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금홍이 축음기 레코드판을 갈았다. 슈베르트의 곡 들장미>가 흘러나왔다. 상이 감았던 눈을 떴다. 구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괴테가 지은 시 아닌가? 지난번에 서점에 들른 이유는 바로이 시를 찾아보기 위함인가?" - P52
"참으로 아름다운 시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생각을 엿보게된다면 좀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네. 아름다운 빨간 장미를 꺾으려는 소년, 그리고 소년을 가시로 찌르려는 장미, 고통이라는하나의 관념이 매개체가 되어서 서로 고통을 주고받으려는 의도가 있네.‘ - P52
그렇다면 괴테의 시에 가학을 즐기는 사디즘과 학대를 받는것을 즐기는 마조히즘이 뒤얽혀 있다는 말인가? 이거참, 사디즘의 원조 사드 후작과 괴테의 시가 통한다니." - P53
"그렇다면 이제부터 범인의 윤곽을 그려나간다면 말일세. 셸리의 시를 들먹일 정도로 멋진 척하는 머리에 잉크 물든 자일것이고, 또한 가학적인 행위에 만족감을 느끼는 자일 것일세." - P53
"이런 짓을 벌이고 다니는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 사이에 유행이 되는 아보타라는 놀이가 있다.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는위험한 단계에까지 진출해 있다. 이건 한 모던보이 머리에서 계획된 것은 아니네. 이런 일들을 조직적으로 벌이고 사상과 관념으로 투철한 이가 배후에 있을 것이야. 그가 젊은 청년들의 사상을 검게 물들이고 있다는 데에 내 이름을 걸겠네." - P54
본정 뒷골목에 있는 병목정 갈보집으로 불리는 유곽 거리에있는 애한테 들은 얘기예요. 걔네들 열심히 뛰어봤자 하루벌이가 얼마 안 되는데 하여튼, 하루는 검은색 포드 승용차에서 내린 하얀 머리의 점잖게 생긴 신사가 내일 유곽 여자 세명정도만 밖에서 놀 수 있게 해달라고 했대요. 가게에다가는 선금으로50원을 내놓고, 애들에게는 일인당 20원씩 지급한다고 약속하고요. 다음 날 밤, 차를 몰고 나타나 여자들을 데리고 갔대요. 제친구도 거기 끼어 갔다는데, 포드 승용차에 올라타자마자 눈가리개를 하고 손목을 묶었다는 거예요. - P55
"문제는 그 여인들 중에 한 여인이 실종되었다네." 구보가 놀란 눈으로 이상을 보았다. "실종이라면 또 다른 범죄가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친구분을 만나러 가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오늘 병목정에 가보려고 하네만." "병목정?" - P56
"무얼 그렇게 생각하는 게인가? 아하, 금홍이? 아내가 아닌것은 알 테고." 구보는 깜짝 놀라 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그리 놀라나.자네양볼이 붉어지는 걸 보면 허리 아래남녀관계를 생각하는 게 맞을 터이고, 좀 전에 본 여자는 금홍이밖에 없잖은가?" - P57
구보가 반문하였다. "좀 이상한 게 있네. 아무리 즐기는 것이라지만, 그들은 한 가지 약속은 하고 있네. 바로 서로 죽이지 않겠다는 것. 즐거움을주는 일이라 해도 죽을 지경에 이른다면 얼마나 겁이 나고 손해볼 것인가?" - P58
본정 대로변에 위치한 은행, 호텔, 상점, 우체국 등을 뒤로하여 뒷골목으로 들어가 삼정목 경성극장을 끼고 돌아서 오정목으로 향하는 거리에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들이 골목을 장악하고 있었다. 본정에서 일하는 은행원과 샐러리맨들을 부르는 선술집들은 집집마다 가스등을 내걸고 화려한 입간판을 내세워 영업을 하고 있었다. - P58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시지 않을래요?" 상의 코트자락을 끌어당기는 앳된 얼굴의 여인이 은근하게말을 걸어왔다. "여기 와서 금화정 꽃순이를 찾으면 된다고 하던데?" - P59
"형사인데 알아볼 게 있으니 안내를 해주오." 상은 진지한 어투로 말하였다. 구보는 상이 형사를 사칭한다는 것에 깜짝 놀랐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꽃다운 아가씨들과 말동무만 하다 지쳐 돌아갈 게 뻔하였다. - P59
"누구를 찾아오셨나요?" "손님은 아니고 잠시 할 말이 있으니 꽃순이라는 여인을 불러주시오." 상과 구보는 경계하는 표정의 여주인에게 5전을 건네고 방으로 안내되었다. 차와 과자가 나왔고 뒤이어 장지문이 열리며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 P60
"잘 모르고 계시나본데, 그 아이는 실종이 아니라 고향에 내려간 걸 거예요." "진실을 말해주시는 편이 실종자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꽃순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겁에 질린 얼굴이 되어 눈물을 글썽거리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 P60
"친구는 고향에 내려간 게 확실합니까?" 꽃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나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거나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종로통 ‘제비‘의 금홍에게 전해주시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나갔다. - P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