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가 말다가 읽다가 말다가.
안 좋은 습관인데, 안 고쳐진다.

피고인1. 박재호.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적용법조 형법144조2항.
피고인2. 김수만. 폭행치사. 적용법조 형법 262조. - P45
나는 법원에 제출할 의견서의 초안을 잡아보기 위해 워드프로세서를 열었다가 다시 공소장을 보았고, 다시 워드프로세서로 돌아왔다. 커서는 계속 깜빡였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박재호는 물었다. 정말로 그게 답니까? 나는 그 말을 의견서 첫 줄에 적을 뻔했다. - P46
이준형, 어감과는 달리 여자였고, 목소리가 젊고 또랑또랑했다. 마음에 들었다. 그사실은 내가 마침 점심시간이니 사무실 앞 식당에서 식사를하면서 대화하자고 제안하는 데 영향을 줬다. 나는 법원 근처의 ‘올리브 퀼트‘라는 양식당에서 그녀를 만났고, 늘 그렇게 먹는 척 미디엄 굽기의 등심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후식으로는 커피를 골랐다. 그녀는 평범한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시켰다. - P46
종업원이 그릇들을 가져가자 그녀는 A4용지 묶음을 꺼냈다. "제가 지금까지 조사한 바를 정리한 거예요. 대부분 아는내용이겠지만 한번 읽어보세요. 이 사건에는 문제가 있어요." 나는 그녀의 서류를 받았다. "사람이 두 명이나 죽었다면 ‘문제‘라는 표현으론 부족하지요." "피해자는 경찰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죠?" - P47
"네. 박재호를 피고인이라 부르는 게 입에 붙지 않네요. 그게 이 사건에서 이상한 점이고요. 전 지금까지 강제철거를 세건 취재했어요. 경찰정보가 이렇게 폐쇄적인 건 처음이에요. 물론 사람이 죽은 것도 처음이지만, 철거당일 진압에 관계한그 누구와도 인터뷰를 할 수 없었어요. 언론과의 접촉을 철저히 막고 있거든요. 기자가 사건에 접근하기 곤란하다면 그건 많은 걸 뜻해요. 보통은 심각한 문제가 있단 걸 뜻하죠." - P47
"철거 당일에 한 시민이 현장을 녹화한 VCR 봤나요?" 난 그 질문에 당황했다. 그런 게 있냐고 대답하고 그녀에게그 VCR을 요구하는 게 옳았지만, 나는 아직 안봤다고 말했다. "사건에 대해 잘 모르시는군요." "저는 어제 사건을 수임했습니다." - P48
"하지만 박재호 씨 아들 박신우가 의학적으로 사망한 곳은현장이 아니라 인근 병원인 걸로 압니다. 이 기자님의 의심은합리적이지만 경찰이 박신우를 타살했다는 주장에 법률적인 증거가 되기엔 무리가 있어요. 더 조사해봐야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 P48
그녀는 잠시 침묵하고는 짧게 덧붙였다. "VCR을 보세요. 꼭이요." 종업원이 다가와 커피를 더 마시겠냐고 물었고, 나는 사양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봤다. 수수한 메탈시계였다. 식사가끝난 것이다. - P49
기하여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대석이 맥주를 마시자고 했지만 거절하고 집으로 왔다. 9시가 넘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오늘 낮 준형에게 받은 사건자료를 펼쳐보았을 때는 한 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 P49
취재자료라기보다는 수사자료에 가까운 글이었다. 전부 읽었을 때, 나는 지금 읽은 것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내가 얻을 수있는 최상의 보고서란 걸 깨달았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라면끓일 물을 냄비에 받아 불 위에 올렸다. 거실로 나와 그녀가 보내준 VCR을 2배속으로 훑어보고 나서 보고서가 지적한 의문지점으로 돌려 다시 자세히 살펴봤다. - P50
초췌한 남자와 어린 아들. 천장 왼쪽 끝을 철거용역 직원들이 비집고 들어와 망루로 진입한다. 실내에서는공성과 수성의 실랑이가 벌어진다. 15분이 지났다. 지금이다. 천장 오른쪽 끝에서 진압경찰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하나, 둘, 꽤 많다. 그들이 망루로 진입한다. 경찰 몇 명이 아들에게 다가간다. 아버지가 절규한다. 경찰이 아들 머리 위로 높이 곤봉을 쳐든다. - P50
만약에 진압경찰이 박재호의 아들을 죽였다면 법정에선 뭐가 달라지지? 일단 정당방위의 성립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이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경찰과 검찰이 제시한 사실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한다. - P51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가스레인지의 불을끄고 물이 다 증발한 후 바닥이 까맣게 타버린 냄비를 설거지통에 아무렇게나 처박아 넣었다. 시계는 새벽 1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절실히. - P51
염만수는 느린 걸음으로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전자식 커피포트를 꺼내 물을 끓였고, 물이 끓는 동안 나에게서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의 풍채는 여전히 압도적이었고, 상상력을자극했다. 법대 강단에 선 늙은 교수의 모습. 개강 첫날 강의시간에 출석을 부른 후 300명의 이름을 몽땅 외워 학생들의 기를 죽여 놓는다. - P52
"그거 아나? 내 강의를 들은 연수원생이 졸업을 하고 인사하겠다고 학교로 찾아온 건 처음이네. 처음이야." "정말입니까?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법대생들은 날 좋아하지. 난 그 이유를 알아. 같은 이유로그 아이들이 변호사가 되면 날 싫어하게 돼.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치들을 싫어하는 만큼은 아니지. 반갑네, 윤 변호사." - P53
"국선전담변호사라고. 자네는 언제나 참 어렵게 사는군. 일은 어떤가?" "얼마 전에 철거민 사건을 하나 맡았습니다. 철거 진압 도중에 경찰 한 명과 학생 한 명이 폭력 사태로 사망했어요. 제 피고인이 경찰을 죽였는데, 사망한 학생의 아버지이기도 하고요. 흥미로운 사건이죠." - P53
"교수님은 제가 아는 최고의 법률가입니다. 이 말은 진심입니다." - P53
"피고인을 상담하면 시간당 얼마를 받나?" "국선변호사는 상담비용을 안 받습니다." "그렇군. 난 변호사를 상담해줄 때 시간당 100만 원을 받네." "저에겐 큰돈입니다. 그냥 이야기를 드리고 싶었는데요." "난 농담을 자주 하지 않아. 그런데 자네는 농담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군." - P54
"그게 어떻게 진담이 되겠나. 변호사한테 낭비한 내 시간을어떻게 돈으로 환산하겠어. 식사나 하면서 얘기하세." 염만수는 책상에 앉아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식당으로 불렀다. 우리는 서울대 경영대학의 교수식당으로 걸어갔다. - P54
"철거민 문제라면 딱 어울릴 친구를 알지.공법분야의 모든문제에 미쳐 있는 내 제자야. 지금은 형법학 교수일세. 같이 식사하면서 아까 그 이야기를 해보게 좋아서 달려들걸." 식당으로 들어가 우리는 별실로 인도받았다. - P54
이주민, 서른네 살이었고, 스물아홉 살에 서울대 법과대학의 형법학 조교수가 됐다. 그가 염만수의 눈에 든 건 대학교 2학년 채권각론 중간고사 때였다고 한다. 염만수는 답안에 적는 법률 개념에 독일어를 병기하는 사람에게 보너스 10점을 주겠다고 했는데, 일곱 장 전체의 절반을 독일어로 써낸 매끈한 논리의 시험지가 나타났다. 시험이 끝난 후 염만수는 이주민을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 P55
이주민이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키가 매우 컸고 체크무늬 더플코트와 구겨진 청바지를 입었다. 기껏해야 대학원생으로 보였다. 잘생긴 얼굴, 패기 넘치는 눈빛. - P55
식사가 나왔다. 젊은 교수는 스승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대화하는 동안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겸손과 조심성이 몸에 냈고,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세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고려해볼 만한 어떤전략에 대해서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 P56
"나중에 저 친구가 쓴 불복종 운동에 관한 논문을 읽어보게 가관이야." 제자가 웃었다. 그 웃음에서 나는 수줍음을 읽었다.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고 싶군요. 윤 변호사님이 괜찮다면요." "저야 영광이지요." - P56
주민은 학부생들로 구성된 공법학회를 지도하는데, 그 학회의 아이들은 미군범죄부터 철거민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며 현장 시위에까지 참여한다고 했다. 그는 법학의 미래라는 표현을 썼다. 염만수는 기름진 참치뱃살을 씹으며 그 아이들은 하나같이 성적이 형편없다고 말했다. 우리 쪽늘 쳐다보지 않았다. 혼잣말이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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