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책.





규율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해서는 안 된다‘가 여기서는 지배적인 조동사가 된다.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의 부정성이 깃들어 있다. - P24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하나의 층위에서만큼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 P25

성과주체는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는 규율 단계를 졸업한 것이다.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생산성 향상이란 측면에서 당위와 능력 사이에는 단절이아니라 연속적 관계가 성립한다. - P25

 알랭 에랭베르의 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한다는데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우울증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후기근대적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현이다. - P26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 P26

에랭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은 규율사회의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 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 P27

 주권적 인간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명할 수 있는 상위의 존재는없다. 그는 오직 자기자신에게만 소속된다는 원칙에 따르기때문이다."¹¹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¹² - P27

10) Alain Ehrenberg, Das erschöpfte Selbst. Depression und Gesellschaftin der Gegenwart, Frankfurt a. M., 2008, pp. 14 이하.
11) 같은 책, p. 155.
12)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은 건강을 여신으로 만든다. "사람들은 건강을 숭배한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박거린다" (Friedrich Nietzsche, Also sprach Zaratbustra,
Kritische Gesamtausgabe, VI-1, p. 14). - P75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강조의미의 자아 개념은 여전히 면역학적 범주다. 그러나 우울증은 모든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있다. - P28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 P28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 P29

깊은
심심함

업무 부담의 증가도 시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하는데, 그러한 기법은 다시 주의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 P30

 수렵자유구역에 사는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 P31

 최근의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예컨대 직장 내 집단 따돌림은 큰 규모의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 P31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 hyperattention에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 P32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¹⁴ 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 P32

14)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II-2, Frankfurt a. M., 1977, P. 446. - P75

걸으면서 심심해하고 그런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마음의 평정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며 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다른 활동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심심한 것을 좀더 잘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어쩌면 걷는 것자체가 심심함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33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 P34

그러한 삶의 기본 정조는 사물들이그렇게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조작 가능성이나 과정성에서도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감이다. 근대의 데카르트주의는 이러한 경이감을 회의로 대체한다. 그러나 사색의 능력이 반드시 영원한 존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 P34

 메를로-퐁티는 풍경에 대한 세잔의 사색적 관찰을 외화 또는 탈내면화로 묘사한다. "우선 그는 다양한 지층을 명확하게 이해하려고 시도했고, 그다음에는 더이상 꼼짝하지 않은 채 세잔 부인의 말처럼 눈이 머리에서 튀어나올 때까지 그저 바라만 보았다. (・・・・・…) 그는 말했다.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¹⁷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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