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파티에 관해서 이모리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 당일까지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리오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람처럼 뛰어갔다. 깜짝 파티? 다른 사람에게 한 이야기를 내게 했다고 착각한 거구나. 하지만뭐, 흰토끼라면 그렇게 어벙한 짓을 할 만도 하지. - P134
"왜 그럴 필요가 있지?" 체셔 고양이가 물었다. "제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서죠." "그럼 우리가 아니라 미치광이 모자 장수에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에게 알리바이를 제시하기 전에 완벽하게 정리해두고 싶어요. 논리적으로 한 치의 틈도 없도록." - P135
"그리핀은 나랑 빌이 목격한 후에 살해당했어요." "그렇지." 체셔 고양이가 말했다. "바다코끼리와 가짜 거북도 기억난다더군. 너희가 해안에서 떠난 지 약 30분 후에 그들도 그리핀과 헤어졌다." - P136
"애벌레라, 녀석은 괴짜지만 증언은 믿을 수 있지." "해안에서 흰토끼의 집까지 한 30분 걸렸을까요. 그리고 흰토끼의 집에 도착한 지 30분도 넘게 지난 후에 모자 장수와 3월 토끼가 와서 그리핀이 살해당했다고 전했어요. 즉, 무슨 뜻인지 알겠죠?" "모자장수는 고자질을 좋아한다?" 빌이 말했다. - P136
"너희가 흰토끼의 집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시간대에..……" "난 그런 말 안 했어. 앨리스 혼자 주장하는 거라고." 빌이 정정했다. 앨리스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앨리스 혼자 흰토끼의 집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시간대에 공간 왜곡이 일어났어. 때마침 흰토끼의 집과 해안이 이어졌지." - P137
"내가 증언할게요." "네 알리바이를 증명하고자 네 증언을 채택할 수는 없지. 그런 논리는 미치광이 모자 장수에게도 통하지 않을걸." - P137
"모자 장수가 이유를 추측했어." "도대체 뭔데요?" "네가 연쇄살인범이라서 그렇다나 봐, 앨리스." "그거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소리예요." 험프티 덤프티와 그리핀을 잇달아 죽였으니 연쇄살인범이 분명하다고 했어." - P138
빌과 체셔 고양이는 앨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화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빌은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화가 났으니까, 빌." 앨리스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봐요, 그건 순환논법이라고요." - P138
"순환논법이니까요. 순환논법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창조하지 못해요." "어째서 그런데?" "아무리 해도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니까요. 진실인지 거짓인지영원히 판가름할 수 없어요." "미치광이 모자 장수 말로는 영원히 증명을 계속하니까 이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하던데." - P139
"어째서 그렇게 주장하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어요. 앨리스는 연쇄살인범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건 순환논법이야!" 느닷없이 미치광이 모자 장수가 끼어들었다. "순환논법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창조하지 못해!" - P140
빌이 말했다. "미치광이 모자 장수는 미치광이야." "앗! 그거 순환논법이다!" 3월 토끼가 기쁜 듯이 말했다. "조금 달라. 이건 동의어 반복이라고 봐야지." 체셔 고양이가 냉정하게 정정했다. - P140
"범죄의 증명은 수학의 증명과는 달라. 정의와 공리에서 출발하여 추론을 쌓아 올린 증명만이 옳은 건 아니지. 범죄는 단 하나의 물적 증거나 단 한 마디의 증언으로 증명될 때도 있어." "그러니까 증거가 뭔데요?" "흰토끼의 증언이지. 네가 정원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목격했어." - P141
"괜찮아요. 또 다른 흰토끼에게 물어볼 테니까." "말해두겠는데 다른 흰토끼의 증언은 의미가 없어. 다른 인간의 증언이 나나 너의 증언을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똑같아." "다른 토끼의 증언이 아니에요. 그녀 자신의 증언이라고요." "그녀가 아니라 그겠지."3월 토끼가 귓속말을 했다. "야, 성별을 틀렸어. 까딱 잘못하면 굉장한 얼간이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거라고." - P142
"난 여왕 폐하께 네가 범인이라고 보고할 거야.‘ "증거는 흰토끼의 증언뿐인데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거면 충분해. 내가 여왕 폐하께 보고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 "제 목이 댕강 잘리겠죠." - P142
"가능하다면 조사 기간을 무제한으로 해줬으면 좋겠네요." "안 돼. 그랬다가 여왕 폐하께 들키면 내 목이 날아가 여왕 폐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는 게 대략 일주일이거든. 그러니까더 이상은 무리야." - P143
"그러니까, 험프티 덤프티가 살해당한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생각해보라고요." 아리는 리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험프티 덤프티? 아아. 이상한 나라에서 오지 씨가 그거였지." "엄밀하게 말하자면 본인이 아니라 아바타라지만요." - P144
리오는 아리의 뒤쪽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아리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허름한 차림새의 남자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다가왔다. 옷은 지저분했고, 길게 기른 머리는 떡이 졌으며, 수염도 텁수룩했다. 아리는 리오의 팔을 잡고 뒷걸음질 쳤다. - P146
남자는 손에 식칼을 쥐고 있었다. 손에서 놓치지 않도록 테이프로 둘둘 감기까지 했다. 장난이 아니라면 살의가 충분한 셈이다. 아무라도 상관없는 걸까, 아니면 나와 리오 씨를 노린 걸까? 후자라면 이상한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 - P146
그런데 뭐 때문에? 만약 이 남자가 이상한 나라의 누군가라면, 우리를 죽여서 뭔가이득이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누굴까? 진범? - P147
아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바로 옆으로 풀쩍 뛰었다. 남자는 당황하여 아리를 향해 달려왔다. "리오 씨, 도망쳐요!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요!" 아리는 남자에게 등을 돌리고 달음박질했다. - P147
아리는 달리면서 뒤돌아보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에 넘어가 그만 등 뒤를 보고 말았다. 놀랍게도 범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빨랐나? - P148
리오의 모습이 남자에게 가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가 리오에게서 물러났다. 리오는 창백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명치를 양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피가 하얀 옷을 붉게 물들이며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 P148
아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리오는 땅에 푹 고꾸라졌다. "리오씨!" 리오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미안해요!" 아리는 리오의 어깨를 잡았다. "설마 리오 씨를 노리고 있었을 줄은.....…" - P149
"너한테 경고해둬야 할 일이 있어. 더 이상 깊이 파고들면 절대로 안돼" "리오 씨, 뭔가 알고 있는 거예요?" "절대로 못 이겨." "뭘요? 뭐를 못 이기는데요?" "아무도 붉은 왕에게는 절대로 못 이겨" 리오는 눈을 더 크게 부릅떴다. - P149
아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내려고 기를 썼다. 그래, 심폐 소생술을 실시해야 해. 심장 마사지와 인공호흡이야. 양손을 리오의 가슴에 얹고 힘껏 체중을 실었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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