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호를 변호하는 첫 의견서는 12포인트 더블 스페이스로쓰였다. 그런 규격은 법률이 정하지 않았다. 판사들 중에 노안이 많을 따름이다. 총 여덟 장이 나왔다. 논지는 간단했다. 검사는 사실관계를 오인했다. - P57
물론 그 모든 문장을 공손한 존댓말로 썼다. 언급할 필요도없지만, 판사가 읽을 의견서를 존댓말로 작성해야 한다고 규정한 법률도 없다. 그런 규칙들은 법률보다 강력하고 우선적으로 작용해서 명시되어 있지 않아도 누구나 지킨다. - P58
나는 출력한 의견서에 표지를 덧대고 스테이플러를 찍어 비서에게 넘겼다. 그녀는 한 시간 후에 법원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의견서에 첨부한 증거 목록은 없었다. 첨부할 증거가 없었다. - P58
"피고인이 자기 아들을 경찰이 죽였다고 주장한다고 하셨죠?" "네. 이걸 읽어보세요." 나는 준형이 쓴 보고서의 사본을 주민에게 넘겼다. 주민은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장을 넘길 때마다 날숨의 리듬으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 읽는 데 5분이 걸리지 않았다. - P59
"이 사건 담당인 홍재덕 검사는 악명이 높죠. 공안 출신으로 제기하는 공소마다 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어요. 굳이 그 검사를 고소한다면 검사의 판단이 경찰에 대한 기소불행사이나, 피고인에 대한 기소남용이냐를 따져봐야 할 거예요. 이 부분은 학설만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검사를 고소할 수 있는 법률적 주체는 피고인이 아닌 피해자가 됩니다. 그냥 잊으시죠." - P59
"이 사건을 고대 법대 모의법정에 맡길 순 없어요." "신의 뜻에 맡겨야겠지요. 참, 홍재덕 검사가 가진 수사자료를 열람해보셨습니까?" "어제 신청을 했습니다. 48시간 이내로 회신이 올 겁니다 - P60
"검사가 진압경찰을 무혐의 처리한 것에 대해 항고를 고려해보셨나요?" "저는 국선전담변호사입니다. 국가가 선정한 소송만 진행할수 있어요." - P61
"맞아요. 마찬가지로 형소법 개정 이후 쭉, 재정 사건의 재판관들은 불성실한 검찰의 태도에 모욕감을 느껴왔죠. 재정사건의 재판관이 검사에게 가진 자료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건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판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거든요. 그렇게 되면 거기서 뭐가나올지 모릅니다. 윤 변호사님이 박재호 씨의 무죄를 변호하는 현재 소송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자료가 있을 수도 있죠." - P61
"박재호 씨가 피고인인 현재의 사건에서는, 입증요건에 따라 윤 변호사님이 진압경찰의 폭행치사 혐의를 입증해야 합니다. 하지만 재정신청을 거쳐 고등법원으로 이송된 사건에서는검사가 경찰의 폭행치사 혐의를 입증해야 하지요. 판사의 명령을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요. 검찰이 공짜로 윤 변호사님의 소송증거자료를 퍼다 주는 겁니다. 그만큼 유능한 조사관을 고용할 수 있겠어요?" - P62
홍재덕 검사의 문장은 정중했다. 답신에서 그는 정중한 태도로, 내가 신청한 자료의 열람 등사를 모조리 거부했다. 그는 수사자료의 공개가 박재호 외 다른 철거용역 쪽 피고인의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주장했고, 짧게 유감을 표명한 뒤, 내 요청을 거부하는 근거가 적시된 형사소송법 조항을 밝혔다. - P62
"결국 제가 가진 사실이 하나도 없군요." "난 변호사님께 이미 사실을 다 말했습니다." "아드님을 경찰이 죽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확신합니까?" 옳은 질문이 아니었다. 변호사가 할 질문이 아니었다. 박재호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만큼 확신해요." - P63
박재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노트와펜을 꺼내 적어 내려갔다. 이야기는 작년으로 돌아갔다. 재개발사업을 위한 특별법이 입법됐다. - P64
"시에서 제소전 화해를 유도했다고요? 오성건설과 세입자사이의 제소전 화해를요?" "어쨌든 난 서명은 안 했소. 어느 쪽이든 이주 보상금은 턱이 없었죠. 거기엔 권리금이 포함되지 않았소. 돈을 받아 죽을시기를 미루란 소리나 다름없었어요." - P64
제소전 화해란, 당사자들이 법원에서 제소와 화해의 형식적 절차를 미리 밟는 것을 말한다. 제소전 화해가 이루어지면 외관상으로 당사자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법원에서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향후의 제소 권한은 종료되어버린다. 반면 제소전화해의 내용 자체는 법원 판결과 동등한 집행력을 부여받게 된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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