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아까 말한 목록은 완전히 엉터리라는 거네?" "뭐, 그런 셈이지." "사람들한테 느닷없이 ‘스나크는‘이라고 말했어?" "이 암호는 네 전용이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다른 암호를 알려줬어." - P72
"왜, 느닷없이 눈앞의 사람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까 마치 물어본 사람이 잘못했다는 듯이 정색하는 거잖아. 그게 정상이야?" "이상한 나라에서는 늘 그런 식인데." - P73
"암호를 아는 녀석들은 애당초 이 세계의 주민들이니까 돌아가고 자시고 할 것 없다고." "그래도 지구에 있는 동안은 이 세계를 잊어버리고 있을걸."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아주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지가끔 생각나도 그저 꿈으로 치부하기 일쑤고." - P73
"여기서 암호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암호를 알려주는거야." "으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여기서는 이상하다는 취급을 받아도 된다는 거야?" "여기서는 모두 다 이상하니까 별로 상관없어." - P74
"몰랐어. 이모리는 이쪽 세계에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빌은 요 모양이니까." "요 모양이라니?" "많이 모자라." "스스로도 잘 아는구나." - P75
"생각났다. 지금 네가 알려준 정체를 확인하는 방법을 시험하기에 딱 알맞은 인물이." "누군데?" "흰토끼야." "흰토끼?" 앨리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날 목격했다고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이잖아." - P75
"말본새를 보아하니 꽤나 의심하는 것 같은데?" "너랑 흰토끼 중에 누굴 믿느냐는 거지? 넌 분명 내친구야 하지만 휜토끼는 내 고용주거든." "이 이야기에 개인적인 친분이 무슨 상관이야." "그럼 널 안 믿어도 되는 거네?" 빌은 아주 환한 얼굴로 말했다. - P76
흰토끼의 집에 도착하자 마침 현관에서 품에 두꺼운 책을 끌어안은 중년 여자가 나왔다. "어머, 안녕, 빌." "안녕, 메리 앤, 흰토끼는 있어?" "응. 하지만 기분이 좀 안 좋아. 어제 늦게까지 미치광이 모자장수와 3월 토끼에게 신문을 받았다." - P76
메리 앤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미소지었다. "앨리스, 어려운 입장에 처한 모양인데 분명 결백을 입증할 방법이 있을 거야. 힘내." "고마워요. 그런 말을 해준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앨리스는 악수를 청했다. - P77
앨리스는 책등을 슬쩍 확인했다. 네크로 뭐라느니, 에이본 뭐라느니 하는 식으로 라틴어 느낌이 나는 기묘한 제목이 적힌 책뿐이었다. "흰토끼는 이 세계의 여러 비밀을 조사하고 있어." "나도 비밀에는 흥미가 있어. 그래서 앨리스와 함께 있지. 살인사건의 비밀을 알아내면 분명 기분 최고일 거야." 빌이 말했다. - P77
휜토끼는 의자에 앉아 책상에 몸을 수그리고 뭔가 쓰고 있었다. "안녕." 빌이 말을 걸었다. 흰토끼가 고개를 들었다. "돌아왔나?"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기, 뭣좀 물어보려는데 괜찮을까?" 빌이 휜토끼 곁에 섰다. "조금만 기다려. 지금 중요한 보고서를 쓰는 중이거든." - P78
"그러니까 냄새에 의존하지 말고 잘 보이도록 안경을 쓰면 될거 가지고." "안경 같은 걸 쓰면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못 알아보잖아. 그럼 인간이나 마찬가지야." "아아. 그 말을 듣고 생각났다. 지구에서는 너도 인간이잖아." - P79
"이 세계에 한자 같은 건 없어." "그러고보니 그러네. 저기, 지금 나 어느 나라 말로 이야기하고있어?" "일본어가 아닌 건 확실해." 앨리스가 말했다. "빌, 너 일본어할줄 알아?" - P80
"공유는 무슨 빌어먹을 공유! 우연히 우리 셋이 같은 꿈을 꿨을 뿐이야!" "그런 우연이 일어날 리 없죠. 그것도 몇 년이나 계속되다니." "네가 뭐라고 해도 난 안 믿어." "그럼 증명해줄게요." "할 수 있으면 해봐." "우선 당신 이름을 가르쳐줘요." - P81
"지구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죠. 자, 말해봐요." "리오………….: "예?" 앨리스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 P81
"리오………… 다나카 리오." "다나카 리오!" "그래.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야." "아는 사람이야?" 빌이 물었다.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리스가와 아리의 1년 선배에 해당하는 여자야." - P82
"험프티 덤프티가 살해당하기 전에 정원에 들어간 인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무렴 있었지. 그리고 그 녀석은 범행을 저지른 후 정원에서달아났어." "그게 누군데?" "몇 번 물어도 답은 똑같아 들어간 사람은 앨리스 한 명뿐이었어." 토끼는 앨리스를 흘끔 쳐다보았다. "난 결코 거짓말 안해." - P83
"흠." 흰토끼는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빌, 자리를 잠시 비워주지 않겠어?" "알았어. 어느 자리인데?" 빌은 방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이 녀석, 정말로 그 이모리야?" "이모리치고는 너무 얼간이지만 그런가봐요. 당신도 리오 씨랑 별로 안 비슷하잖아요." - P84
"이쪽에게 한마디 해두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이야기인데?" "여기서 그걸 너한테 들려주면 방에서 내보내는 의미가 없다는것도 몰라?" - P84
미치광이 모자장수와 3월 토끼가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이봐, 험프티 덤프티가 살해당한 일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잖아." "그래. 험프티 덤프티에 대해서는 말이지." 모자 장수는 앨리스를 힐끗 흘겨보았다. "이번에는 다른 일이야." - P85
"난 안 죽였다고? 혹시 또 살인사건이 발생했나요?" 앨리스가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여기 왔지. 널 신문해야겠다." 모자 장수가 앨리스를 가리켰다. "방금 전에 그리핀이 살해당했어." - P85
"시노자키 교수님이 돌아가셨대." 다나카 리오가 말했다. "그럼 그분이 그리핀이었나요?" 아리가 물었다. 두 사람은 학생 휴게실 구석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 P86
"아마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겠지. 하기야 누가 고의로 상한 굴을 먹였을 가능성은 있지만." "묘하네요. 굴을 속인 건 바다코끼리였는데." 아리가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먹은 건 그리핀이었지." - P86
"도대체 그 두 마리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는데요?" "그날 둘 다 생일 아닌 날이었다." 아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핀은 왜 안갔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날은 그리핀의 생일 아닌 날이 아니었어." "생일이었구나. 불운한 짐승." - P87
아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가족이야." "너, 아까 혼자 산다고 하지 않았어?" "햄순이는 내 가족이야." "이름을 듣자하니 햄스터?" "응. 맞아." "햄스터랑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글쎄. 한 두세 시간쯤?" - P88
"그리핀이 살해당했어." "그건 알아. 불운한 짐승이지." "시노자키 교수님도 돌아가셨고." "그런가 보더군. 사인도 똑같고 말이야." - P88
"그래서, 모자 장수는 누구를 연쇄살인범으로 생각하는데?" 아리는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물론 앨리스지. 뭐, 험프티 덤프티 살해사건의 용의자니까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그게 정말이라면 범인은 따로 있다는 뜻이로군."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는데, 알리바이의 증인은 너거든?" - P89
"그리핀이 살해당한 당일, 앨리스와 빌은 해안에서 이야기를 나눴어." "그건 어렴풋이 기억나는군.‘ "그리고 앨리스와 빌은 해안에서 그리핀을 목격했어." - P90
"빌이 머저리라는 건 모두 다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빌의 증언은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아." "들으나 마나 한 위안거리를 알려줘서 고마워." "천만의 말씀." "아무튼 빌의 기억도 증언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 새로운 증거를 모으러 시노자키 연구실에 가자." - P93
"어머, 큰일이네. 장례식에 학회도 있구나." 히로야마 부교수의 눈썹이 더더욱 처졌다. "저기, 장례식과 학회는 완전히 다른 범주에 들어갑니다. 친척도 아니니까 장례식에는 조문 예복 차림으로 부의금을 들고 가서 인사하고 오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 P93
"글쎄요. 시노자키 선생님과 같은 급의 다른 분을 새로이 초대할지도 모르고, 저희 쪽에 대리 강연을 의뢰할지도 모르죠." "대리 강연 의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히로야마 선생님이 강연하시는 게 도리상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P94
"누가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이모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옮기지 마. 나, 바쁘다고." 그리고 다바타 조교수에게 말했다. "얘는 4학년이야? 아니면 대학원생?" "글쎄요." "글쎄요라니? 자기 연구실에 소속된 학생이 몇 학년인지도 몰라?" - P95
"어머나, 그러니, 우리 학과 학생이구나. 친구를 찾으러 왔니?" "그게 아니라요. 시노자키 선생님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시노자키 선생님은 돌아가셨어." "압니다." "더 이상 할 말 없는데." "선생님의 사인이 뭔지 아십니까?" - P96
"굴을 과식하셨다고 들었는데." "히로야마 선생님." 다바타 조교수가 끼어들었다. "과식하신 게 아니라 식중독입니다.‘ - P96
"확실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죠." 이모리는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평범한 일입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딘데?" 히로야마 부교수가 물었다. "어디 같으세요?" 이모리는 히로야마 부교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P97
"저는 도마뱀 빌입니다. 자, 뭔가 짐작가는 것 없으세요?" 한순간 히로야마 부교수의 안색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뭐? 도마뱀? 이것도 무슨 퀴즈야? 아니면 그냥 장난? 나 지금바쁘다고, 몰래카메라를 흉내 내고 싶으면 다른 사람한테 가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다바타 조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 묘한 게 생각났어." - P97
"같은 곳을 빙빙 돌며 옷을 말렸잖아요. 당신이 가르쳐준 방법이에요." 아리가 말했다. "누구 옷이 젖었다고?" 히로야마 부교수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다 말랐습니다." 다바타 조교수가 말했다. "아니, 분명 그건 그냥 꿈이야." - P98
"잠깐!"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히로야마 부교수의 눈이 빛났다. "기억났다!" "이상한 나라가 생각나신 거로군요." "기억났다고 해봤자 꿈이지만 실제로 체험한 것과는 완전히 달라." - P99
"공작부인!" "공작부인!" "공작부인!" 이모리와 아리, 그리고 다바타 조교수가 동시에 말을 꺼냈다. "그래, 공작부인이었어." - P99
"남이 듣고 오해할 소리 하지 마. 난 결혼 안 했어. 그리고 미혼모도 아니야." "결혼 안 하셨기는요. 공작 부인인걸요." "아아, 꿈 이야기구나. ・・・・・・ 아기・・・・・・ .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던 것도 같고." "사실은 돼지지만요." "돼지? 무례한 말은 삼가. 그 아이가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데." - P99
"그것만은 그만둬. 으음, 그러니까 넌 빌이었지." "예." "그리고 다바타는 도도새." "예." "그리고 그쪽의 넌?" "얘는 앨리스예요." - P100
"여왕은 분명 선생님을 자기 신하로밖에 여기지 않을 겁니다." 이모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니, 은근히 날 한 수 위로 여기지." "그걸 어떻게 아시죠?" "공작부인 정도 되면 알아." - P100
"그리핀은 모르지만 시노자키 선생님은 병으로 돌아가셨어. 이건 틀림없어." "오지 씨와 무슨 관련은 없었습니까?" "오지? 그게 누군데?" "요전에 옥상에서 떨어져서 죽은 박사 연구원입니다." - P101
"조사고 뭐고 오지는 자살이나 사고고, 시노자키 선생님은 병사야. 애당초 사건성이 없다고." "현실 세계에서는 그렇죠." 이모리가 말했다. "하지만 이상한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 P102
"확실히 너희들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짚이는 것 같기도 해서 가설로서는 흥미로워. 하지만 꿈은 꿈이야. 아무리 기억이 남아있어도 현실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그런 건 잊어버리고 현실을 살아가도록 하렴." "그냥 꿈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라는 겁니까?" - P102
"나중에 갖다 붙인 거지. 애당초 그 두 쌍이 정말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도 수상해." "적어도 오지 씨와 험프티 덤프티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 P103
"만약 앨리스가 두 사람을 죽인 혐의로 처형당하기라도 하면 구리스가와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내 알바 아니야.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다소나마 관심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꿈속 세계에서 벌어졌다는 살인사건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어. 자, 난 이제부터 다바타랑 상의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이만 돌아가주겠니?" - P103
"잠깐만요!" 느닷없이 아리가 외쳤다. "당신하고도 관계가 있어요, 공작부인!" "현실 세계에서는 공작부인이 아니야." "당신은 여왕에게 그 정원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여왕의 명령으로 하는 일 아닌데. 난 호의로 관리해주고 있을뿐이라고." - P104
"여왕은 당신 책임이라 여기고 질책하겠죠. 어쩌면 참수형에 처할지도 모르고요." "그건 여왕의 입버릇이야. 실제로 목이 잘린 사람은 없어." "질책 정도는 기꺼이 받겠다는 건가요?" "으음. 질책은 안 할걸. 친구 사이에 질책이라니 이상하잖아. 뭐, 불평 정도는 할지도 모르겠네. 그건 그것대로 짜증날지도 모르겠다." 히로야마 부교수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 P105
"그러고보니 시노자키 선생님은 비만체형이셨죠." "진짜 뚱뚱하셨지. 굴을 먹고 식중독에 걸리지 않았어도 머지않아 뇌경색이나 심근경색으로 저세상에 가셨을 거야. 오지라는 사람보다 오히려 시노자키 선생님이 험프티덤프티에 더 잘 어울릴것 같아."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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