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세 내가 슈트를 입지 않는 건 그런 옷차림을 꼭 해야하는 상황이 거의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캐주얼한 재킷을 입을 때는 있지만, 넥타이까지 매진 않는다. - P217
하지만 때때로, 딱히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진해서 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볼 때가 있다. 왜 그런가? - P217
아무튼 실제로 그렇게 차려입고 나면, 이왕 슈트까지 입었는데 바로 벗어버리는 것도 재미없고, 이대로 잠깐 밖에 나가볼까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는 슈트를 걸치고 넥타이를 매고 혼자 거리를 걷는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기분이긴 하다. - P218
집으로 돌아와 구두를 벗고, 슈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후줄근한 스웨트셔츠와 트레이닝바지로 갈아입고 소파에 아무렇게나 편하게 드러눕는다. 말하자면 그저한 시간쯤의 무해한 적어도 나로서는 특별히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는 비밀스러운 의식인 셈이다. - P218
몇 년 전에 산 폴 스미스의 다크블루 슈트(필요해서 샀지만 아직 두 번밖에 입지 않았다)를 침대 위에 펼치고, 어울리는 넥타이와 셔츠를 골랐다. 엷은회색 와이드스프레드 셔츠에 로마공항 면세점에서 산 에르메네질도제냐의 자잘한 페이즐리 무늬 넥타이다. - P219
께름칙함? 뭐라고표현하면 좋을까・・・・・・ 그것은 자기 경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느낄 법한 죄책감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법에 저촉되지는 않을지 언정 윤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사칭이다. - P220
장고 라인하르트가 코드를 틀리게 잡는 밤도 있고, 니키 라우다가 기어를 넣다가 실수하는 오후도 있다(아마 있을 거라고 본다). 그러니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고는 슈트를 입은 채 검은색 코도반 가죽구두를 신고 혼자 거리로 나왔다. - P221
평소에 가는 동네 단골 바가 아니라, 조금 멀리 나가서 지금껏 한 번도 간 적 없는 바에 들어가보았다. 단골 바에서는 바텐더가 내 얼굴을 아니까 분명히 "오늘무슨 일 있으세요? 슈트에 넥타이까지 다 매시고" 하면서 말을걸 테고,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으니까(어차피 이유 같은것도 없으니까). - P221
테이블 위에는 서류로 보이는 것이 놓여 있었다. 아마 업무 이야기를 하는 중인가보다. 아니면 그냥 경마 결과를 예상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 P222
앞에서도 말했듯이 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줄거리가 썩 흥미롭지 않았다. 게다가 도중에 인물들의 관계가 헷갈려버렸다. 그래도 반은 의무적으로, 반은 습관적으로 그 소설을 계속읽어나갔다.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도중에 내던지는 건 옛날부터 좋아하지 않는다. - P222
아마도 내가 아까부터 느껴온 막연한 위화감 탓인 것 같았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나라는 내용물이 지금의 그릇에 잘 맞지 않는다, 혹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정합성이 어디서부턴가 손상돼버렸다는 감각이다. - P223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 P224
나는 책을 읽는 척하면서 거울에 비친 그녀를 남몰래 관찰했다. 젊지는 않다. 쉰 안팎일까. 그리고 겉으로는 실제 나이보다 젊게 보이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않는 것 같았다. 아마 스스로에게 나름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리라. 몸집이 작고 마른 편이고, 딱 보기 좋은 길이의 커트머리다. 옷차림도 꽤 멋스러웠다. - P224
십오 분쯤 뒤, 그녀는 내 옆자리 스툴에 앉아 있었다. 카운터석이 점점 붐비면서 새로 들어온 손님에게 밀려나듯이 여기까지 슬라이드해온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일행이 없는 듯했다. - P225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책을 참 열심히 보시는 것 같은데 뭐좀 여쭤봐도 될까요?" 작은 몸집과 달리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싸늘하다고 할 정도는아니지만 적어도 우호적인, 혹은 뭔가에 친근하게 다가가는 울림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멋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 있는 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전히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적많은 악의 혹은 적대감이 담겨 있다는 것만은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묵묵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 P226
"보드카 김렛." 나는 침묵을 깨뜨릴 셈으로 말했다. "뭐라고요?" "김렛이 아니라, 보드카 김렛." 무익한 발언일지 모르지만, 그둘에는 역시 확실한 차이가 있다. - P226
"뭐든 상관없고,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도회적이고, 지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요?" 아마 나는 그냥 조용히 계산하고 한시바삐 자리를 떴어야 했으리라. 그러는 게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대웅이라는 걸 잘알고 있었다. 이 여자는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다. 짐작건대 나를 도발하고 있다. - P227
"제가 아는 분?" 그러고는 자기 잔을 집어들고(내 기억으로는 아마 세 잔쌔였다). 안에 든 칵테일을 뭔지는 모르지만-한 모금 빨아들이듯 마신다음 말했다. "제가 아는 분이시던가요?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이나오는 거야?" 한번 더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이 여자를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대답은 역시 없다, 였다. - P228
"멋진 슈트네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한테는 안 어울리지만 꼭 빌린 옷 같아요. 넥타이도 슈트와 분위기가 안 맞고 미묘하게 서로 부딪쳐요. 넥타이는 이탈리아, 슈트는 아마 영국 쪽이겠죠." - P228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당연하잖아요." 당연? 나는 알고 지내는 패션계 관계자들을 머릿속으로 훑어보았다. 패션계 쪽 지인은 몇 명 안 될뿐더러, 전부 남자였다. - P229
나는 잔에 조금 남아 있던 보드카 김렛을 마저 마시고 조용히 스툴에서 내려왔다. 어떻게 보나 대화를 끝낼 타이밍이었다. "난 아마 당신이 아는 분은 아닐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럴 것이다. - P229
. "당신과 친한 그 친구는 아니, 한때는 친했던 친구는 지금 당신을 무척 불쾌하게 생각하고, 나도 그여자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불쾌하게 생각해요. 짚이는 데가 있을걸요. 한번 잘 생각해봐요.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짓을 고약한 짓을 했는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 P230
왜일까? 나는 아마 두려웠던 것이리라. 실제의 내가 아닌 내가, 삼년전 ‘어느 물가에서, 어떤 여자 아마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저지른 고약한짓의 내용이 밝혀지는 것을. - P231
그나저나 대체 ‘물가‘가 어디란 말일까? 그 단어에는 뭔가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그곳은 바다일까, 호수일까, 강일까, 아니면 한층 특수한 물의 집합체일까? 삼 년 전 나는 어딘가 물이 많은 곳 근처에 있었을까? 기억이 가닿는 데는 없었다. - P231
어쨌든 지독히 불쾌한 어떤 감촉이 입안에 남았다. 삼키려 해도 삼킬 수 없고, 밴으려 해도 뱉을 수 없는 무언가다 할 수 있다면 그냥 화를 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쾌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 P232
계단을 다 올라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계절은 더이상 봄이아니었다. 하늘의 달도 사라졌다. 그곳은 더이상 내가 알던 원래의 거리가 아니었다. 가로수도 낯설었다. - P232
공기가 얼어붙은 듯 차가워서 나는 슈트 재킷의 깃을 세웠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라고 그 여자는 말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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