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했어요? 민서진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보호자가 알기 전에로운이를 빨리 요양원에 돌려놓아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할 터였다. 선준은 아랫입술을 핥았다. "죄송해요. 조금 일이 있어서・・・・・・ . 곧 출발할 겁니다." - P78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애를 데리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대답도 잘 안 하고 그래서……." -놀랐잖아요. 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해서요. "또라뇨?" - P79
-원래는 안 되지만, 말해줄게요. 선준 씨가 여기까지 로운이를 데려오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사실 로운이는 자해가 심해서 입원한 아이예요. "자해요?" - P79
쓰레기로 어지러운 거실에서 넘어지면서 테이블에 부딪혀 열여섯 바늘이나 꿰맸다. 그때 놀라서 어쩔 줄 몰라하던 엄마의 모습이로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때부터 자해 증상이 생겼고, 점점 그 정도가 심해졌다. - P80
민서진은 로운이 기도원에 들어갔었던 일에 관해서는 모르는것 같았다. -결국 엄마의 무관심이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거나 다름없죠. - P80
이제는 생경해진 얼굴이었다. 선준은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성마른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기다린 것도 대단히 참을성을 발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옆에 그 애 있어?" -어 있어. 걱정 마. 어떻게 됐냐니까? - P81
- 말해. 어떻게 됐어? 그는 가감 없이 여자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돈을 요구한 것. 그리고 로운의 자해 증상과 지금 자신이 혼란스러운것까지. 들려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예원도 뭔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선준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예원이 침묵을 깼다. -돈 준비하자. - P81
"이미 집 대출은 한도까지 받았잖아. 잊었어?" 선우를 찾느라 선준은 회사를 휴직했었다. 모아놓은 돈은 바닥났고 대출까지 받았다. 전단지를 제작했고, 선우의 얼굴 변화를 분석한 몽타주를 제작하기 위해 사설 업체에 의뢰했다. 연락이 오는 전국 어디든 달려갔다. 선우를 찾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먹고, 살아야만 했다. 여기저기서 끌어온 돈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회사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선우를 찾기 위해, 선우를 찾는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 P82
하지만.…………. 이번엔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그 기저에 경찰이 발견했다는 시신의 존재가 깔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온 다음 확인해도 안 늦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쓰레기일까. "차라리 경찰에 얘기해서 확인해볼까?" - P82
경찰들은 선우를 찾아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두 사람을 앉혀놓고 질문에 질문을 이어갔다. 선우가 실종된 것이 두 사람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증거를 찾고 싶은 사람들 같았다. - P83
양 형사가 의자를 끌어내 털퍼덕 앉았다. 선준에게는 의자를 내어주지 않았다. 선준은 양 형사 앞에 선 채로 계좌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내놓았다. "이 계좌번호를 추적하면 소유자의 주소 같은 걸 알 수 있지 않을까요?" - P85
"이런 사이비들 뻔하지, 뭘 그런 거에 속아요? 애들 앞세워 이선준 씨 같은 사람들 관심 끌고, 그다음에 돈 받아내고, 점점 더크게 뜯어내 재산 탕진시키고 끝! 장사 하루 이틀 해요?" "장사요?" 선준의 눈썹 끝이 스윽 올라갔다. - P85
"부탁할게 있어서." 정세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는 것을 선준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정세는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뭔데? 뭐든지 말해. 돈 부탁만 아니면." 그는 웃었다. 선준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P88
[죄송합니다. 선우 관련된 제보가 있어서 확인하느라 늦었습니다. 로운이는 잘 데리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출발할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했을 때 메시지 알림음이 들렸다. 예상했던대로 민서진의 답장이었다. [오늘 안에 데려오지 않으면 유괴로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 P89
"돈 나올 구멍이 어디 있어?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잊었어? 이젠 돈 빌릴 데도 없어." 전화기 너머의 예원은 조용했다. 그러면 지금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느냐고 소리칠 줄 알았으나 그녀는 침묵을 선택한 듯했다. - P90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무의식적으로 선준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베란다가 주차장으로 나 있는 데다 3층이라 금방 눈에 들어왔다. 다 죽어버린 회분이 베란다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 P91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뭐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선준은 곧 베란다 창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장 근처가 서걱거렸다. 불안감을 증폭시키려는 것처럼 예원이 베란다로 나왔다. - P91
그때였다. 이불이 크게 펄럭이며 호를 그었다. 예원의 몸이 이불을 따라 허공에 빨려 들었다. 달려가는 선준의 눈앞에서 예원이 추락했다. - P92
-돈 나올 구멍이 어디 있어?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잊었어? 이젠 돈 빌릴 데도 없어. 선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집을 담보로 받은 대출 이자는 벌써 세달째 연체 중이었다. 선준이 일을 하지 못한 기간 동안 주변에 빌린 돈만 해도 셀 수가 없었다. - P93
날이 선 선준의 말투도 이해가 되었다. 일하러 다니기 시작한 선준을 비난해왔다. 사실은 그저 화풀이일 뿐이었다. - P93
‘관심받고 싶어서 자해를 하는 아이‘ "로운아." 물방울을 만지던 로운이 큰 눈을 치켜떴다. "내가 가자고 했을 때, 왜 나 따라왔어?" - P94
휘둥그레졌던 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작은 눈 끝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이답지 않은 미소였다. "따뜻해서." - P94
‘관심받고 싶어서 자해를 하는 아이.‘ 예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거짓말이어서는 안 된다. 예원은 다시 로운에게 물었다. "정말로 우리 선우, 네가 본거지?" - P95
선준에게 돈을 요구하는 사이비 종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막막한 기분보다는 오히려 눈앞이 훤히 뜨이는 것 같았다. 들어가는 데만도 돈을 요구하는 사이비 종교라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 - P96
필요한 건 돈이었다. "잠깐만 여기에 있어."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로운을 앉혀두고 예원은 방으로 들어갔다. 화장대 아래 서랍을 열어 두 개의 파일을 꺼냈다. 보험 서류였다. 이미 보험금을 담보로 대출을 최대한 받아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 P96
선준은 예원이 선우의 옷을 사다 두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 말라는 싸움 끝에 선준은 죽은 아이를 기리는 것 같아서 싫다고 했다. - P97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선우의 흔적이 아니라 선우였다. "이거 가지고 안방에 들어가서 놀고 있어." 로운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아이가 가지고 놀던 물방울은 흔적도 없이 말라 있었다. 예원은 다시 색종이 묶음을 내밀었다. "우리 선우는 개구리 잘 접었는데. 개구리 접을 줄 알아?"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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