술관이라기보다는 사회복지센터 같은 곳이었다. 입구에 매직펜으로 ‘공산당청년부 회화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청년은 옆에 서서 당신의 시선을 열심히 좋으며 그림을 한 장 한 장 설명해주었다. - P46
예를 들면 좋은 사람은 당신을 인적이 드문 뒷골목으로 끌고 가서 때리고 돈을 뺏어 가는 짓을 절대 하지 않을까. 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뭘까. 아니면 상황에따라서는 그런 짓도 할 수 있을까. 그림을 다 둘러본 후,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곤란한 일이 있으면 전화하라며 종잇조각에 연필로전화번호를 써서 건네주었다. - P46
마을 광장 분수대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몇 명이 앉아 있어 당신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리가 아팠다. 그러자 여학생 하나가 슬며시 다가오더니,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네요. 라며 친구처럼 말을 건넸다. 우아한 영어였다. - P47
이제 어디로 갈까 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또다시 누군가 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스무 살가량의 청년인데, 껌을 씹는 듯한 입매, 기름으로 매만진 머리칼, 노타이셔츠, 홀쭉한 허리, 청바지, 어딘지 모르게 불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건네는 말도 자기 식 영어였고, 당신이 러시아어로 대답하자 얼굴을 찡그리며 러시아어는 싫다고 말했다. - P47
당신은 속으로 슬라브와 이탈리아가 잘 연결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청년도 아무 말 없이 먹는 데 열중했다. 다 먹고 나자 이번에는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그를 따라가니 박물관 같은 건물 앞에 젊은이들이 늘어서 있었다. 청년이 표를 사주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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