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지 않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은 어떤 책도 전혀 펼쳐보지 않는 것이다. - P22
책을 자주 접하는 독자에게도 출판물 대부분은 거의 완전히 외면을 당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독자라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극히 일부를 읽을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22
그리하여 이 단체의 책임자들 소설에서 무질은 이들을 우스꽝스런 어광대들로 묘사하고 있다―은 모두 "대속(代)의 사상‘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이 사상을 애매모호한 자신들의 상투적 표현을 통해 부단히 상기시키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과연 어떤 사상이 그런 사상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자신들의 나라 바깥에서 구제 기능을 발휘하게되는지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 P23
그런 태도의 극단에서 우리는 어떤 책이건 책을 전혀 펼쳐보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책을 모른다거나 책 얘기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완전한 비독서자의 경우를 만나게 되는데,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에 등장하는 사서(司書)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 P22
무질의 이 소설은 지난 세기 초의 카카니-‘카카니Cacanie‘ 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머러스한 표현이다 라는 나라에서 펼쳐지는데, 황제의 다음 번 생일잔치를 본국 바깥에 있는 나머지 세계의 죄를 씻어주는 하나의 범례로 삼아 엄숙하게 거행하자는 생각을 중심으로, 비밀운동‘ 이라는 한 애국운동단체가 결성된다. - P23
이 비밀 운동‘의 책임자들 중에서도 가장 우스꽝스런 인물이 바로스톰(Stumm은 독일어로 ‘벙어리‘ 라는 뜻이다) 장군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이 대속의 사상을 찾아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역시 이 ‘비밀 운동‘의 일원인 디오팀에게 주기로 결심한다. - P23
특별한 아이디어도 수단도 없을뿐더러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낼 방도는 더더욱 없는 처지였기에, 스톰 장군은 "적의 힘에 관한 정보도 좀얻고 자신이 찾고 있는 독창적인 관념을 가장 잘 조직된 방식으로 손에 넣기 위해, 독특한 사상들을 얻는 데 이상적인 장소라 할 수 있는 황실 도서관에 가보기로 결심한다. - P24
독서는 우선 비(非)독서라 할 수 있다. 삶을 온통 독서에 바치는 대단한 독서가라 할지라도, 어떤 책을 잡고 펼치는 그 몸짓은 언제나 그것과 동시에 행해지는, 그래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그 역의 몸짓을 가린다. 즉, 그 책 외의 다른 모든 책들, 어떤 다른 세상이었다면, 선택된 그 행복한 책 대신 선택될 수도 있었을 다른 모든 책들을잡지 않고 덮는 몸짓을 가리는 것이다. - P26
특성 없는 남자는 교양과 무한을 가로지르는 이 오래된 문제의 한계를 상기시키지만 가능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스튬 장군이 만난 그 사서가 선택한 해결책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책들, 혹은 최소한 자신의 도서관에 소장된 수백만 권의 책들 속에서 길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 P26
무식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책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일부러 어떤 책도 읽지 않도록 주의하는 그 특이한 사서 앞에서 장군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 P27
이 입장의 지혜로움은 진정한 교양은 완전성을 지향해야 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전체라는 관념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더욱이 그러한 전체성의 추구는 개개의 책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 P29
사상들 사이의 모든 소통과 원하는 연결선 설정을 가능케 하는 철도 노선표 같은 뭔가에 관해 몇 마디만 덧붙이고 싶네. 사실 그는 불안할 만큼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네. 나를 카탈로그 실로 안내해서는 거기에 혼자 머무를 수 있게 해주었지. - P29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 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 P31
티나는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 책을 읽는 일은 없을 것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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