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유전적인 가치보다 환경적인 요인이 중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마르크스적인 사상이라는 것이 올바른 추론인지는 모르겠다.

1943년 1월 26일, 러시아의 유명한 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가 소련의 감옥에서 죽었다. 조국과 세계를 위해 평생을 바친뒤에 굶어 죽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특히 끔찍하다. 유전학자이자 농학자였던 그는 식물 육종가들이 주요 식량 작물이 진화한 최초의 지리적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통찰을 얻었다. - P21
바빌로프의 이야기는 과학에서 가치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조국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도 결국 감옥에 가게 된이유는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유전학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 P21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이 야심차게 추진했지만 실패한 집단농장 사업의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하기도 했다. - P21
바빌로프와 콜본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 책을 통해 함께 탐구할 두 가지 주요 질문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첫째, 가치는 어떤 방식으로 과학적 추론에 영향을 주는가? 둘째, 그러한 영향이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P22
러시아 국민을 도울 농업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바빌로프는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200회 이상의 탐험을 했고, 수십만 개의 식물에서 씨앗을 채취했다. - P22
1927년에는 아비시니아(오늘날의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를 여행했다. 이 탐험에서 일행은 감시병들에게 브랜디를 선물해 그들이 취해 잠들었을 때 몰래 도망친 적도 있다. - P23
바빌로프의 연구는 소련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26년에 그는 과학 활동에 주어지는 소련 최고의 상인 레닌상을 받았다. 1929년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최연소 정회원으로 선출되었고, 레닌농업아카데미 원장이 되었다. - P23
그는 레닌그라드에 25만 개 이상의 표본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종자은행을 만들었고, 그가 감독하는 소련 전역의 300개 실험장에서새로운 식물 품종을 시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레닌그라드를 포위해서 도시 주민들이 굶주릴 때도 바빌로프 연구소의 직원들은 씨앗을 충실히 지켰고, 일부 직원들은 굶으면서도 수집한 표본을 끝까지 건드리지 않았다. - P23
스탈린의 정책은 실패했고, 그렇지 않아도 소련을 괴롭히던 식량사정은 훨씬 더 나빠졌다. 스탈린정부는 바빌로프에게 농업 수확량을 최대한 빨리 늘리라고 압박했지만, 바빌로프는 육종 기술로 이끌어낼 수 있는 발전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저항했다. - P24
바빌로프는 리센코의 연구에 감탄했지만, 바빌로프와 동료농학자들은 리센코의 연구가 오류이거나 과장되었거나 심지어 속임수일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센코의 방법은 유전적 형질보다 환경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집권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매우 잘 어울렸다. - P24
오랫동안 바빌로프는 리센코와 잘 지내려고 노력했고, 농업과학에 대한 리센코의 환경적 접근이 바빌로프가 추구하던 유전적 번식 전략과 보완적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바빌로프를 따르는 여러 동료 유전학자들은 리센코를 비판했다. 리센코는 소련의 서열 체계에서 점점 더 권력을 얻으면서 유전학 분야가 과학에 대한, 잘못된 서구적 ‘부르주아적‘ 접근이라고 공격했다. - P25
몇몇 유전학자가 처형되었지만, 바빌로프는 한동안 자유로웠다. 바빌로프의 국제적 명성이 도움이 되었고, 스탈린이 자신의 공포 정치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는 결국 바빌로프가 우크라이나 서부로 탐사 여행을 떠나있는 동안 그를 조용히 체포할 음모를 꾸몄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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