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 내 거야!" 완전히 미친 여자였다. 이런 병원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곧 크리스마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복도에 화려하게 장식되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 때문이었다. 로비에서 크리스마스 기념음악회를 한다는 현수막도 보았다. - P34
전단지를 게시판에 붙일 때였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환자복의 소매를 걷어 올린 여자가 예원의 전단지를 가로챘다. 한 손에 흰 종이로 접은 비행기가 들려 있었다. 이건 비행기 접는 종이가 아니라고, 처음엔 조용히 말해줬지만 엉망인 제 머리만큼이나 여자는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 P35
눈이 뒤집혔다. 그것도 모르고 여자는 찢어진 종이는 필요 없다는 듯 바닥에 내팽개쳤다. 퍽! 여자가 뒤로 벌러덩 넘어지며 나가떨어졌다. 여자의 코와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예원의 주먹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로비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서며 두 사람을 보았다. - P35
"아뇨, 오히려 너무 자주 와도 안정되는 데에 도움이 안 된다고 원장님이 그러셔서요." 선준의 맞은편에 앉으며 심명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힘들겠다. 사람 사는 일이 참・・・・・" "그래도 여기에 입원시켜야 제가 일하러 왔을 때라도 좀 들여다볼 수 있죠." - P33
보안실은 1층 가장 안쪽이었다. 관계자 외출입 금지라는 푯말이 문 앞에 붙어 있었다. 선준이 노크를 하자안에서 가벼운 목소리로 응답이 들려왔다. 회색 페인트를 칠한나무 문을 밀어 열고 들어갔다. "어서와." - P32
"자식은 어디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마누라는 정신병원에 가둬놓은 놈이 안색 좋으면 그게 더 대단한 거죠." 커피 잔 안으로 시선을 던져 넣었다. 안 봐도 심명훈의 안쓰러운 눈길이 자신을 향했던 걸 선준은 알고 있었다. 지난 3년간 매일같이 받았던 시선이다. 이제는 그것이 무겁다. - P33
"예원 씨! 예원 씨!" 심명훈이 예원의 팔에 매달렸다. 그사이 경보 벨을 들은 간호사와 의사가 달려나왔다. 푸른 옷을 입은 보호사들이 심명훈을제치고 예원의 어깨를 뒤로 젖혔다. 예원이 여자에게서 떨어져나가며 뒤로 나자빠졌다. 보호사들은 그대로 예원을 눌렀다. - P36
예원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딛고 선 땅이 조금은 안정될지도 모른다는 선준의 희망도 무너지고 있었다. 선준은 그대로 돌아섰다. 다시 보안실로 들어가 두고 온 가방을 집어 들었다. 출입문으로 향하던 그가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로비를 비추는 CCTV 화면이 보였다. 엎어진 자세로제압당했던 예원이 어느새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 P36
그대로 갈 거야? 날 이렇게 버려두고? 이를 갈며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저런 사람에게 선우일지도 모르는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얘기는 절대 꺼낼 수 없었다. - P37
예원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정신을 모았다.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팔다리가 무겁고 욱신거렸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자신을 누르던 수많은 손들. 그 와중에 주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선준을 본것도 같았는데 병실에는 그가 없었다. - P38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맨발에 꿰신었다. 철제 침대를 붙잡으며 간신히 문밖으로 향했다. 복도로 나가자 노랫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뜨끈한 기운이 눈시울을 적셨다.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갈망하던 노래였다. 어디지. 어디서 들려오는 거지. - P39
예원은 눈을 크게떴다. 안쪽의 한 테이블에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는데, 노래는 그아이에게서 들려온 것이었다. 젊은 간호사 하나가 아이의 입에마이크를 대고 있었다. 옆에서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박자에맞춰 손뼉을 쳤다. 선우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처럼 예원은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몇 살쯤 되었을까? - P39
그때였다. 밖에서 들어온 보호사 하나가 아이의 어깨를 살짝잡았다. 아이의 노랫소리가 끊겼다. 동시에 길을 잃은 것처럼 예원의 발도 우뚝 멈췄다. "로운아, 엄마가 보러 오셨어." 로운이라고 불린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P40
"이제 로운이 자해 증상 많이 사라졌어요. 집에서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통원 치료 받으시는게 어떠세요?" 원장 민서진은 맞은편에 앉은 정주희에게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로운을 입원시킨 지는 1년이 가까워져갔지만 민서진이 그녀를 본 것은 세 번뿐이었다. - P40
정주희는 스물네 살이었다. 로운을 열여섯 살에 출산한 셈이었다. 남편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정주희는 물끄러미 테이블의 한 지점을 응시했다. 퇴원해도 된다는 말에도 기쁨 같은감정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한참 만에 정주희가 말했다. "꼭 데려가야하나요?" - P41
민서진은 말을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보호사가 로운을 데리고 왔다. 성마른 시선으로 휴게실을 둘러보다가 정주희를 발견하고는 기계처럼 히쭉 웃는 로운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 P41
"로운아, 엄마가 보러 오셨네." 로운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정주희는 조금 전 민서진이 자신을곤란하게 하는 말을 했을 때처럼 테이블 구석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이를 안아준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민서진은 낮은 한숨을 쉬며 보호사에게 눈짓을 했다. 보호사가 로운을 정주희의 맞은편에 앉혀주고 바깥으로 나갔다. - P42
아이의 짧은 다리가 철제 의자 아래에서 덜렁거렸다. 점점 다리를 세게 흔들었다. 의자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났다. 발끝으로 책상 아랫부분을 두드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턱턱 두드리자 조화를 꽂은 책상 위의 화병이 조금씩 옆으로 옮겨갔다. - P42
로운이 그걸 물끄러미 보는 사이 그녀는 면회실을 나갔다. 만 원짜리 두 장이었다. 로운은 그걸 집지 않았다. 대신 엄마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이 병원엔 돈을 쓸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 P43
일정 시간이 되면 보호사가 면회실로 와 확인을 하기는하지만 엄마가 5분도 채 안 지나서 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것같았다. 너무 커서 손을 덮는 환자복 상의를 걷고 로운은 작은 손으로손잡이를 잡아 돌려 면회실의 문을 열었다. - P43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오며 로운의 어깨를 잡았다. 아이는 무덤덤하게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황급히 로운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몇 살이니?" 로운이 그녀를 보았다.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아홉 살이지?" - P43
로운은 다시 몸을 돌려 병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여자가 소리쳤다. "선우야!" 로운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 P44
"예원 씨가 없어졌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남자 어린이 환자를 같이 데리고 나간 것 같아요!" 스피커폰에서 들려오는 민서진의 외침에 선준은 그대로 병원을 향해 핸들을 돌렸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차머리가 크게 돌았다. CCTV 설치건으로 방문하기로 한 약속 같은 것은 머리에 남지도 않았다. - P45
선준은 곧장 CCTV 기계에 달려들었다. 직접 컴퓨터를 조작해 녹화된 영상을 불러냈다. 병원 정문의 CCTV 영상이었다. "아침 9시 8분이야." - P45
무언가를 본 선준이 버튼을 눌렀다. 영상이 멎었다. 다시 다이얼을 돌려 천천히 앞으로 감았다. 탑차옆으로 예원의 모습이 설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직원들이 정신이 팔린 틈에 벽을 따라 바깥으로 나간 것이 확실했다. 손을 잡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작은가방을 등에 메고 있었다. - P46
전화를 받지 말까 하다가 할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가 닿지 않으면 얼마나 불안해하실지도 알고 있었기에 계속 전화를 피할 자신이 없었다. 버튼을 누르자 전화기 너머에서 곧장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 다르게 홍분한 그녀의 말은 선준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 서방, 이게 무슨 일인가? 예원이가 왔어!" - P47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와 부서졌다. -어머니, 예원이 잘 잡아두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가요! 사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예원이를 잃어버렸었구나, 직감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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