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 일이야? 너처럼 잘나가는 문인이 나 같은 은행원을 다만나자 하고" 은행 간부쯤으로 보이는 풍모였다. 고급 모직코트를 걸치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 P62
"등단하고 싶으면 시를 나한테 보내봐. 내가 보고 추천해줄데 있으면 알아봐줄게." 사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더니 잠시 숨을 고르고 커피를 들이켠 후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 P62
"아, 최근에 대학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회에 관한 정보를알고 싶어. 모이는 장소, 모이는 시간 모두 그리고 문학회 이름과 참석하는 학생들 정보도 오랜만에 만난 문학회 정송희 선배이야기로는 네가 아직도 대학가 문학회를 찾아다니면서 후원도해주고 시낭송회에도 참석한다는 것 같더라고 하시더라." - P62
상의 친구는 눈을 빛냈다. "좋아. 지금 떠오르는 문학회는 두 곳 밖에 안 되는데, 내일 정리해서 네가 있는 곳으로 보낼게 금홍 씨는 잘 계시지?" - P63
"내일 오후에 다방으로 와주게나 문학회 중 가장 의심이 갈만한 곳을 가보려 하니." 구보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P63
다음날 오후에 ‘제비‘를 찾은 구보는 상이 브라우닝 권총을들고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상이, 그거 권총 아닌가?" "브라우닝 M-1900. 7.65 밀리 총구 권총일세." "그걸로 무얼 하는 게인가?" "이 총은 은닉이 가능한 휴대용 총이지." - P63
상은 구보를 향해 조준하였다. 구보가 얼어붙었다. 이때 금홍이 다가와 어이없다는 듯이 상의 총을 빼앗아 자신의 얼굴을 겨냥했다. 구보가 깜짝 놀라는데 그녀가 비녀 뒤에 꽂아두었던 담배 한 가치를 빼들어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 P64
그러고 보니 상은 아직 파자마 차림을 나이트가운으로 가리고 발가락에는 게다를 걸친 꼴이었다. 게다가 헝클어진 머리로 보아 세안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상은 파이프 담배 끝에권총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는 허공을 향해 연기를 내뿜었다. 구보가 무언가 물어보려 하여도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상을 섣불리 방해할 수는 없었다. 구보는 슬슬 졸려왔다. - P64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던 구보는 누군가 상을 방문하는소리에 깨어났다. 심부름꾼 소년이 상에게 봉투를 건네고 돈을 받고 있었다. - P65
"셀리는 무신론을 주장해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자이지. 만약 셸리를 동경하는 범인이 셸리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시구대로 살인을 자행한다면 그 또한 명문대학 중퇴자일 확률이 높고, 무신론이나 무정부주의 뭐 이런 아나키스트적인 생각을 발표하다 그렇게 되었겠지. (중략) 명문대에 적을 두었거나 휴학하는 자들이 꾸리는 문학회인데, 그중 가장 의심되는 한 곳을 오늘 방문하려 하네." - P65
일정목을 지나 뒷골목으로들어가자 작은 선술집들이 늘어선 길이 나왔다. 일정 중간 정도에 위치한 가게 앞에 섰다. 나무 미닫이문을 열고 상이 먼저들어갔다. "여기 낭만문학회 청년들이 어느 방에 들어 있소?" - P66
중앙에 화로가 있고 다다미가 깔린 방 안에는남녀 학생 일곱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중 가운데 학생이 일어나 서서 시를 읊었다. "오, 거센 서풍, 그대 가을의 숨결이여 보이지 않는 네게서 죽은 잎사귀들은 마술사를 피하는 유령처럼 쫓기는구나. 누렇고 검고 청백하고 또한 빨간 질병에 시달리는 잎들을 오 그대는 시커먼 겨울의 침상으로 마구 몰고 가는구나." - P66
아주 아름답게 생긴 모던걸도 있었으며, 경성제대 교모와 교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학생이 둘 보였다. 가운데에서 시를 읊는 남학생은 연희전문 교복을 입고 있었다. - P66
"저희는 문단에서 글을 쓰고 있는 기성작가입니다만, 아직 무명인지라 한수 배우고자 찾아왔습니다." - P67
학생들은 낭만파 시인에 대한 난상토론을 즐겼다. 특히나 <오감도>의 시인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존경의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 P67
"저는 <오감도>가 난해하지만은 않다고 봅니다.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연희전문대학 영문과에 다니는 정병호라고 합니다." 상은 남학생의 건방져 보이는 얼굴을 미소를 머금고 보았다. - P67
원 리틀 투 리틀 쓰리 리틀 인디언, 파이브 리틀 식스 리틀세븐 리틀 인디언………. 저는 이 노래처럼 미국 동요와 대구도 비슷하고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 P67
하지만 상은 태연하게 넘겼다. "자네들도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셀리의 시구를 알게 모르게사용하지 않는가? 하지만 고맙네. 그 ‘원 리틀 투 리틀‘ 하는 인디언 노래를 나는 오늘 처음 듣네. 동요나 민요는 인류의 문화원형을 그대로 담고 있네. 한마디로 잊히지 않는 불후의 명곡이지. 그런 노래와 내 시를 비교하다니, 이거 영광인걸?" 누가 봐도 상의 승리였다. - P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