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오지 않는다.
중국의 소설 혹은 극 대본인 ‘버스 정류장‘이 생각난다. 아니면 ‘고도을 기다리며‘가.


취리히행 전철이 와서, 당신과 견우는 마치 친구 사이인 양 같은 객실로 올라탔다. 국경 경찰이 장사꾼처럼 차 안을 훑고 지나간 후, 스위스 철도 승무원이 다가오자, 남자는 갑자기 스위스 방언으로 말투를바꾸고 당신의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동향 사람이 방언으로 부탁하니거절하기 힘든 모양이다. 방언은 돈보다 강하게 인간을 얽어맨다. - P28

이제 곧 취리히 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을 때에야 가까스로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온 승무원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무슨 영문인지 전화가 계속 연결되질 않아서요. 야간열차는 이미 출발했다는군요." - P29

그런가, 방향이 조금 다른 야간열차를 타고 가다가 갈아타는 식으로 궤도를 수정하면 시간에 맞출 수 있는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도 있다.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만약 당신이 없었으면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을 거예요."
"그라츠 공연도 힘내서 잘하세요." - P29

깊은 잠 속으로 막 빠져들기 시작한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취리히 친구에게 전화하는 걸 깜박한 게 그제야 떼올랐다. 그녀는 플랫폼에서 기다리다 지쳐 다시 집으로 돌아갔겠지. - P30

당신은 그녀가 학창 시절에 쓴 시가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기타 연주자인 젊은 남자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시였고,
당시 그 복사본을 갖고 있던 사람은 당신뿐이었다. 그 시들이  - P30

새벽이라기보다는 한밤중에 잘츠부르크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렸다.
범죄의 냄새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벌써 일하러 나가는 노동자의 숨결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춥다. - P31

 당신은 갑자기 타인의 일상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한 아이가 당신 쪽을 슬쩍 훔쳐보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교과서로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아이의 마음속에 떠오른 말은 무엇일까. 당신도 옛날에는 어린아이였다. - P31

세번째 바퀴
자그레브로


이것은 아직 구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있었을 무렵의 얘기다. 당신은아직 학생이었고 청바지도 달랑 하나뿐이라, 당신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미래의 무대예술 같은 얘기를 해도 주위의 연장자들은 그저 열은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한 번도 무대에 서본 적이 없었고, 글을 발표한 적도 없었고, 대학 문학부에는 어중간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었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대단한 녀석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P32

로마에는 전 세계 자본주의국가에서 엇비슷한 배낭을 멘 젊은이들이모여들었고, 같은 반 친구인 양 인사를 주고받았다. 광장에 가서 분수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종잡을 수 없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 P33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의 공통점은 오히려 돈이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있다는 것은 양의 문제가아니라 자기가 늘 사용하는 돈을 외화로 교환할 수 있다는 의미다. - P33

당신은 밀라노에서 트리에스테로 갔다. 아드리아 해 표면에서 튀어오르는 햇살이 공기의 프리즘을 통과해 굴절되고 분산되어, 당신은 현기증을 동반한 소외감을 느꼈다. - P33

트리에스테에서는 자그레브행 야간열차를 타려고 역으로 갔다. 드디어 유고슬라비아로 들어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해가지기 시작한 역 구내에는, 지중해와는 동떨어진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 P33

유고슬라비아에 가기로 한 이유는 비자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당시 사회주의국가에서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 곳은 이 나라뿐이었다. 다른 나라에 가려면 몇 달 전부터 수속을 밟아야 했기 때문에,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여행을 흉내내는 여행자에게는 성가신 일이었다. - P34

어두침침한 역 대합실에 눈이 익숙해지자, 차츰 사람들의 윤곽에 색채가 깃들며 세세한 부분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 P34

지 않아 겉돌았다. 당신은 사회주의국가에서는 뜻밖의 물건이 비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좋은 청바지라면 소련에서는 모피코트와 교환해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이탈리아에서 유고슬라비아로 청바지를 밀수하려는 건지도 모른다. - P34

 당신이 어디로가는지 알고 싶은 모양이다. 당신은 솔직하게 자그레브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저 열차는 안 좋으니 자기들이자동차로 태워다주겠다고 말한다. 당신은 열차가 안 좋다는 표현에 어리둥절하다. 안 좋은 열차란 어떤 열차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열차, 아무리 기다려도 출발하지 않는 열차 당신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 - P35

 한 사람이 날카로운 시선을 당신의 손목시계로 던졌다. 로마 길거리에서 기념으로 산싸구려 시계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한순간 굶주림의 섬광이 번득다. 마각을 드러낸 것일까 하고 당신은 한순간 의심했다.  - P35

 두 사람은 당신의 팔을 슬쩍 건드리며 차로 가자고 계속 유혹했다. 당신은 자기 의사와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한 발짝을 내디디고 말았다. 흡사 최면술에 걸린 것 같았다. - P35

바로 그때 옆에서 체격 좋은 오십대 여자가 다부진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민화풍 색조의 치마와 스카프가 그림책에 나오는 농촌 아낙네같았지만, 말투는 또랑또랑하고 영어표현도 정확했다.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니 따라가면 안 된다고, 차에 태워서 당신 시계를 빼앗을속셈이라고 했다. 두 남자는 머리를 얻어맞은 조그만 어린애처럼 목을 움츠리며 슬금슬금 도망쳤다.  - P36

 이탈리아에서는 이따금 주위를 맴돌며 수상한 눈빛으로 이쪽을 살피는 남자들이 있었다.
당신이 노려보면 슬금슬금 도망쳤다. 풋내기 눈에도 빤한 짓을 왜 하고 다닐까 하는 마음에 보고 있노라면 이가 근질거릴 정도로 답답했다. - P36

그러나 그때는 쓰로도 자기가 날조해낸 얘기를 굳게 믿고 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세계최고의 무대예술가다, 지금 멋진 구상이 머릿속에 들어 있지만, 공교롭게도 집에 도둑이 들어 재산을 잃고 말았다.  - P37

원숭이가 달을 딴다는 식의 얘기라도 말만 잘하면 믿어주지 않을까.
믿음을 얻으면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자. 가루가 된 몸은 하얀 마약 가루처럼 주위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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