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가서 설명 드릴게요. 절대 예원이 나가지 않게 해주세요. 너무 걱정 마시고요. 제가지금 갑니다.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다급한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옥순도 마찬가지였다. 전화가 끊어지자 그녀는 더욱 불안했다. 이 상황을 이해시켜줄 마지막 줄이 끊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P48

딸이 거기에 서 있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로 자신을 향해 웃고있었다. 점퍼 하나 없이 이 겨울에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걸까 생각하기도 전에 예원의 손을 잡고 있는 웬 남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 P49

예원은 선우의 옷 중에서 고무줄로 된 트레이닝복을 꺼내 아이에게 입혔다. 아이의 작은 복사뼈 위로 바지가 껑충 올라갔다. 티셔츠는 몸을 죄었다. 예원이 옷자락을 매만지며 해사하게 웃었다. - P49

대문을 넘는 자신을 물끄러미 보는 시선을 그때의 옥순은 알지 못했다. 청소를 마친 후장을 보러가려고 화장대에 올려둔 지갑을 예원이 보는 것도 말이다. - P50

없었다. 예원이.
지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 P50

"네, 장모님."
-이 서방, 이걸 어쩌나!
장모님의 목소리는 기절하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자네랑 통화하는 사이에 예원이가 사라졌어! - P51

예원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아이의 작은 머리가 연신 가게 쪽으로 향했다. 아이의 시선 끝에는 주황색 망에 담긴 구운 달걀과 꼬치 어묵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면 옆에 있는 사탕이나 과자, 초콜릿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예원은 문득 걸음을멈추었다.
"뭐 먹을래?" - P52

버스에 올랐다. 버스표에 있는 좌석 번호를 확인하며 안쪽으로들어갔다. 예원이 가진 티켓은 18번과 19번 좌석이었다. 앉으려는데 아이가 머뭇거렸다. 아이의 눈이 안쪽 자리에 가 있었다.
"창가에 앉을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뿐이었지만, 아까처럼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 P52

그때 예원은 창 너머 승강장으로 달려오는 선준을 보지 못했다. 봤다고 해도 달라질 일은 없었다. - P53

차 한 대가 예원의 앞을 거칠게 막아섰다. 예원은 한 팔을 내뻗으며 아이를 감쌌다. 차의 조수석 유리창이 밑으로 내려갔다. 앉아 있는 것은 선준이었다. 화를 내는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알 수없는 얼굴이었다. - P54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인 줄이나 알아?"
집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선준이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 들어오는 예원은 여전히 로운의 손을 잡고 있었다. 큰 눈을 깜박이며선준의 얼굴을 보던 예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무릎을 굽히고 앉아 로운의 신발을 벗겼다. - P55

"아까 병원에서 불렀던 노래 있지? 그거 불러봐. 응?"
로운은 멀뚱히 정면만을 보고 서 있었다. 고개를 돌리며 예원이 선준을 향해 웃었다. - P55

문득 금평 경찰서에서 발견됐다던 시신이 떠올랐다. 선우의 것과 비슷한 목걸이는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에 불고 시간이 오래되어 그렇게 보인 것뿐이라고. 어쩌면 지금쯤 선우가 아니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 P56

"얘는 우리 선우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선준에게도 절망이 찾아왔다. 이런 소리를 할때마다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선우를 잃었다는 것을. - P57

"편식도 안돼. 알았지? 다음 반찬은 꼭 김치 먹기?"
아이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실에 앉아 있는 선준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입술을 깨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울려대는 전화를 더 이상무시할 수는 없었다. - P57

미친 건 아닌가. 차마 그 소리를 뱉지 못하고 장모님의 말은 끊어졌다. 입으로 뱉는 순간 현실이 될까 두려운 마음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선준은 너무 걱정 마시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뱉었다. - P58

"원장님, 저 이선준입니다."
몇 번이고 전화를 받지 않은 선준에게 민서진은 대뜸 원망을 터뜨렸다. 선준은 보이지도 않을 민서진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상황도 대충 알렸다. - P58

충동적으로 아이를 데리고 나갔을 가능성이 있어요. 선우라고 믿고 싶은 거지 정말로 착각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잘못된 걸알고도 지금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가 작용하고 있을 거예요. 힘들더라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게 좋아요. - P58

"괜찮아, 이리 와."
로운은 그대로 앉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말끄러미 예원을 보았다. 예원이 웃으며 부드럽게 로운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이끄는대로 로운은 천천히 일어나 욕조 안으로 몸을 들였다. - P59

이것 역시 3년 전에 사용했던 것이다. 이 집의 모든 것은 3년 전에 머물러 있었고,
3년 만에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 P60

 3년 전 여섯 살이었던 선우가 입던 잠옷이니 로운에게 맞을 리가 없었다. 단추 사이사이가 벌어지고 팔과 다리가 쑥 올라온 옷을 입은 로운을 보니 더욱 화가 났다. 선준은 예원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고 거실 가운데에 세웠다.
"자, 봐! 저 애가 정말 선우라고?" - P60

 사진 속의 선우는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은 손에 쥐면 빠져나갈 정도로 가늘고 부드러웠으며, 쌍꺼풀이 없었고 눈 끝이 둥글게 휘어져 순해 보였다. - P61

예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치솟았다. 마구 저항하던 어깨의 움직임도 멎었다. 예원의 고개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선준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바닥으로 툭 떨어진 눈물은 예원의 것이었다. - P61

"우리 선우였으면 좋겠어. 이젠 이젠 찾았으면…………. 이젠 찾고 싶어."
예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선준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녀를 당겨 안았다. 이렇게 끌어안고 지탱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P62

"선우다."
"뭐?"
선준이 놀란 눈으로 로운을 보았다. 로운이 벽에서 뗀 시선을 천천히 선준에게로 향했다. 로운의 작은 입술이 선준을 향해 똑똑히 말했다.
"이선우예요."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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