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한 출근 시간 직후 수빈이 거대한 상자를 실은 카트를 끌고 나타나더니, 마치 전쟁에서 귀환한 영웅처럼 상자를 열어젖히며 "여러분, 도착했습니다. 백년전의 신선한 산딸기!" 하고 외쳤다. 토종 과일복원 프로젝트로 복원한 재건 이전의 산딸기였다. 연구실에서 소량으로만 기르다가 대량 재배로옮겨 성공한 것을 수확해서, 드디어 오늘 첫 시식을 위해 가져왔다는 게 수빈의 설명이었다. - P25
아영도 산딸기 앞으로 우르르 몰려드는 연구원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커다란 상자 한가득 처음 보는 산딸기가 담겨 있었다. - P25
수빈이 바구니에 산딸기를 가득 담아 테이블 옆 개수대에서 씻어 왔다. 이동식서랍장 위에 바구니가 놓였다. 우쭐해 보이는 수빈의 시식 허가가 떨어졌다. "자, 한번 먹어볼까요?" - P26
"저……… 맛없어요?" 직설적이기로 유명한 박소영 팀장이 조금 난감한 듯 말했다. "음, 산딸기가 원래 떫은맛이 나나?" 아무도 대꾸해주지 않았다. 다들 수빈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뒤, 참았던 말들이 하나씯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 P26
"21세기 사람들은 우리랑 입맛이 달랐나보죠. 그땐 이런 걸좋은 과일로 쳤나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 21 세기 사람들 무시하는 거예요? 이건 무조건 농림청에서 잘못 키웠어요. 백 퍼센트." "맞아. 제대로 키운 거 맞나 확인 좀 해보라고 해." "수빈 씨가 샘플로 먼저 키워보고 보낸 거잖아요." - P27
산딸기 맛의 진실을 두고 결론 없는 논쟁이 시작되자, 수빈은 결국 산딸기를 몇 알 먹어보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상자를 재차 확인했다. 다들 상심한 수빈을 위로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산딸기가 담긴 상자를 자리로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 P27
"아니에요. 이거 슴슴하면 안 되고요, 달아야 하는데.…수빈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괜히 말을 덧붙였다가는 더실망하게 만들 것 같아서 아영은 어깨를 으쓱하고 돌아섰다. 옆에서 지켜보던 윤재가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었다. - P28
그런데 첫해 복원한 오렌지와 밀감의 교배 품종인 제주금향이 시장에서 크게 인기를 끌면서, 연구센터의 재정과 명성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그 이후 한동안 수많은 연구원들이 동원되었는데, 많은 프로젝트들이 그렇듯이 품종 복원 사업 역시 난발성성공으로 그쳤고, 지금은 막내 연구원인 수빈에게로 떠넘겨져 수빈만 실컷 고생을 하고 있었다. - P28
데이터 처리 프로그램이 초안을 자동 작성해주기는 하지만, 보기 좋게 다듬으려면 지금부터 밤을 새워야 할판이었다.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은 연구 실적을 평가하는 윗선들과는 견해가 달라서, 식물 연구자들에게나 흥미를 끌 만한 하찮은 식물들에 ‘중요‘ 표지를 마구 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생물자원 평가는 전부 아영이 수작업으로 다시 해야 했다. - P29
"이건 진짜 특이하게 생겨서 복원해보고 싶은데, 뿌리의 구조가 엄청 독창적이거든요. 그런데 갖다 쓸 말이 없어요. 뿌리의구조가 독창적이다. 이렇게 쓸 수도 없고." "그럴 땐 역시 ‘생물다양성‘이지. 생물다양성이 우릴 구원할거야. 더스트 종식 이후 가장 먼저 재건된 지역도 생물다양성이 잘 보존된 지역이었다. 뭐 이런 얘기라도 써놔야지. 더스트 폴이 또 터질 수도 있다고 겁도 좀 주고." - P30
샌드위치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싱거운 산딸기를 주워먹으며 오후 내내 작업을 했더니 겨우 보고서 초고가 완성되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도 수십 번씩 보다보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충혈된 눈을 깜빡이며 아영은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식물팀 전체에 공유했다. - P31
잡무를 처리하며 느긋하게 기다리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오다가, 아영은 윤재와 박 팀장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같은 기사가 떠있는 것을 보았다.
강원도 해월, 폐허에서 유해 잡초 이상증식ㆍㆍㆍㆍㆍㆍ 인근 마을 민원 쇄도
해산림청과 회의한다는 일이 저건가? - P31
다음날 아침, 아영은 자신의 테이블 위에 놓인 바이오플라스틱 상자 두 개를 보았다. 상자 하나는 크기가 꽤 컸는데, 흙이 묻은 뿌리가 입구로 삐죽 튀어나온 갈색 종이봉투가 담겨 있었다. 다른 하나에는 한줌 정도의 흙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 P32
옆에서 스크린을 들여다보던 윤재가 지듬 자리를 비운 강 소장 목소리를 흉내 내며 "어머, 성실하게 초고를 다 작성한 연구원이 아영씨밖에 없지 뭐예요" 하고 아영을 약올렸다. 손빠른 사람이 더 많이 일하게 되는 조직의 불합리함이란. - P33
"뉴스 제목은 지나가면서 봤는데, 찾아볼게요." 윤재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산림청에서 분석해 왔는데 이상한 점이 많아서, 혹시 자기들이 원인을 못 찾고 있는 건 아닌지 크로스체크를 좀 해보고 싶다는 거야. 거기서 우리한테 뭘 시키겠다. 이런 건 아니고 말 그대로 도움 요청이지. 되도록 이번 주까지 분석 끝내서 보내주면 좋대." "이번 주까지요? 이번 주가 이틀 남았는데요?" - P33
아영이 스티커를 뜯어내고 상자를 열어젖히려고 하는 순간윤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조심해, 조심, 그거 맨손으로 만지면 안 돼." 움찔한 아영의 손이 상자 위에서 멈췄다. "피부에 닿으면 엄청 간지럽고 따끔해. 나도 어제 미팅 갔다가 처음 알았어. 장갑 꼭 끼고 팔 걷지 말고." 윤재가 소매를 약간 걷어 아영에게 보여주었다. 손목 부분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 P34
한국에서 흔히 보이던 자생식물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무시한 식물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원래 식물의 무시무시함이라는 게 외관으로는 판별불가능한 것이기는 했지만. "외래종이죠? 한국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요." "다들 그렇게 추정하는데, 일단은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아. 찾아보면 재건 이후에 한국에서도 몇 번 증식했다는 기록이 있더라고 언제부터 자리를 잡은 건지는 모르겠어." - P35
"생물 테러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잡초로 테러를 해요? 그건 음모론 같은데." "그거야 두고 봐야지. 음모론 제일 좋아하는 건 아영 너잖아?" 윤재가 놀리듯 하는 말에 아영은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 P36
"정말 과하게 증식했네요. 이상해요." "그렇지. 네가 좋아하는 이상하고 위험한 식물이야." 아영은 고개를 돌려 상자 속의 덩굴식물을 힐끗 보았다. 일단겉으로는 너무 평범해 보이는 식물일 뿐인데, "그러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연구원님." 윤재는 아영의 어깨를 툭 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 P37
그날 오후 내내 아영은 모스바나의 줄기와 잎, 뿌리를 각각 나누어 화학 처리를 하고, 분석단위별로 담고, 분석 장비에 넣을수 있게끔 정제해서 샘플을 준비했다. 장비 스케줄을 보니 정규근무 시간에 하려다간 예약을 못 잡을 것 같아서, 밤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야간 실험실 사용 허가서를 써주며 박소영 팀장은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 P37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스트레인저 테일즈‘에 접속한 전술관에 가까웠다. 아영의 비밀스러운 취미였지만 윤재에게 들킨이후로는 늘 놀림거리가 되고 있었다. 괴담과 음모론의 세계 아영은 언제나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것에 끌렸다. - P38
물론 어디까지나 취미에 불과하다고, 아영은 스스로 선을 그었다. 과학자로서 아영은 괴담이 대부분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괴담이라는 것들은 대개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현상을 공포와 미스터리로 얼버무리는 이야기다. 딱히 창의적인 발상의 씨앗이 되지도 않는다. 읽고 나면어딘가 으스스하고 찝찝한 기분이 드는데, 그 중독적인 상태가 또 다른 괴담들을 읽도록 이끌 뿐이다. - P39
‘악마의 식물‘이라고 이름 붙은 것치고는 그저 성가신 식물에 가까웠다. 좀더 살펴보니 해외에서 모스바나가 악마의 식물로불리는 건 식물 자체의 유해성보다는 모스바나에 입혀진 이미지 때문인 것 같았다. 모스바나는 더스트 시대 후기, 그리고 재건 직후의 빈곤한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우점종dominant species 이었다. 당시에는 세계 어디에나 모스바나의 덩굴이 가득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의 불행한 기억, 혹은 겪어본 적도 없는 시대의 절망과 이 식물을 연관 짓는 것인지도 몰랐다. - P41
모스바나는 재건 직후에는 지구상의 전 대륙에 퍼져 있을 정도로 엄청난 확장성을 자랑했지만, 생태계 다양성이 회복되면서 다른 식물들과의 경쟁에서 급격히 밀려났고, 현재는 일부 지역에 정착한 사례 외에는 흔히 발견되지 않았다. 그만큼 한번 보이면 ‘왜 이게 갑자기 나타났지?‘ 하는 의문을 생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 P41
다만 작은 소득이라면 해외에서도 모스바나가 성가신 식물로 여겨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정도 어쩌면 해월의 모스바나 이상 증식은 그 자체로 특별히 놀랍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미 세계 각지에서 흔하게 반복되어온 일일 수도 있었다. - P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