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힘들다.





나는 시원하게 늘어선 소나무들을 보고, 신선한 나무타르 냄새를 맡고, 녹조류 빛깔의 호숫물을 살갗에 느끼고, 조 외삼촌이 만든 갓 짠 레몬즙을 넣은 아이스티 맛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흐릿하고 막연하다.
나는 어머니의 시신을 본 적이 없었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가 없었다. - P79

그로부터 30년이지나,조외삼촌의 아흔 살 생일파티에서 친척 한 명이 내게 말해주었다. 내가 수영장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 중 하나였다고 말이다. 최초의 충격 - 아냐, 발견한 건 펄 이모고, 나는 자고 있었어. 난 아무 기억도 없단 말이야-이 가신 뒤, 나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 P79

 이제 새로운정보로 인해 모든 조각이 끼워맞춰졌다. 어쩌면 잃었다 되찾은 이 기억이 기억 왜곡에 대한 내 집착, 강박적인 일중독, 안전과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내 갈망을 설명해줄지도 몰랐다. - P80

나의 이런 기억은 사흘 동안 몸집을 불려갔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 남동생이 전화를 걸어와, 외삼촌이 사실을 확인해보더니 자기가실수했음을 깨달았다는 말을 전했다. 외삼촌의 기억이 잠시 착각을 일으켰다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다른 친척들도 확인해준 결과) 펄 이모가수영장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P80

 그 기억이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 나는 내가 꾸며낸 이야기적 진실의 생생한 색채와 화술에 묘한 동경을 느꼈다. 정교하지만 완전히 날조된 그 기억은 모호함이라고는 없는 상세함과 정밀함으로 내게 위안을 주었다. 적어도 나는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았다.  - P80

이 살인사건은 20년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억압‘ 이일상어가 되고 에일린 프랭클린이 하룻밤 새 유명인사가 된 한 소송사건에서, 51세의 조지 프랭클린 Geonge Franklin이 수전 네이슨의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유일한 증거는 딸 에일린의 증언이었다. 에일린은 살인을목격했으나 20년 넘게 그 기억을 억압해왔다고 증언했다. - P81

에일린은 마음속에 퍼뜩 떠오른* 생생한 장면 속에서, 제일 친한 친구였던 여덟 살짜리 수전 네이슨이 숲을 배경으로 어느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수전의 뒤로, 무거운 돌을 머리 위로 치켜든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 P82

에일린은 그렇게 퍼뜩 떠오른 강렬한 기억을 통해 잊었던 과거와 대면했다고 믿었다. 자신이 가장 친한 친구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온 삶의 3분의 2에 달하는 20년 동안 묻혀 있던 기억이 예고도 없이 되돌아왔다고 말이다. - P82

그것은 수전을 살해한 남자가 바로 에일린의 아버지 조지 프랭클린이라는 사실이었다. - P83

그 후로 넉 달 동안, 에일린은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의식의 수면 아래로 밀어넣으려 해도 기억은 계속 위로 떠올랐고 점점 더 구체성과 정확성을 갖춰나갔다. - P83

 지방검사보인 마티머레이는 에일린이 살인사건에 관한 상세한 내용까지 알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의 이야기가 조사에착수해도 될 만큼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로버트 모스브라이언 카산드로라는 형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되었다. - P83

1989년 11월 25일, 에일린 프랭클린은 모스, 카산드로 형사와 거실에 앉아, 결국 강간과 살인으로 끝나버린 즐거운 나들이의 기억에 관해 자세히 진술했다. 그녀의 기억은 색깔, 소리, 질감, 감정, 주고받은 말 한 마디까지 완벽했다. - P83

조지 프랭클린은 에일린과 수전을 태우고 한동안 달리다 초등학교앞에서 그들을 내려줄 것처럼 잠깐 멈췄지만, 내려주는 대신 오늘 학교를 빼먹게 될 거라고 말했다. 차는 계속 달려 하프문베이의 구릉지대로 접어들더니 고속도로를 벗어나 어느 숲 지대에 멈췄다. - P84

에일린은 아버지가 수전과 일을 끝낼 때까지 그 옆에 몸을 둥글게말고 앉아 있었다. 에일린은 울고 있는 수전과 함께 밴에서 내렸다. - P84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수전을 땅바닥에 내꽂고 수전의 얼굴을 나뭇잎더미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에일린에게는 발설하면 죽이겠다고, 또 말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뿐더러 그녀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을거라고 했다. 에일린이 비명을 그치자, 아버지는 그녀를 자기 무릎에 앉히더니 다 잊어버리라고, 이제 다 끝났다고 말했다. - P85

에일린이 이야기를 마친 뒤 형사들은 좀 더 자세한 질문을 했고, 에일린의 대답은 더욱 놀라운 구체성을 보여주었다. 주위에 나무가 많았나요? "적당히 울창한 정도"였는데, 오른편에 "지그재그 형태로" 붙어서 있는 세 그루의 나무가 있고 그 너머로 더 많은 나무들이 있었어요. - P85

 아버지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죠? 리바이스의 황갈색 코듀로이 바지와 펜들턴 울 셔츠, 그 밑에 깃 없는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어요. 아버지의 머리색은 어땠나요? "갈색에가까운 붉은색에 회색이 약간 섞여 있었어요." 수전은 성폭행당하면서
"무슨 말을 했나요? "싫어요", 그리고 "그만해요"라고 했어요. - P86

"제가 용의자입니까?" 프랭클린이 물었고, 카산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변호사가 필요할까요?" 프랭클린의 두 번째 질문이었다.
형사들에게 확신을 준 것은 프랭클린의 세번째 질문이었다. "제 딸과 얘기하셨습니까?" 라고 프랭클린이 물었던 것이다. - P86

1989년 11월 28일, 조지 프랭클린은 수전 네이슨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유일한 증거는 자기 딸의 기억이었다. - P87

게다가 흔적도 없이 묻혀 있다가 최근에야 되찾은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다니. 그런 기억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검찰은어떻게 보강증거도 없는 20년 묵은 기억을 유일한 증거로 삼아 한 남자를 기소했을까? - P87

 한편 변호인 측은 그 기억이 사실 (수전 네이슨이 살해됐다)과 상상 (에일린 프랭클린이 살인을 목격했다)으로 뒤섞인 믿을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전문가 증인으로서 내가 할 일은 기억이 형성되고 왜곡되는 기본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 P88

"에일린이 형사에게 말한 모든 내용은 수전이 실종되고 두 달 뒤 시신이 발견되던 당시 신문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혼그래드가 대답했다. 그는 내가 에일린의 진술과 당시 지역신문에 보도된 사실들을 대조해볼 수 있도록 신문기사와 에일린의 예비 진술을 보내주기로 했다. - P88

신문기사들은 사건을 숨김없이 보도하고 있었다. 에일린이 예비 진술에서 말한 내용은 보도된 사실들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실종된지 3개월 뒤, 수전의 시신은 크리스털스프링스 저수지 상류 쪽 고속도로 대피소 부근에 있는 가파른 제방 밑의 울창한 관목숲 속 매트리스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 P89

 그러나 널리 보도된 이런 사실들 중 몇 가지는 완전히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사실 수전은 두 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은새 인디언반지, 왼손에는 토파즈가 박힌 금반지였다. 그런데 어느 신문이 두 반지를 혼동해 은반지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고 보도했다. - P89

"시신 위에 돌을 얹었다."는 진술도 발표되고 알려진 사실과 부합한다. 수전이 입은 옷의 접힌 부분에서 돌 하나가 발견되었고 시신 옆에서 그보다 더 큰 돌 하나가 발견되었다. 병리학자에 의하면 살인흉기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르는 돌들이었다. 그렇다면 일찍이 모스 형사와카산드로 형사에게 자세히 진술할 때는 왜 그 얘기를 빼먹었을까?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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