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편에서 흰토끼가 달려왔다. 조끼에서 시계를 꺼냈다. "큰일 났다! 늦겠어." 이 토끼가 특별히 시간 개념이 없는 건지, 원래 토끼라는 종족자체가 시간을 지키는 능력이 모자란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늘 이 모양이었다. - P5
어쩐지 좀 더 지루하지만 차분한 일상이있었던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거기 비켜, 메리 앤! 늦을 것 같아! 알잖아!" 앨리스가 입을 열려고 했을 때 뒤에서 누가 말을 붙였다. - P5
"있지. 암호를 정해두자." 돌아보자 도마뱀 빌이 서 있었다. "암호? 무슨 소리야?" "암호란 같은 편이라는 걸 식별하기 위해 비밀리에 정해놓는 말이야." - P6
"너, 아는 이들 모두에게 지금이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니?" 빌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모두에게 말하면 의미가 없잖아. 이이야기는 같은 편에게만 했어." 어머. 빌은 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 P6
"왜냐니, 암호가 없으면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할 수 없잖아." "판단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난 같은 편이잖아." "그러니까 암호를 정해두지 않으면 앨리스가 같은 편인 줄 모른대도." "그럼 적이라도 상관없어." 빌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건 곤란해. 앨리스는 같은 편이니까." - P7
"암호는 다음에 다시 정하자." "왜?" "얘가 있어서." 앨리스는 호주머니를 가리켰다. "호주머니가 사방팔방 퍼뜨릴까봐? 그 녀석은 대개 과묵하니까 괜찮아." - P8
"아까 앨리스가 털 뭉치라고 했어." "아니. 안그랬어. 네가 그랬지.. "내가 털 뭉치라고 하니까 앨리스가 ‘그래‘라고 했잖아." "그건 털 뭉치"라는 뜻이 아니라 ‘호주머니의 내용물은 털 뭉치같은 것‘이라는 뜻이었어." - P8
"앨리스는 털 뭉치 같은 게 신경 쓰이는 거야?" "그래, 그냥 털 뭉치가 아니니까." "그냥 들어 있는 게 아니야? 그럼 얼마 주고 샀는데?" "안샀어. 친구니까." "친구한테 샀다고?" "아니, 친구한테 안 샀어." "그럼 친구 아님 한테 샀구나." "친구 아님한테도 안샀어. 만약 그런 단어가 있다면 말이지만." - P9
"털 뭉치치고는 하지만 겨울잠쥐로서는 보통인가?" "겨울잠쥐? 왜 갑자기 그런 뚱딴지같은 녀석 이야기를 하는거야?" "쉿!" 앨리스는 입 앞에 손가락을 세웠다. "다 들려. 호주머니에 들어 있으니까." "맙소사!" 빌은 호들갑스럽게 머리를 끌어안았다.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비밀로 한 거야?" - P10
"그래도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지금은 암호를 말하지마." "겨울잠쥐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암호를 가르쳐달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겨울잠쥐가 들을 수도 있으니까 암호를 말하지 말라는 거야." - P10
"그럼 같은 편 말고 다른 사람에게 새나가면 곤란하지 않아?" "뭐? 그럼 겨울잠쥐는 적이야?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어?" 빌은 눈을 반짝였다. - P10
"겨울잠쥐가 적과 내통하고 있을 가능성" 이 녀석이?" 빌은 겨울잠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통자는 늘 이렇게 푹 잠들어 있는 건가?" ...... "잠이랑 내통은 상관없어. ・・・・・・ 하지만 이렇게 잠이 많으면 내통자답다고 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 P11
"나안자!" 겨울잠쥐가 말했다. 앨리스와 빌은 말없이 겨울잠쥐를 관찰했다. 겨울잠쥐는 눈을 감은 채로 숨을 색색 내쉬었다. - P11
"겨울잠쥐 같은 편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암호가 새나가도아무 문제 없어." "엥? 그렇게 쉽게 믿는 거야?" 년 겨울잠쥐를 의심해?" "설마." "그렇겠지. 나도 이 녀석을 의심하지 않아. 게다가 만일 이 녀석이 적이라고 해도 전혀 무섭지 않다고. 그럼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잖아." "깔보지 마!" 겨울잠쥐가 소리쳤다. - P12
"아무튼 겨울잠쥐가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건 찬성이야. 빨리암호인지 뭔지를 말해줘." "알았어. 내가 먼저 ‘스나크는‘이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너 "부점이었다." 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알았지? 비밀이 새나갔나?" "누구한테서 비밀이 새나갔다는 거야?" 빌은 겨울잠쥐를 노려보았다. - P13
"음. 너, 겨울잠쥐 앞에서 암호를 말한 적 있어?" "응. 있어. 정확하게 따지자면 난 앞쪽 절반을 말했고, 나머지는네가 말했지만." "방금 전에 우리 둘이 말한 거?" "기억 안나?" - P13
"그래. 아까 처음 말했어. 그 전에는 내 머릿속에만들어 있었지." "그런데 겨울잠쥐를 의심하다니 사리에 어긋나잖아." "하지만 내가 암호를 가르쳐주기 전에 네가 이미 알고 있었으니겨울잠쥐를 의심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니야. 겨울잠쥐는 무고해." - P14
빌은 이마를 탁 쳤다. "내가 배신자였을줄은 꿈에도 몰랐어." "안심해, 빌, 너도 배신자가 아니야." "어떻게 알아?" "넌 배신자 유형이 아니거든. 게다가 네가 배신자라면 너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야." - P15
"큰일이다!" 시종들과 말들이 그렇게 외치면서 눈앞을 달려갔다. "뭐야? 왜 그래?" 빌이 물었다. "왕의 시종과 말들이 허둥대는 걸 보니 답은 하나야." "누가 배신자인지 알아낸 거야?" "그게 아니라 틀림없이 담에서 떨어졌어." "뭐가 담에서 떨어졌는데?" - P16
"그래서 누가 떨어졌는데?" "진심으로 묻는 거야?" "응."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시종과 말이 달려갔는데 모른단 말이지." "응."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험프티 덤프티." - P17
"잠깐 기다려." 앨리스도 허둥지둥 뒤를 쫓았다. "여왕님의 성 정원이야." 빌은 달리면서 손가락질했다. 빌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팍삭 찌그러진 뭔가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거대한 하얀색 껍데기 같은 것이 보였다. 그리고 검붉은 뭔가도. - P17
험프티 덤프티 주변에 두 명이 서 있었다. 뭐, 사람은 아닐지도모르지만 아무튼 사람 취급하는 것이 여기 방식이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 명이 3월 토끼와 미치광이 모자 장수라는것이 확실해졌다. - P18
"범죄? 험프티 덤프티가 담에서 떨어졌을 뿐이잖아요? 그렇다면 사고죠." 모자 장수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험프티 덤프티는 살해당했어. 이건 살인사건이야.‘ - P18
구리스가와 아리는 침대에서 흐느적흐느적 기어 나와서 자명종 시계를 썼다. 언제나처럼 징그럽게 사실적인 꿈이었다. 한창 꾸고 있을 때는 이것이 꿈인지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오감이 전부 뚜렷하다(엄밀히 말하자면 그 감각 자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거지만). - P19
그건 그렇고 왜 이렇게 머리가 이상한 인물과 동물이 사는 세계의 꿈만 꾸는 걸까? - P19
최근에는 이 꿈만 꾼다. 혹시 매일 꾸고 있나? 설마. 어제 꾼 꿈을 떠올려보자. 어제는 그 세계 꿈을 꿨다. 어제는 말이지. 이틀 연속으로 꾸는건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저께 꾼 꿈을 떠올려보자. 분명 그 세계 꿈이었던 것 같아. 우연히 사흘 연속꿨을 뿐이지만, 그저께는 어땠더라? 어쩐지 그 세계 꿈을 꿨던 것 같은데,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 P20
고작 꿈일 뿐인데 어쩐지 굉장히 신경쓰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꿈 일기라도 쓸걸 그랬어. 그래. 꿈 일기. 시험 삼아 지금부터 써볼까? 날짜와 함께 꼬박꼬박 적어두면 심리적인 뭔가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 P21
‘스나크는 부점이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아. 하지만 이 말은 빌한테 듣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가. 그럼 혹시 그 세계에서는 누구나 아는 표현일까? 그렇다면 빌은 정말 얼빠진 녀석이야. - P22
"무슨 일 있었어요?" 아리는 한 살 많은 대학원생 다나카 리오에게 물었다. "나카노시마 연구실의 오지 씨가 돌아가셨대." "예?" - P22
"갑작스레 병이라도 걸리셨나요?" "달걀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둥글둥글한 체형이니까 당뇨병이나 순환기 계통 질환이 바로 떠오르지? 하지만 아니야. 추락사래." - P22
"분명 자살은 아닐 거야." 리오가 불쑥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자살할 사람이 아닌걸. 그렇지 않아?" "나는 오지 씨랑 그렇게 친하지 않아서.…………." - P23
"혹시 일정에 여유가 있을 만한 분 모르세요?" "여유? 그런 사람은 아니지......" "짐작가는 분이 계세요?" "뭐, 여유롭다면 여유롭지만 여유하고는 좀 다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여유가 있는 건가요 없는 건가요?" "뭐, 별난 녀석인 것만은 틀림없어." 대학원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요?" "이모리야 이모리 겐, 알아?" - P25
"너, 모레 증착 장치 쓰려고 예약했지? 그거 양보해주지 않을래?" 이모리는 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목 아파?" "생각 좀 하느라고." - P26
"그렇게 애매해? 모레인데?" "모레 일은 모레 일이니까. 오늘은 오늘 할 일만으로도 힘에 부친다고." "하지만 너 지금 텔레비전 보고 있었잖아." "그래. 그게 오늘 할 일 중 하나야." - P26
"생각해내야 할 게 또 하나 늘었군." "생각해내지 않아도 돼. 내가 가르쳐줄게. 오지 씨 말이야." "오지?" "오지 씨 이름도 까먹었어?" "아니, 그건 기억나. 하지만 나랑 친한 친구라니 처음 듣는 소린데. 어쩌면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네." - P26
"아아, 생각났다!" 이모리는 아리의 얼굴을 가리켰다. "넌 구리스가와야." "계속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 하지만 생각해내야 할게 한가지 더 있어. 그게 더 중요해." - P27
꼭 그렇지만도 않아 무슨 실험을 할 건지 들어볼 수 있을까?" 아리는 낙담하면서도 자신의 실험 내용을 간단히 설명했다. "아하, 전극을 형성하기만 하면 되는 거로군." "뭐, 요컨대 그런 셈이지." "그럼 스퍼터* 장비를 쓰면 돼." "스퍼터 장비라니 좀 거창하지 않아?"
* 증착에 사용되는 장비의 일종 - P28
"왜? 아직 더 남았어?" "한 가지만 더." "그러고보니 뭔가 생각해내야 하는 게 있다고 그랬지?" "중요한 일이야." "생각이 안 나는데 중요하다는 건 알아?" "신기하게도 말이지." - P29
"오지 씨는 역시 사고였을까?" "병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없을 거야. 사고나 자살이나 타살이겠지." "병으로 죽은 걸 빼면 당연히 그 세 가지 중 하나지 뭘." "하지만 아주 묘해." "너도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은 자살할 사람이 아니야." - P30
"옥상 가장자리에 앉아 다리를 흔들다가 균형을 잃은 거야." "나잇살이나 먹은 성인이 옥상 가장자리에서 다리를 흔들까?" "글쎄. 뭐, 사람마다 사정과 취향이 있을 테니." - P30
"자살할 거라고 생각했구나." "자살할 것처럼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 하지만 인간은 돌발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으니까. 난 몸을 숨기고 경찰이나 소방서에 연락하려고 했어. 그때 오지 씨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기울었지." "스스로 뛰어내린 거야?"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다음 순간 오지 씨는 떨어지고 말았어." - P31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뭣 때문에?" "당연히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지." "미안하지만 그 방법으로는 진상에 도달하지 못할 거야. 사고라고 느꼈든, 살인이라고 느꼈든 그건 어디까지나 인상의 문제라고 몇 명한테 이야기를 들어본 해결은 불가능해." - P33
"잠깐만. 너 이 사건에 흥미가 있어?" 이모리는 아리를 불러 세웠다. "음. 글쎄? 흥미가 없지는 않다는 느낌이려나?" "자기 주변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보이는 반응과 별반 다를 바없군. 하지만・・・・... "하지만 뭐?" "넌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P34
"아니, 아마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럼 지금 당장 증명해봐." "아아, 좋아." 이모리는 아리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역시 얘 무서워. 이모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나크는." 전기 충격과도 같은 오한이 아리의 온몸을 엄습했다. - P35
안 된다. 여기서 대답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아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다. 이제 평온한 인생으로 돌아갈 수없다. - P36
무릇 세계는 처음부터 이랬는걸. 그렇지? 아리는 각오를 굳혔다. "부점이었다." 세계가 확 바뀌었다. - P36
"토끼 당신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도움? 뭘 돕는데?" "살인사건 수사 말이에요." "살인이라고? 참 뒤숭숭한 세상이로구나!" "살인사건을 수사한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요." 앨리스는 기분이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 P37
"파충류가 뭐야?" 빌이 물었다. "너 같은 녀석이지." "그러니까 ‘너는 너 같은 녀석이냐‘고 물은 거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마치 내가 바보 같잖아?" "나는 나 같은 녀석이야." "알았다!" 3월 토끼가 외쳤다. "이 녀석은 티라노사우루스티렉스라고." - P38
"조직 단위로는 이건 엄연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것들이 통합된 험프티 덤프티는 죽었어. 이제 어디에도 없지." 미치광이 모자 장수가 말했다. "움찔움찔할 때마다 즙이 흘러나와서 징그러운데요." "그거 안됐군. 허나 스프라고 생각하면 괜찮을걸." - P39
"잠깐만!" 3월 토끼는 모자 장수를 손으로 제지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봐줘." "오늘이 무슨 기념일이라도 되나?" "내게 특별한 날이야." "네게?" "그래. 오늘은 내 생일이 아닌 날이라고." "어? 그랬어?" 모자 장수가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우연하게도 나도 오늘이 생일이 아닌 날이야."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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