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그러니까 15년 정도 전에는 주변에 책을 읽는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유, 권장을 하는 것도 별로 하지 않는다.
오늘은 왜 사진이 등록이 안 될까.

‘서울은 정도전의 백악산의하여 조성된 이래 600년 역사의 중심 공간임. 경복궁-서울역-한강(노들섬을 연결하는 7킬로미터를 역사와 미래를 아우르는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함. 특히 서울역~한강 구간은 ‘미래 발전 도약의 공간‘으로 선언했다.¹² - P37
서울 광화문 앞 도로는 477억 원을 투입해 광장으로변신했고 그 광장은 또 그만큼 돈을 투입해 개조 중이다. 지난 정부와 지난 서울시에 이어 현 서울시장 오세훈 또한 그 작업을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공사의 연속성을 위해" 계속하고 있다. - P37
이제 구경해본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국가 축‘과 ‘백악주산설로 조성된 도시 한성‘이 과연 진실인지 - P38
"내가 참서를 불태우라 했거늘"
권력을 잡고 17년째인 1417 년 태종 이방원이 어전회의에서 말했다. "내가 서운관 참서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직 있다는 말인가? 참서를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들이 깊이 믿을 것이다. 빨리 불살라 이씨 사직에 손실됨이 없도록 하라." - P38
이상한 일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성 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학대사와 정도전과 하륜 사이에 풍수지리 논쟁을 거쳐 이뤄진 일‘이 아니었나. 그런데 태종은 풍수지리를 논하는 참서를 태우라 명하고 본인은 "나는 믿지 않았다"고 주장하다니. - P38
대신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어서‘¹⁵, ‘또다시 (큰 비용을 들여) 토목사업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¹⁶ 좌청룡 우백호 같은 풍수지리적 해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다. - P39
1393년 2월 11일 태조가 계룡산 현장에서 가부를 묻자 무학(실록에는 ‘자라고 나온다)은 "능히 알 수 없다"고 답했다.¹⁷ 그래도 태조는 계룡산 천도를 결정했다. 대토목공사가 시작됐다. - P39
태조는 남경(한양) 옛 고려 궁터에 들러 이리 말했다. "조운이 통하고 백성도 편리할 땅이다."¹⁹ 한양이 도읍으로 확정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 태조는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했다.²⁰ - P40
무학과 정도전, 종말적 신화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백악산과 인왕산을 두고 논쟁을 벌이다 정도전의 백악산설이 승리했다. 그래서 무학이 "200년 뒤 (전쟁이터지면 내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리라"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는 공식 기록 어디에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는 아예 소설이다. - P41
임진왜란이라는 어마어마한전이 가시지 않은 때였다. 그 전쟁 후 나라가 피폐해진 원인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땅 잘못골라 나라 망했다‘는 종말론적인 신화가 양산되면서 생긴 신화다.²⁰ - P41
그러니 ‘일제에 의해 국가 축이 훼손됐다‘는 주장 또한 괴담이다. 없는 축이 어떻게 훼손되는가. 사진을 보면 명확하다. - P42
총독관저(大)-총독부(日) - 경성부청(本)-조선신궁(天)에 이르는일제의 축‘을 바로잡겠다는 ‘세종광장 조성방안‘은 더욱 어이없다. 아래 사진을 보면 총독부 - 경성부청-조선신궁은 이 축에서 동쪽으로 한참 치우쳐 있다. 그런데 총독부와 경성부 청사는 여전히 옛 ‘조선의 축‘ 선상에서 그 축 방향으로 건축됐다. - P43
조선신궁은 1925년 열 군데 후보지 가운데 선정된 남산에 건설됐다. 입지 선정기준에는 ‘일본의 축‘ 같은 고려는 없었다. - P43
그런데 대한민국 국토교통부는 이를 역사적 근거로 삼아 ‘국가상징거리 조성사업‘을 입안하고 실행 중이다. 서울시는 2009년 세종광장 조성방안‘을 통해 광장을 만들었고, 동일한 논리에 의해 지금 그 광장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 P44
오른쪽 사진은 1945년 9월4일 미군이 서울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 전투기 꼬리 아래에 총독부가 보인다. 그리고 전투기 아래 사진 앞쪽에 당시 일본군 병영이 보이고, 병영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가 보인다. 이 길이 바로 조선왕조 내내 백성이 사용했던 후암동 옛길, 두텁바위로다. - P44
그렇다면 무엇이 대한민국의 상징이라는 말인가 45 사진으로 서울역 철길이 보인다. 병영과 칠길 사이에 도로가 있는데이 길이 1908년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부가 만든 현재의 첫강대로다. - P46
도로 끝은 한강대교로 연결되는데 다리 가운데에는 노들섬이 있다. 옛 이름은 중지다. 1917년 총독부가 다리 지지 시설로 만든 인공섬이다. - P48
광화문광장에 대한 다음 주장은 무엇인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역사를 복원하려는 강한 의지. -2007년 11월 서울시장 오세훈, 《세종로의 비밀》 (중앙북스,2007) 추천사 - P48
광화문광장 복원을 주도한 전前 국가건축정책위원장 승효상은 2009년 이렇게 주장했다.
‘육조거리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게 되는데 이러면 서울의 정확한 옛 축을 볼 수 있다."²⁷ - P49
그런데 땅을 파보니 담장 정도가 아니라 삼군부행랑과 다른 건물터들이 튀어나왔다. ‘원래 육조거리‘라고 그가 주장한 공간이 텅빈 거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울의 정확한 옛 축‘이 아니라는 말이다. - P50
2020년 4월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승효상은 이렇게 주장했다. ‘정도전이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연결선 위에 경복궁을 두고주문 앞의 길을 넓혀 양옆에 관아를 설치하면서 육조거리라는 광잘 같은 길에 나타났다. 이곳은 오늘날 국가의 축으로도 상징성을 가지며 우리 모두에게 깊은 인식되어 있다.‘*
*승효상, <광화문광장 재론>, 2021년 4월 21일 <경향신문>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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