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분위기가 뭔가 심상찮다. 플랫폼에 이상하게 사람이 적다. 게다가 역무원들이 왠지 소란스러운 게 무슨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 P9
지금 파리행 야간열차를 타면, 파리에서 내일 오후 두 시부터 시작하는 리허설 시간에 맞출 수 있다. 본 공연은 그날 저녁 일곱시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비행기로 가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편하다. - P9
출발지인 함부르크 알토나 역에서도 승객이 거의 타지 않았는지 기차 안은 한산하다. 설마하니 곧장 차고로 들어가나 싶어 불안한 마음에 플랫폼을 둘러보니 ‘파리행‘이라고 분명히 표시되어 있다. 당신은 6인용 칸막이 객실에 혼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 P10
"이 객실은 저 혼자 쓰는 건가요." 그렇게 묻자, 승무원은 ‘그럴지도 모르죠‘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오늘은 웬일로 빈자리가 많네요. 왜 그럴까요." 승무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 P10
이유야 어떻든 가장 싼 요금으로 객실을 독차지할 수 있다면 불만은 없다. 걱정해본들 소용없다. 대관절 무슨 위험이 있겠는가. 열차는 선로 위를 달리니 과격파 무리에게 납치당할 염려도 없다. - P11
그래서 승무원이 갑자기 깨웠을 때는 깜짝 놀라 기억의 주머니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한순간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일어나세요, 여기서 바로 내리셔야 합니다." 묘하게 감정이 결여된 그러면서도 성량만은 큰 목소리였다. - P11
승무원은 동정의 빛은 털끝만큼도 없이 선언했다. "아뇨, 파리는 아직 멀었지만, 이제 곧 프랑스 국경입니다. 프랑스는 오늘부터, 그러니까 밤 열두시부터 전면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열차는 운행을 중지합니다. 서둘러 내릴 준비를 해주십시오." - P11
"하지만 그럼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요." 당신은 조금이나마 상대의 동정을 살 셈으로 처량한 목소리를 내본다. - P12
그에 비하면, 자부심 강하게 야간열차에서 승객알 내쫓는 프랑스 철도직원은 건강해서 보기 좋다. 아아, 그러니 당신은 파업을 응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면파리 공연과 그 출연료는 어떻게 되는가. "저는 일 때문에 꼭 파리에 가야하는데, 어떻게 해주실 거죠?" 무심코 책망하는 말투로 변해버린다. "역에서 버스가 출발할 테니, 그걸 타고 파리로 가십시오." 그 말을 듣고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 P13
비참한 운명공동체는 열차에서 내려 터벅터벅 플랫폼을 걸어갔다. "버스는 어딨나요, 파리행이오." 역무원에게 몰아대듯 묻자, "대합실에서 기다리세요." 라고 사무적으로 대꾸하며 뿌리쳤다. 들어본적도 없는 역 이름이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가로등도 없다. - P13
당신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간단한 메뉴판에 크루아상과 카페오레, 아침식사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아침을 먹고 싶어졌다. 아직 아침도 아니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아침식사를 먹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새벽 기분이 느껴지는 듯했다. - P14
당신은 크루아상과 카페오레의 맛에 몹시 감탄해서 비싸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팁을 조금 주면 딱 맞겠다 싶어 웨이트리스에게 지폐를 건네며 말했다. "이거 받으세요.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요." 웨이트리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지폐를 꽉 움켜쥐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 P14
바로 그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지만, 옆에서 불쑥 나타난 아름다운 얼굴이 물었다. "당신 얼굴, 텔레비전에서 본 것 같은데, 피아니스트였나요?" 상대의 목소리는 여자라면 마음을 끌어당기는 나지막한 쉰 목소리이고, 남자라면 맑고 청아한 미남의 목소리다. 그런 꿀빛 만남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 당신은, "버스는 대체 몇시나 돼야 올까요." 라는 시시한 말로 대꾸를 하고 말았다. - P15
이윽고 어둠 속에서 엔진 소리가 들리고, 버스 몇 대가 나타났다. 허둥지둥 올라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가신 듯이 꾸물꾸물 일어서는 사람도 있다. 당신은 서둘러 첫번째 버스로 뛰어올라 맨 앞자리에 앉았다. - P15
당신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까지 있던 곳은 프랑스가 아니라 벨기에였던 것이다. 벨기에도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화폐도 프랑이지만, 벨기에 프랑은 프랑스 프랑의 몇분의 일 가치 밖에 안 된다. - P16
당신은 몇 해 전에 마르세유에서 쓰레기 수거차의 파업을 본 적이있다. 도로변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매일 불어나서 올려다봐야 할 만큼 높아지는데도, 파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한여름 태양 아래서 음식물 쓰레기가 썩어갔다. 사람들은 냄새난다고 코를 움켜쥐면서도 그 광경을 감상한다. - P16
(중략), 두시 정각에 맞춰 극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극장 문의 커다란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총파업으로 모든 공연을 중지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여기에서 당신은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 묵직한 철문은 당신 말 따윈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 P17
소년 서너 명이 다가오다가 그런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웃었다. "왜 웃어? 학교는 어쩌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렇게 호통을 쳐봤지만, 웃는 얼굴은 변함이 없다. 학교도 파업인가? 사회 과목 견학으로 파업을 견학하는 중일까. 학교에서는 파업할 권리는 물론이고 파업 방식까지 가르치나? - P17
당신은 지하철역을 찾아 지하철을 타고 북北파리역으로 갔다. 역 안내소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바로 함부르크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자 상대는 태연하게 말했다. "전철은 전부 파업중입니다." "그럼 난 어떡하죠?" - P17
"브뤼셀행 버스를 타세요. 거기부터는 평상시처럼 전철로 돌아갈 수있으니까." 또다시 벨기에란 말인가. 이 역무원도 한통속인 것 같다. 당신은 단 하룻밤 벨기에의 존재를 잊고 잠들어버린 벌로 평생 끊임없이 벨기에로 되돌려 보내지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 P18
버스 기사는 이미 회수한 지폐 다발을 흔들며, 자타세요, 타요, 하고 손님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자리가 다 차면 출발한다고 한다. - P18
기차표가 있는데, 왜 따로 버스요금을 지불해야 한단 말인가. 파업해서 급료가 오르면 이쪽 손실을 변상해줄 건가? 이쪽도 가난하다. - P18
브뤼셀 역에 도착했다. 아마 여기가 역일 테지. 버스기사가 그렇다고 했으니. 그런데 플랫폼이 없다. 전철이 보이지 않는다. 이해할 수없는 구조에 조롱당하며 갈피를 못 잡고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맴돈다. 간신히 열차 표시 핀을 찾아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펴보니, 목적지가 모두 런던으로 되어 있다. - P19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유랑 예인이니까. 포기해버리자. 두손 두발 다 들어버리자. 버리고 또 버리고, 계획도 야심도 모조리 버리고 무심히 앞을 바라보자, 성격이 급하면 결국 자기 손해인 법, 찬찬히 살펴보니 여기는 유로스타* 승차장이었다.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벨기에 브뤼쉘을 잇는 국제 고속철도.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해저 터널인 체널 터널늘 통해 도버 해협을 횡단한다. - P20
두번째 바퀴 그라츠로
역은 분명 따분한 장소일지 모른다. 따분해서 쉬 지겨워지기에 오히려 바쁘다는 생각이 사라지고 긴장이 풀린다. 따분함은 여유다. 그런 생각에 혼자 빙긋이 웃으며 플랫폼을 오락가락한다. 잿더미 속을 걸어가는 사람처럼 신발 바닥의 감촉이 묘하다. - P21
여기가 저 웅대한 도나우 강의 발원지라는 말을 듣고, 그곳에있는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적은 물이 대체 어떻게 그 큰 강줄기로 성장해갈까. 그것은 오직 물만 안다. - P22
당신은 그날 밤, 취리히로 가서 야간열차를 타고 그라츠로 이동할예정이었다. 내일 낮부터 그라츠 극장에서 연습이 있고, 밤에는 마지막 리허설을 한다. 그 프로젝트에서 당신의 춤은 연극의 일부고 실제로 무대에 서는 시간은 팔 분 정도지만, 사전 협의는 확실히 해둬야 한다. - P22
호텔에 맡겨둔 트렁크를 찾으러 가는데, 어느새 호텔 주변의 길도 한산해져 있었다. - P22
머지않아 그 플랫폼으로 검은 벨벳 정장을 입은 여성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해서 오십대 중반의 체격이 다부진 남자가 왠지 주뼛거리는 기색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이상하게 옷을 두툼하게 껴입은데다, 목도리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었다. 남자는 큼지막한 여행가방을 들고 있지만, 여자는 조그만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을 뿐이다. 여자의 손길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쉼 없이 너울거리지만, 남자는 자신의 우울함에 삼켜진 듯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다. - P23
정각이 지났는데도 열차는 오지 않는다. - P23
(전략). 그럴 거라고 당신은 제멋대로 상상했다. 열차는 오지 않았다. 벌써 정해진 시각보다 이십분이나 지났다. 당신은 불안해져서 역무원을 찾아 호소했다. "분명 늦는 것 같긴 한데요." 역무원은 말끝을 어물쩍 얼버무린다. - P24
그러나 역무원에게 화풀이를 해본들 소용없다. 안 좋은 날씨를 뉴스캐스터 탓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작별 인사에만 빠져 있던 남녀도 그제야 열차가 오지 않는것을 알아챘는지 이쪽으로 다가왔다. - P24
삼십 분만 더 기다리면 다음 열차가 올 테니 그걸 타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다음 열차로는 지겐에서 환승 시간을 맞출 수 없다. 그러면 취리히에서 야간열차를 못 탈 게 틀림없다. 당신은 맥이 풀려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 P25
당신은 수줍음을 많이 타서 평소에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못 건네지만, 이때만큼은 우물쭈물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죄송한데, 저도 지겐까지 좀 태워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취리히행으로 갈아타야 하거든요." "오, 당신도 취리히까지 가시는 건가요." 남자가 목도리에서 고개를 빼며 붙임성 있게 말을 건넸다. - P25
여자는 핸들을 단단히 잡고 있으면서도, 사교적인 배려에서인지 이따금 거울을 들여다보며 뒷좌석에 앉은 당신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려 애썼다. "역시 음악제에 오신 거죠? 피아니스트신가요?" "아뇨, 무용수인데 연주 퍼포먼스에 참가시켜주셔서 춤을 췄어요. 춤이라곤 해도, 발레 같은 건 아니에요. 무대에 있는 오십 개가 넘는 콘센트를 아주 빠른 속도로 뽑거나 꽂으면 그에 따라 전기악기 연주가 변하는 퍼포먼스를 하죠." - P26
손목시계로 눈길을 돌리니 지겐에서는 이미 취리히행 전철이 출발할 시간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고 핸들을 쥔 직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왠지 재촉하는 것 같아 물을 수가 없다. - P26
지에 도착한 당신은 두 사람의 이별 의식에 방해되지 않으려고 곧장 잰걸음으로 사라지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자쪽이 말했다. "잠깐 기다리세요. 저도 취리히로 가니까 같이 가서 야간열차가 기다려주도록 교섭해봅시다." - P27
취리히행 전철은 이미 출발한 후였다. 다음 취리히행 전철을 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면 야간열차 시간에 맞출 수 없다. 남자가 역무원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봐주었다. - P27
당신은 체격이 좋은 견우와 나란히 플랫폼에 서서 전철을 기다렸다. 당신은 견우에게 작곡 일을 하느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견우는 자기는 물리학자이고 음악은 단순한 취미라고 즐거운 듯이 대답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건대 취리히 공과대학 교수나 그 엇비슷한 자리에 있을 것같지만, 구체적인 직업은 묻지 않았다. - P27
"아뇨, 아뇨, 훌륭한 아티스트시잖아요. 공연 봤습니다." 남자가 조금 전에 여자가 있을 때는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당신은 자존심의 겨드랑이가 간질거려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티스트라, 전 그런 수준이 못돼요. 저 같은 사람은그저 구름 따라 물따라 이리저리 떠돌 뿐이죠."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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