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왜 읽었지. 왜 잘 읽히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지 경위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다보니 우연히 이야기가 나왔다. 아무튼 내가 열여덟 살이었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이다. - P29

"고등학교는 이미 졸업한 상태였어. 대학은 가지 않았고, 말하자면 재수생 신분이지." 나는 일단 그렇게 설명한다. - P29

(전략), 도서관에 드나들면서 두꺼운 소설책만실컷 읽었지. 부모님은 내가 도서관에서 열심히 수험 공부 하는줄 아셨을 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미적분 계산의 원리를 파고드는 것보다, 발자크 전집을 독파하는 쪽이 훨씬 즐거운데." - P30

. 하지만 내가 열여섯 살 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 왜 갑자기 그런 모임에 초대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걸까? 설마. 그녀는 내 취향의 얼굴이 아니었을지언정 이른바 미인형이었고, 늘 세련되고 질좋은 옷을 입었으며, 학비가 비싼 사립여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 P30

팔꿈치가 부딪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어려운 곡도 아니었고 더욱이 나는 쉬운 파트를 맡고 있었는데, 그랬는데도. 그때마다 그녀는 ‘아, 뭐야‘ 하는 표정을 슬쩍 내비쳤다. 작게하지만 똑똑히 들리도록 혀를 차기도 했다. 그 소리를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 P31

어쨌거나 나와 그녀는 우연히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닌 사이일 뿐이었다. 학원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긴 했지만, 친밀하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없다. 그러므로 그녀에게서 갑자기 날아온 연주회 독주회가 아니라 세 명이 합동으로 여는 리사이들이었지만) 초대장은 내게는 의외라고 할까, 당황스러운 사건이었다. - P31

공연장은 고베의 산 위에 있었다. 한큐전철 **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가파른 언덕을 올라간다. 산꼭대기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걸어가면 한 대기업이 소유해 운영하는 작은 콘서트홀이 있고, 거기서 리사이틀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 P32

 쌀쌀하고 흐린 일요일 오후였다. 하늘이 두꺼운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당장이라도 찬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바람은 없다. 나는 얇은 무지 스웨터 위에 청회색 헤링본 재킷을 입고 캔버스 숄더백을 비스듬히 메고 있었다. 재킷은 너무 새것이고 가방은 너무 오래된 것이었다. - P32

그리고 한 손에는 셀로판지에 싸인 화려한 빨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런 차림으로 버스에 앉아 있자니 주위 승객들이 힐끔힐끔 내 쪽을 쳐다봤다. 혹은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 P32

(전략),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11월의 일요일 오후에 이런 산꼭대기까지 제 발로찾아오다니. 참석 의사를 밝히는 엽서를 우체통에 넣었을 때부터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게 틀림없다. - P33

언덕을 올라갈수록 주위 집들이 점점 커지고 호화로워졌다.
어느 집이나 멋들어진 돌담이 받치고 있고, 커다란 대문과 자동차 두 대가 들어가는 차고가 딸려 있었다.  - P33

만일 근처에서 리사이틀 같은 것이 열린다면 왕래하는 사람들이 좀더 보일 법한데.
그런데 주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고, 모든 것이 깊은 정적에 싸여 있다. 마치 머리 위의 두꺼운 구름이 소음을 고스란히 빨아들여버린 것처럼.
뭔가 착각한 걸까? - P34

이윽고 찾던 건물에 도착했을 때, 내가 깨달은 것은 커다란 쌍여닫이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철문에 굵은 쇠사슬이 친친 감겨 있고 거대한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 P34

문에 달린 인터폰 버튼을 눌러봤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간격을 두고 다시 한번 눌러봤지만, 역시 답이 없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리사이틀 시간 십오 분 전이다. - P35

 그사이 누군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는 옅은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문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움직임이라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 P35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여기서 피아노 리사이틀 같은 것이 열릴 성싶지 않다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빨간 꽃다발을 들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분명히 엄마가 "그 꽃다발은 대체 뭐니?"라고 물어볼 테지만, 대충 둘러대는 수밖에 없다. - P36

한참 전부터 피로가 쌓여 있었는데 모르고 살다가 지금 기우 알아차린 듯한 좀 이상한 피곤함이었다. 정자 입구 쪽에서는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돌제에는 거대한 컨테이너선이 여러 척 정박해 있었다. - P37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알아듣기 쉬워졌다. 아마도 자동차 지붕에 확성기를없고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오는 모양이다(서두르는 기색은 전혀없었다). 이윽고 그것이 기독교 선교 차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P37

벤치에 앉은 채 나는 그 메시지에 귀기울였다. 그리고 왜 이렇게 인적 없는 산 위의 주택가에서 신교 활동을 하는 긴지 의문을 가졌다. 이 일대에 사는 건 자동차를 몇 대씩 소유한 유복한사람들뿐이다. - P38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 구원을 청하고, 스스로 저지른 죄를회개하는 사람은, 주님께 용서를 받습니다. 지옥불을 면할 수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을 믿는 자만이 사후에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그 기독교 선교 차량이 눈앞 도로에 모습을 드러내고 사후 심판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 P38

확성기 목소리는 이쪽으로 다가오는가 싶다가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다시 작고 희미해지더니, 결국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P38

아니면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참을 수 없을 만큼 나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리사이틀 초대장을 보내고, 내가 속아넘어가는것을 보면서 (라기보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상상하면서) 어디선가 혼자 소리 없이 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 P39

하지만 사람이 그저 악의만으로 이만큼 치밀하게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을까? 엽서 인쇄만 해도 제법 손이 갔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사람이 심술궂어질 수 있을까? 그녀에게 미움을 살 만한짓을 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 P39

당시에는 일 년에 한두 번 그런 증세가 덮쳐오곤 했다. 아마도스트레스성 과호흡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뭔가 마음이 혼란해지는 일이 생기면 기도가 막힌 것처럼 폐에 공기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 P40

.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감고 몸이 정상적인 리듬을 되찾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증세는 크면서 조금씩 사라졌지만(그러고 보니 얼굴이빨개지는 일도 어느새 없어졌다), 십대 무렵의 나는 여러모로 성가신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 같다. - P40

 십대 소년에게 노인의 나이를 가늠하기란 간단하지 않다. 다들 그저 똑같은 노인으로만 보인다. 예순이건 일흔이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들은 우리와 달리 더이상 젊지않다그저 그뿐이다. 노인은 중키에 야윈 편이고 청회색 털 카디건에 밤색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남색 운동회를 신고 있었다.
어느 것이나 새것이었던 시절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난 듯했다. 하지만 허름해 보이지는 않았다. - P41

안경은 쓰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보아하니꽤 긴 시간 내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기미가 느껴졌다. - P41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단단히 접힌 검은색 장우산을 지팡이처럼 양손으로 틀어쥐고 있었다.
황갈색 나무 손잡이가 달린 튼튼해 보이는 우산으로, 여차하면 무기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마 근처에 사는 노인인가보다. 우산 말고는 아무것도 손에 들고 있지 않았으니까. - P42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
나는 똑바로 고개를 들고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이마가 이상하게 넓고 코가 뾰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새부리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다. - P42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당연히 나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이남자가 좀전의 기독교 선교 차량을 몰았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여기서 잠깐 쉬는 게 아닐까? - P43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지만 예의상 한번 생각해보았다.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그런 것을 그려보기란 불가능했다.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노인은 침묵한 채 가만히 내 쪽을 보았다. - P43

"그런 원이 정말 실제로 있나요?" 내가 물었다.
"있다마다." 노인이 말하고는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원은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누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
"어르신한테는 보이나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 P44

 그러고는 행을 바꾸듯 간결하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크림?" - P44

"자, 생각해보게나." 노인이 말했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하는 거야.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 거라고. 비슬비슬 늘어져 있으면 못써,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 머리와 마음이 다져지고 빚어져가는 시기니까." - P45

하지만 아무리 진지하게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없었다. 내가 아는 원이란 일정한 중심을 놓고 거기서부터 등거리에 있는 점을 연결한 곡선의 둘레를 지니는 도형이었다. - P45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똑같은 곳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중심이 여럿 (혹은 무수히 있는 원이, 어떻게하나의 원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고도의 철학적 비유 같은 것일까? 나는 단념하고 눈을 떴다. 더 많은 실마리가 필요했다. - P46

하지만 노인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처음부터 그린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내가 환영을 본 걸까? - P46

 항구의 상공에서는 그때까지 촘촘히 뒤덮였던 잿빛 구름이 군데군데 갈라지기 시작했다. 작게 벌어진 구름 틈새로 한줄기 빛이 내려와 크레인 창고의 알루미늄 지붕을 반짝였다. 마치 그 한 점을 정확히 조준한 것처럼.  - P46

내 옆에는 셀로판지에 싸인 작고 빨간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날 나에게 일어난 일련의 기묘한 사건의 소소한 증거물처럼.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결국 정자 벤치 위에 두고 가기로 했다. - P47

그 늦가을의 일요일 오후, 내가 고베의 산 위에서 맞닥뜨렸던기묘한 상황 - 내 앞으로 온초대장의 지시에 따라 연주회장으로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렇게 불가사의한 사태가 벌어졌는지, 그는 그것을 묻고 있다. - P47

그때 일어났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이었고, 열여덟 살의 나를 깊은 당혹과 혼란에 빠뜨렸다. 잠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정도로. - P48

"나도 물론 그때는 무척 신경쓰였어." 내가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곱씹어보았지. 상처도 받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시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라고." - P48

아는 동생은 한동안 말없이 그 커다란 파도를 생각한다. 경력이 오랜 서퍼인지라 파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가많은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하지만 아무 생각 안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죠."
"그렇지, 쉽지 않을 거야." - P49

"그래서, 그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말인데요." 아는 동생이 마지막에 묻는다. "해답이라 할 만한 건찾았어요?"
"글쎄." 내가 말한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글쎄. - P49

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P50

 가을이 끝나가는 흐린 일요일 오후, 고베의 산 위에서 그때 나는 작고 빨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 특별한 원에 대해, 혹은 하찮고 시시한 것에 대해, 그리고 또 내 안에 있을 특별한 크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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