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처음으로 헬스클럽 체인 사업을 시작한 사업가 중 한사람인 빅 태니는 "전성기의 그리멕은 거의 우상이었습니다. 근육은 더 커질 수도 있고 줄어들수도 있지만, 그리 같은 사람은 다시 없었습니다." 태니는 존 그리멕을 열렬히 숭배했다. - P318
그리멕의 유명한사진 중에 아주 짧은 트렁크를 입고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왼팔을 불끈 치켜들고 오른쪽 다리를 슬쩍 구부린 포즈로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 사진을 보면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보인다. 호프먼은 이 사진을 《스트렝스 앤드 헬스》 1945년 9월호 표지에 실었다. - P318
1950년대 영양 보조제 시장은 거의 호프먼이 독식을 하고있었다. 그동안 그는 비타민 미네랄 식품 보조제, 하이 프로틴 퍼지, 하이 프로틴 바, 프로타민정 등을 팔아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모든 제품들이 근육의 성장을 도와주는 보조제라고 호프먼은 설명했다. 하이 프로틴과 슈퍼 하이 프로틴 영양 보조제는 분말 제품과 알약제품이 있었는데,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다. 《스트렝스 앤드 헬스는 그 영양보조제의 효과를 실증하는 사례로 호프먼의 보디빌더들 사진이 실렸다. - P318
호프먼은 이 다이어트 및 영양보조제들이 노화까지 예방해 준다고주장했다. 『고단백 조리법 (High Prolvin Recipe Book)』이라는 책에서 그는 ‘단백질 부족은 노화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 P319
캘리포니아 의과대학의 필립 라시 교수는 근력 훈련 연구에서 단백질 보조제는 플라시보 효과 이상의 효과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호프먼은 라시의 연구 방법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한 결과가 나왔을 뿐, 자신의 운동선수들은 확실한 효과를 보았다고 반격했다. - P319
라시는 그토록 자신이있다면 더 규모가 큰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8,000달러의 연구 자금을 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페어의 말에 따르면 라시의 연구 결과가자신에게 유리하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던 호프먼이 라시의 요구를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 P319
그러다가 1982년 드디어 그에게 큰 곤경이 닥쳤다. 식품의약국은 호프먼에게 그가 생산하는 영양보조제 포장에서 보디빌더들의 사진을 삭제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 P319
그러나 호프먼에게도 의회 쪽 연줄이 있었다. 그의 연줄 중 하나였던 미주리 주 상원의원 에드워드 롱은 "식품 의약국의 주장은 퀘이커 오트밀 포장 상자에서 퀘이커 교도들의 사진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과 똑같다. 식품의약국은 왜 본연의 업무에 매진하지 않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식품의약국의 명령을 비난했다. - P320
산타모니카의 아름다운 해변을 무대로 젊은 남녀가 모여 역기 운동이나 곡예에 가까운 기계 체조, 즉 물구나무서기, 텀블링 등의축제를 벌였던 것이다. 이들이 모이는 산타모니카 해변은 ‘머슬 비치‘ 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절정을 이루던 1950년대에는 정기적으로 수천 명의 관중을 끌어 모으며 보디빌딩 연기를 보여 주는 몇명의 젊은 보디빌더들이 있었다. - P320
머슬 비치의 인기 비결은 그것이 완전히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데 있었다. (중략)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각자 바벨이나 링을 가지고 오고, 또 스스로 가설 무대를 지어서 역기 운동을 실연하고 솜씨를 뽐냈다. 산타모니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할리우드도 머슬 비치의 축제를 더욱 뜨겁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엑스트라가 필요한 영화제작자는 머슬 비치로 직접 나와서 젊은 운동선수들을 데려갔다. - P320
아무리 캘리포니아라고는 하지만 머슬 비치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고, 캘리포니아의 해변 문화가 창조되는 데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 P321
그리고 체육관은 곧 보디빌딩을 하는 장소라는 인식이 생겼다. 골드 짐을 설립했다가 매각하고 월드 짐을 설립한 조 골드 역시 머슬 비치의 단골손님이었다. - P321
머슬 비치의 단골손님 중의 또 한 사람, 퍼지 스톡턴은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 머리 아가씨로 캘리포니아 여성의 상징이었다. - P321
그러나 역도가 궁극적으로는 더 날씬하고 탄탄한 몸매를 만들어 줄 것이라는 레스의 줄기찬 설득에 역도를 시작했고, 결국 레스의 말처럼 머슬 비치가 이상적으로 표방하는 미인의표본이 되었다. - P322
그러나 머슬 비치의 인기는 1959년에 된서리를 맞았다. 한 보디빌더가 어린 소녀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등, 분위기가 점점 퇴폐해져 갔기때문이었다. 요즘에는 머슬 비치로 알려졌던 장소에 "20세기 피트니스붐의 진원지"라는 팻말 하나만 꽂혀 있다. - P323
역기 운동과 관련된 사업에 있어서는 와이더는 물론이고 누구도 감히 호프먼과 대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와이더는 또 하나의 틈새시장을 발견하고 그 시장을 석권했다. 그가 눈독을 들인 틈새는 보디빌딩, 즉 근육을 기능적으로만 발달시키는 것이아니라 아름답게 발달시키는 운동이었다. - P323
와이더는 머슬 비치 출신의 보디빌더를 비롯한 다양한 보디빌더들의 스폰서가 되어 주면서 각종 보디빌딩 대회를 후원하거나주최하는 주요 인사가 되었다. - P323
"나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기록 갱신을 원하는 사람과, 자신의 몸을더 멋진 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 어느쪽이 더 숫자가 많겠는가? 역도 대회에서 남보다 더 무거운 역기를 들어 올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면, 자기 몸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하는 사람은 100명 있을 것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와이더가 말했습니다. - P323
와이더는 과학적인 신뢰를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 유니온 시티에있는 자기 회사 본사 안에 ‘와이더 리서치 클리닉‘ 이라는 새로운 병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와이더의 과학 자문위원 중 한 사람이었고 맥길대학교 교수였던 E. M. 올릭조차도 그런 병원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고솔직히 털어놓았다. - P324
호프먼이 조직한 역도 선수들의 연합인 아마추어 체육 선수 연맹에 대항할 만한 보디빌딩 연합을 결성하자는 생각을 처음 해낸 것도 올릭이었다. - P324
보디빌더들을 후원하고, 잡지에 그들의 사진을 실었다. 와이더가 내는 잡지는 수가 점점 늘어 나중에는 잠시 왕국을 이룰 정도였다. 《머슬 앤드 피트니스》, 《머슬 앤드 피트니스 허스》, 《플렉스》, 《멘스 피트니스》, 《셰이프》, 《피트 프레그넌시》, 《내추럴 헬스》가 모두 와이더가 발행하는 잡지였다. - P325
아마추어 체육 선수 연맹에서는 보디빌딩 대회에서 근육을 자랑하는 것 외에도 운동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규칙을 세웠다. "보디빌딩 대회에 참가하려면 고교 시절 축구선수로활동했다는 증명서나 그 당시 입었던 유니폼 같은 것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었죠." 토드가 말했다. - P325
호프먼은 자신이 발행하는 잡지들을 통해, 오로지 아름다운 몸매를갖기 위해 근육을 다진다는 남성들에 대해 한껏 조롱하는 투로 글을썼다. - P325
와이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두사람의 다툼이 법정으로까지 비화된 1958년까지는 와이더도 자기 잡지를 통해 호프먼을 맹렬히 비난했다. - P326
결국 1965년까지 끈 두 사람의 법정 공방은 호프먼의 승리로 끝났다. 법원은 와이더에게 1달러의 손해 배상금을 호프먼에게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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