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플 오류가 다시 난다.
이제 곧 이번 장의 결말!

상은 다부진 상체에 비해 어딘가 어색한 정병호의 걸음걸이를 놓치지 않았고 그는 시선을 느끼고 먼저 말을 꺼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않았습니다.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레슬링, 유도, 권투 안 해본 운동이 없죠. 그에 반해 건강한 신체를타고난 이 친구 성린이는 해본 운동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상선배. 하하하." - P68

"네, 제가 디자인한 대로 주문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래뵈어도 도쿄의 금속장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명품이죠. 우리 낭만문학회를 상징하는 펜촉입니다." - P69

"우리들은 간간이 하던 걸 요즘 문청들은 정기적으로 하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안그래, 구보?"
구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세월 동안 성린이 이 친구는 학비를 대지 못해 휴학하고있는 형편이죠. 정작 배울 사람은 못 배우고, 배워도 시원치 않을 것들은 도쿄다 구라파다 유학 다니며 돈을 펑펑 쓰고 있으니 원통한 세상입니다." - P69

"하나코란 여성을 아는가? 한국 이름은 화영이라고도 하고, 우래옥 작부이면서도 고상한 베아트리체를 꿈꾸는 여성 말일세."
상은 자그마한 방 안에서 꼬치 어묵과 정종을 곁들여 반주를즐기면서 물었다. 그는 성린의 얼굴에 비치는 고뇌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 P70

"시도 곧잘 짓고 문학사상과 계보에 꽤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던 여성이었죠. 아깝게도 그렇게 갔지만."
성린이 쓸쓸하게 말을 마치고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 P70

"그럼 이제 정 시인으로 불러야겠구먼."
상은 건배를 제의하였다. 환하게 웃으며 건배를 하는 병호에 반해 성린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구보는 성린의 몽상에 빠진 눈빛이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 P71

"그야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그런 것 아니겠나?"
"단순히 그런 것일까? 그에 관해 병호란 친구에게 은근슬쩍물으니, 화영이란 여자와 성린 군은 묘한 관계였다는군. 고 김화영이 작부였으나, 둘은 진심으로 사귀었다고 하더군." - P71

구보는 안경을 코 찡긋 밀어 올리며 대답하였다. 안경다리가 헐거워 잘 올라가지 않았다.
"글쎄,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혹 스티븐슨의 소설《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나오는 미스터 하이드의 어두운 악의세계를 묘사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 - P72

마침 신문사에 들어와 있던 자료들 중에 《문예월간》이 있었는데, 그중에 작년에 발간된 잡지에서 정병호의 시를 찾아낼 수 있었다.  - P72

"이걸로 의심이 선명해지는군."
"선명해지다니?"
"이 시는 여성이 쓴 걸세."
"여성이라니? 분명 그정 시인이………." - P73

" (생략) 백성린이라는 친구는 영국 낭만파 시인 셀리와 비슷한 처지더군. 학교는 쉬고 있는 형편이며, 재능은 있으나 돈은 없고, 이리저리 여성들은 꼬이는 처지인데 자기 자신의 앞가림마저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샌님. 그에 반해 정병호라는 친구는리와 절친했던 시인 바이런과 비슷하지.
(생략)" - P73

"시낭송회에서 해외낭만파 시인의 시를 읽고 본인의 시는 읽지 않았던 병호 군이 적잖이 의심스럽네. 보통 저정도 문청이면 엄청난 열정으로 창작에 몰입하게 되지 않나. (후략)" - P73

(생략) 그녀처럼 이들 사이에도 분명 여인이 있다네. 아마도 정병호는 그 여인의 시를 훔친 것으로 의심되는군."
구보는 상의 말을 듣고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 P74

상이 진지하게 말하였다.
"자네, 오늘 밤에는 묻지 말고 나만 따라오게나, 중요한 일일세." - P74

자정에 가까운 시각, 술집마다 걸린 남포등과 청사초롱이 거둬지면서 전기조차 끊긴 경성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통행금지에 인적도 뜸하고 오직 상과 구보만이 어디론가 걷고 있었다. - P74

잠시 후, 어디선가 여인의 비명이 터지고 구보는 깜짝 놀라 청계천 얼음판 위에서 한바탕 나동그라졌다. - P75

여인의 비명이 한 번 더 들리자 구보는 성냥갑을 찾아들어 성냥을 피워 앞을 살폈다. 그때 바로 코앞에서 주먹이 날아들어구보는 얼른 몸을 숙였다.
"조심하게!" - P75

여인이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구보는 남은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고는 여인을 살펴보았다.
병목정 유곽에서 본 꽃순이라는 여인이었다. 눈은 감은 채로 옷차림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확실하였다. - P76

분명 상과 여인, 의문의 남자가 있는 쪽이었다.
다급한 호루라기 소리가 어둠을 가르는 와중에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상의 기괴한 시는 이것으로 끝이로군!" - P76

"꼼짝 마!"
순식간에 일본인 순사 세 명이 구보를 제치고 상이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 뒤로 작은 랜턴을 들고 선 기무라가 보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 P77

 제압된 남자는 역시 정병호였다! - P77

상은 기무라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구보와 함께 청진동 ‘제비‘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 P77

"어제 오전에 꽃순 씨에게서 연락이 왔네. 요 며칠간 체격이좋지만 다리를 저는 한 남자가 은밀하게 여인을 구한다는 거야.
여인이 자신의 말대로 쇠사슬에 묶이는 행동만 당하여준다면 돈을 많이 주겠다는 것이었지. 꽃순 씨는 자원해 나섰고, 약속장소와 시간을 나에게 알려왔네. 실종된 친구를 찾기 위해서라지만 꽤나 위험한 일이었지." - P78

"아보타 놀이를 하다 잡힌 청년이 다니던 술집에 가서 알아낸 것이 있네. (중략) 그 술집을 찾아가 그 남자는 이러이러한 정황 때문에 살인자로 오인받으니 사실을 고하라 얼렀지. 
(중략) 그리고 요즘 아보타 놀이를 하는 학생 중에 낭만문학회 소속 학생들이 있다고 하기에 자세히 알려달라고 하였지. (후략)" - P78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자네는 정병호의 등단 시 <어둠의표상>이 왜 여자가 지은 시라고 단정 지었나?" - P79

"난 정병호, 백성린, 김화영이란 여성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았네. (중략) 그 화영이란 여성은 일개 작부가 아닌 정말 지적인 신여성이더군. (후략)" - P79

"(전략)
그 공책에서 <어둠의 표상> 시 구절을 찾았네. ‘악의 근원으로 낙인찍힌 이를 다시금 태어나게 해주고 싶구나.‘ 바로 이 부분을 듣자마자 시인이 여성이 아닐까 의심했네. (중략)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처럼 잔인한 괴물은 과연 누구일까? 정병호일까. 백성린일까?" - P80

"백성린은 지금 이곳에 없지 않은가?"
"이미 종로서 구류장에 갇혀 있네. 그들은 바이런과 셀리와 비슷한 처지인 것을 은근히 좋아했다네.
 (중략)
 순수 이상을 추구하였지. 그게 바로 죽음과 살인에의 욕구였지." - P80

"(전략)
그러고 나서 제2의 피해자를 찾은 것이지. 이미 악마의 본성이 열렸으니, 더 잔혹한 짓을 하리라 마음먹은 것은 당연할 것이고, 만만한 상대는 가족과 떨어져 연락을 끊고 사는 작부들일 터. 정병호를 현행범으로 잡기 위해 야경꾼들과 순사들도 숨어 지내면서 그의 동태를 살폈지.
(후략)" - P81

 상이 심부름꾼으로종종 보내는 정민이라는 소년이었다.
"오늘 종로경찰서로 3시까지 나와달라고 하십니다."
열두 살이나 되었을까, 얼굴에 여드름이 간간이 나 있는 소년은 상의 전갈만 전한 뒤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 P82

구보가 물었다. 마침 문 열고 들어선 상이 답을 하였다.
"아마 서로 범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겠지?"
"이상 선생, 어떻게 아셨습니까?"
"둘이서 공모한 이상 서로 떠넘기기에 딱 좋지 않소. 자, 이자부터 심문에 들어가볼까?" - P82

병호는 살짝 입 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을 뱉었다.
"범인은 성린이 그 자식입니다. 죽은 김화영과 성린이의 약혼까지 한 사이였다는 것은 이미 아시겠죠? 화영이 계집이 몸을팔아 성린이 학자금까지 대다가 성린이가 마음을 돌려먹고 파혼하려 하자 발목을 잡았겠죠. 그래서 죽인 겁니다." - P83

"아보타 놀이는 어차피 경무국형사계에서도 파다하게 알려져 있다면서요? 이 손목이 풀린 것도 어제 하룻밤 놀이상대가 된 여성이 돈을 받고 일단은 합의해줬기 때문이지요." - P83

구보가 날카롭게 질문하였다.
"시를 표절한 죄책감 내지는 도둑질한 것을 영원히 들키지 않기 위해 죽인 것은 아닌가?" - P84

"그렇다면 자네들 혹시 병목정 기녀들이 불려간 재력가의 집에는 드나든 적이 없는가?"
병호는 고개를 저었다. - P84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병호의 진술이 워낙 확고하였고, 또한 그의 아버지가 붙여준 변호사가 워낙에 대단한 인물이라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가기까지 하였다. - P85

"그날 밤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친구나 가족이라도 있는가?"
기무라는 조서를 작성하다 고개를 들어 물었다.
성린은 고개를 저었다.
"밤새 경성 거리를 쏘다니다 새벽녘에야 취해서 방에 돌아와죽은 듯이 잠만 잤습니다. 다음 날 밤이 되어서야 김화영의 죽음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옷이 벗겨져 춥게 갔다고 들었을 때는가슴이 미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 P86

"그러니까 재력가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서 김화영을 깨끗이 죽여버린 게 아니냐고!"
기무라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구보는 기무라를 진정시킨 뒤 상을 데리고 조사실에서 나왔다. - P87

"쇠사슬은 어떻게 하였지? 김화영을 괴롭히던 사슬 말이야."
"제가 먼저 자리를 떴으니 병호가 갖고 갔을 겁니다."
성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후 순사 하나가 들어와 야마모토 박사가 지하 자료보관실에서 만나자한다고 전했다. - P87

크리스틴은 사진을 유심히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손에 의한 경부압박질식사는 맞습니다. 자살이라…그렇다면 시신의 상흔에 아무래도 엄지는 앞쪽으로, 네 손가락을 뒷목으로 가는 형태로 힘을 주어서 자살하는 게 맞을 터인데, 상당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자살하기란 불가능하죠.
그렇다면 사슬을 두 손 위로 둘러서 자살했으리라는 추정이 덧붙여집니다." - P88

크리스틴이 고 김화영의 시신 사진 중에 손등을 자세히 찍은사진을 가리켰다.
"혹시 김화영이 쇠사슬 하나는 나무에 걸쳐놓고 두 손으로 목을 조르고 손등 위를 쇠사슬로 감싸 돌리면 목에 힘이 가해지면서 자살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고 김화영의 오른손 손등에 난 시반도 쇠사슬에 의한 것일 수 있죠. 자, 보세요." - P89

정병호의 진술을 뒤엎을 증거는 없었다. 또한 백성린이 범인이라는 결정적 증거도 없었다. 어느덧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로써 구인회에 가입할 수 있게 된 것인가? 자살로 사인을 규명했으니." - P91

상이 내민 종이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계획>

1. S 와 B 를 불러 놀이를 제안한다.
2. 놀이에 몰두하여 몸에 여러 가지 고문 흔적을 남긴다.
3. S 와 B를 돌아가게 하고 남아서 바위 위에 올라가 두 손을목 위로 올려 사슬을 감는다.
4. 한 손을 빼서 사슬 끝을 나뭇가지 위에 걸친 후 힘껏 끌어당긴다. 재빨리 사슬 속에 손을 집어넣고 목을 손과 사슬로 동시에 조른다. 바위에서 내려간다. - P92

"상이! 자네도 크게 실수한 게 있네. 이 노트 말이야. 다시 수거해야 돼. 필적 감정을 기무라에게 부탁하세. 정말로 김화영의필적이 맞는지 알아봐야 해. 누가 자살로 조작하기 위해 가짜로써놓은 것일 수 있어."
"하지만 시와 필적이 같았네."
"필적 위조야 얼마나 쉬운가!" - P93

"누군가 먼저 다녀가서 그 노트와 어린 계집을 빼돌린 것 같군."
"계획에 제대로 걸려든 것 같네. 정병호와 백성린 그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짠 것일 수 있어. 둘을 의심케 만든 아보타 놀이며, 딱 맞아 떨어지는 셸리와 바이런의 사생활까지 게다가 내가 자살로 단정 짓게 만든 그 자살계획서며 ・・・………. 이제사건은 원점으로 돌아갔네." - P94

크리스틴은 가벼운 인사를 하고 들고 왔던 갈색 서류가방에서 흑백 사진과 검시 서류를 내보였다.
"죄송합니다. 검시 의견을 정정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법의학교수님께서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죠. 경찰과 너무 자주 이야기하지 마라. 그들의 유도심문에 걸려든다."
크리스틴의 눈동자가 빛을 발하였다. 구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심정으로 되물었다.
"유도심문이라뇨?"
크리스틴이 미소를 지으며 답하였다. - P95

"즉, 이 사건은 반듯하게 누워 질식사한 시신을 누군가가 엎드리게 하여 얼굴이 땅을 향하게 하였다는 말이군. 구보, 우리는 그 사실을 창경궁 사건 현장을 방문한 당시에 알았으면서도놓쳤네. 심히 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는군."
구보는 1주일 전에 창경궁을 방문하여 내기를 좋아하는 관리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분명히 그는 엎드린 상태의 시신을 반듯하게 돌려놓았다고 하였다. - P97

"혹시 죄책감에 그런 것은 아닐까?"
구보가 답하였다. 상은 고개를 저었다.
"범인은 반드시 범죄현장에 다시 와본다는 이야기를 들은듯도 하지만, 범행 직후 반듯하게 눕힌 채로 방치된 시신을 다시 엎어놓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네." - P98

"크리스틴 박사가 말한 대로 박사는 나의 이야기 때문에 잘못된 검시 결과를 내놓았고, 나는 범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사건을 다른 쪽으로 몰고 간 거지. 고 김화영의 습작 노트에 있던 자살계획서는 은연중에 김화영이 자살하였을 거란 암시를주었어. 나도 그녀도 모두 범인이 남겨놓은 가짜 단서에 휘둘린것이지. 한방 맞았네. 어쩌면 사건 배후에 또 다른 누군가 있는것 같네. 아니면 정병호 백성린이 대단한 지능범이거나." - P98

낙담한 심정이 얼굴에 드러났는가 싶어 계면쩍었던 구보에게상이 두 손을 번쩍 잡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해답이 보이네. 어서 종로서로 달려가자구."
오전 7시 45분, 상과 구보는 종로서에 도착하였다. 당직 근무를 서고 있던 기무라 형사에게 정병호와 백성린을 마지막 출두형식으로 조사실로 불러낼 것을 부탁하였고 야마모토 박사에게는 검시 서류와 시신의 사진 등 법의학적 관련 서류를 모두 가져다줄 것을 부탁하였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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