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의 즐거움 『길가메시 대서사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그리스 서정시인들 호라티우스의 『송시』 『베오울프』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 『거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 제프리 초소의 『캔터베리 이야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존던 『킹 제임스 성경-시편』 존 밀턴의 『실낙원』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노래 •경험의 노래』 윌리엄 워즈워스 제뮤얼 테일러 콜리지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앨프리드 테니슨 경 월트 휘트먼 에밀리 디킨슨 크리스티나 로세티 제라드 맨리 홉킨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폴 로렌스 던바 로버트 프로스트 칼 샌드버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에즈라 파운드 T. S. 엘리엇 랭스턴 휴스 W. H. 모든 - P515
‘시‘란 규정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광범위한 말이다. ‘시‘는 로버프로스트의 시 「자작나무」에 나오는 것처럼 상당히 직접적으로 보이는 단어가 결합되기도 한다. - P518
시는 역사처럼 과거의 한 면모를 연대순으로 기록할 수 있고, 소설 기능을 흉내 내서 한 인물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 P519
소설과 자서전, 역사 그리고 대부분의 희곡은 산문이다. 시와 운문은 각각 서로를 정의하는 말이다. 문학적인 이름표로서 ‘시‘란 대부분 ‘산문이 아닌 것‘을 의미한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 P520
시는 잠망경을 통해 관찰되는 무엇, 즉 시가 포착하려는 감각이나 분위기 혹은 문제, 사람, 나무, 숲, 강등의 ‘사물‘의 속을 들여다보는 관찰자(독자)를 언제나 연루시킨다. 하지만 시의 대상은 관찰자의 눈에 대상자체를 직접 각인시키지는 않는다. - P520
‘잠망경‘ 중 두 개의 거울은 시인과 시적 언어다. 한 편의 시에서 시인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의 정신과 정서, 경험은 시의 일부가 된다. 소설가나 희곡 작가는 종종 시선 밖에 머무르려 한다. - P520
오스턴의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 베넷은 지금 막 다아시의 거만한 청혼을 거절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머리를 식히려고 산책을 나선다. - P521
골목길 외진 곳을 따라 두세 차례 거닐다가 아침이 주는 상쾌함에 이끌려 공원 입구에 멈춰 서서 안쪽을 들여다봤다. 켄트에서 지낸 지도 어느덧 5주가 흐른 사이에 시골 풍경도 크게 변했고 어린 묘목들은 나날이 푸르름을 더해 가고 있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엘리자베스는 공원 가장자리에 있는 숲이라고 부를 만한 녹지에서 어떤 신사의 모습을 흘긋 봤다. 남자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으나, 다아시 씨일까 겁먹은그녀는 얼른 몸을 뺐다. 하지만 다가오던 사람 쪽에서 이제는 엘리자베스가보일 만큼 가까웠던 까닭에 길음을 앞으로 옮겨 소리 내어 이름을 외쳤다. 이미 돌아섰던 엘리자베스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다아시 씨의 목소리가 분명한데도 입구 쪽으로 길음을 재촉했다. 그때 다아시 씨도입구에 다다랐던 터라 편지 한 통을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편지를 받았다. 다아시 씨는 오만해 보일 만큼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숲에서 잠시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편지를 읽어 주시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다아시 씨는고개를 까딱하며 인사를 건넨 다음 숲으로 돌아섰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산문이다. - P521
술에 기대어 앉아 있다 보니 천 가지 뒤섞인 틈틈이 들리는데 그 달콤한 분위기에서 기쁜 생각은 슬픈 생각을 불러왔다.
(중략)
이런 믿음이 하늘에서 내려왔고 이런 것이 자연의 거룩한 뜻이라면 인간이 만든 것을 슬퍼해야 하지 않을까? - P523
잠망경으로 내부까지 뚫어지게 보면서 독자는 나뭇가지와 새 앵초꽃 덤불을 본다. 워즈워스 자신은 숲 한가운데 드러누워 ‘인간이 만든것‘을 애도하고 있다. 시인의 감각과 시인의 지각, 시인의 결론은 그 장면의 직물을 완전히 통과하며 짜여졌다. - P523
시인의 존재는 시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시인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애써 의식적으로 표현한 시에서조차 그렇다. 다음은 마크 스트랜드가1980년에 쓴 시 「그대로 두기 위하여」이다.
들판에서 나만이 들판에 없다. 언제나 그렇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만이 빠졌다. - P524
이런 존재로 인해 시인은 자기 작품의 주제에 대하여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시는 언제나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오히려 시인은 세 가지입장 중 하나를 취한다. - P524
시인은 자기 바깐으로부터 무언가를 기원하거나 자신이 느긋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무관하게 존재하거나, 이 세계에서는 불쾌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자신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진리를 향한 물길을 내는 것이다. 즉 시인은 외부의 어떤 힘을 목격하며 서 있다. - P524
시는 모두 신이나 사랑, 우울에 관한 것이다. 잠망경의 둘째 ‘거울‘은 언어다. 시의 언어는 자의식적으로 형식적이다. 즉 각각의 시에서 형식(시의 언어, 언어의 배치와 순서)은 시의 관념과 분리될 수 없다. 산문의 언어와 관념은 그보다 헐겁게 연결된다. - P525
하지만 시는 원래의 언어를 간직하는 범위에서만 시다. 『오만과 편견』을 여섯 시간짜리 영화로 각색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제인 오스틴이지만, 〔그대로 두기 위하여」를 그렇게 각색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마크 스트랜드가 아니다. 시인의 언어는 의미가 비춰지는 투명한 창이 결코 아니다. 한 편의 시에서는 언어가 의미다. - P525
"시는 삶의 모가지를 틀어쥐는 방법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시는 흡사 농담과 같다. 농담의 마무리로 단어 하나를 잘못 선택하면 전체 의미를 몽땅 잃어버린다." (W.S. 머윈) - P526
"시는 사랑과 같다. 그것과 부딪히면 기쁨을 경험하니까 알아보기 만족스러운 정의로 납작하게 고정해 두기는 아주 어렵다." (마리 폰소)
"시는 수천 년을 끊기지 않고 방송할 수 있는 라디오와 같다."(앨런 긴즈버그) - P526
의 시가 이런 모든 기교와 그 이상의 것을 사용하는 데도, 이런 독특한 시적 기교로 시를 특징짓지 않는다. 시적 언어의 관습은 세기가 바뀌면서 변하기 때문이다. - P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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