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천천히 달려도 자정쯤에는 집에 도착하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내비게이션을 보니 곧 산마루를 넘는다고 안내해주었다. 2킬로미터쯤 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모양이다.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음성 안내가 나오리라. "세상 참 편해졌어." - P11
"연구에 열정적인 건 잘못이 아니지. 좋은 이야기를 많이들었잖아. 늦어졌다고 해도 아직 7시고." "이 부근에서는 한밤이야. 그 할머니, 용케 지금까지 상대해주셨네." "하지만 즐거워 보이던걸 우리 인터뷰 실력이 훌륭한 덕이지." - P12
구로다는 지도를 미카코에게 맡겼다. 두 사람이 찾아간곳은 산속의 쓸쓸한 마을로, 비즈니스호텔이든 민간 숙소들산을 두 개는 넘어야 나온다. 연인 사이도 아니라서 당연히 호텔방은 두 개를 예약해두었다. - P13
"아까 오른쪽 길로 들어섰는데 그게 잘못됐을까? 하지만오른쪽으로 가라고 되어 있지?" "그러네. 마을로 통하는 건 이 길인데 이상하긴 하지만 이길이 맞아." 그가 단언하자 미카코는 안심하는 눈치였다. 내비게이터인데 실수했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다. - P13
삼십 분쯤 지나 참다못한 미카코가 말했다. "이상해. 되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지도로는 이 길이 맞는데. 이럴 때는 되돌아가면오히려 후회하기 십상이야. 게다가 아까부터 보고 있는데유턴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 P14
"미카코가 길을 잘못 알려준 건 아니야. 내가 책임지고 결정할게. 이대로 갈게. 괜찮지?" 미카코가 작게 끄덕이는 것을 보고 구로다는 액셀을 조금강하게 밟았다. - P14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불안한 표정을 짓는 미카코에게 구로다는 "절대 사고 내지 않을게"라고 든든하게 말했다. 십분쯤 더 갔을까, 길이 끊겼다. 마을로 통하기는커녕 막다른 길이었다. 미카코가 망연자실했다. - P14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 저편에 커다란 검은그림자가 있었다. 미카코가 "이런 곳에 저런 게"라며 놀랄만도 했다. 그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 산속에 전혀 어울리지않는 서양식 저택이었다. 벽돌로 지은 중후한 2층 건물로 창문이 잔뜩 있었는데 어디에서도 빛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는 것이다. - P15
"아무도 없나?" 구로다가 문손잡이를 쥐고 밀자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열렸다. 마치 두 사람을 맞이하듯이. 달빛도 없어 저택 안은깜깜했고 반대로 내부의 어둠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같았다. - P15
"훌륭한 저택이네." 찰싹 달라붙어 말하는 미카코에게 구로다는 대답했다. "훌륭한 빈집이지." - P16
1층을 둘러보는데 로비 오른편에 응접실과 널찍한 거실. 왼편에는 식당과 주방,화장실과 욕실, 거실과 식당에 전화기가 있었지만 둘 다 먹통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스와 수도는 살아 있었다. - P16
"빈집이라고 해도 문이 열려 있는 건 이상해, 여긴 대체뭘까?" 미카코의 질문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는 빗줄기가 굵어진 것 같았다. - P17
"일단 밥이나 먹을까? 식당에 이런 저택에 어울리지 않게컵라면이 있더라. 라면하고 국수도 있던데 유통기한도 괜찮았어. 도둑질은 아니야. 먹은 만큼 제대로 돈을 두고 갈 거니까." - P18
‘촛불만 보고 있으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디너를 먹는 기분이야. 둘 다 라면을 먹고 있지만." "초일류 요리사가 만든 라면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굉장히 맛있어. 이렇게 맛있는 라면은 처음이야." "시장이 반찬이라 그런 거겠지. ••웅, 맛있긴 하네." - P18
"고마워. 하지만.………… 혼자는 무서운데." 난처해한다기보다 어딘가 응석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구로다는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라고 대답했다. - P19
"고마워. 하지만 도저히 잠이 올것같지않아. 나도 아침까지 깨어 있을래." 비는 계속 쏟아지고 바람이 유리창을 뒤흔들었다. 때때로집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서 두 사람은 움찔거렸다. - P19
"아니야. 계단 아래쪽에서 바닥이 울리잖아. 발소리 같아. 움직이고 있어. 위로 올라오면 어쩌지!" "발소리가 아니야. 집이 낡아서 여러 가지 소리가 나는 것뿐이야. 봐, 이제 안 들리잖아." 미카코는 그 설명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망하다는 듯살짝 웃는다. - P20
환하게 웃는 미카코의 표정이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다독여주는데 미안하지만 이 집.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아." "어째서 빈집이 되었을까?" "그것도 수수께끼지만……… 집 어딘가에 누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아. 어쩐지." - P20
아침에 두 사람이 눈을 뜨자 비는 그쳐 있었다.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식사로 또 컵라면을 먹었다. "고원의 펜션에 온 기분이야"라고 구로다가 말하자 "정말 그렇네"라고 미카코가 밝게 대답했다. 불안한 하룻밤을 무사히 넘겨서 들뜬 것 같았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스산한 저택에서 묵은 것도 지나고 보면 유쾌한 모험이다. - P21
지도를 의심하면서 방향을 고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어젯밤 묵을 예정이었던 마을이 나왔다. 두 사람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고 "우리만의 비밀"이라는 약속은 지켜졌다. - P22
그 소소한 모험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이윽고결혼했다. 1남 1녀를 얻었고 올가을에는 은혼식을 맞이한다. 그날 밤 덕분이다. 비도 그의 편이었다. - P22
그 저택은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호텔이었다. 덜컥기우는 액자도, 수상한 소리도, 전부 모습을 감춘 종업원들의 소행이다. 애초에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미리 알고 있었다. 통째로 빌려야 해서 대학원생에게는 꽤나 비싼 금액이었지만 저금을 털어 예약했던 것이다.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 P22
지도도 호텔이 준비해준 것으로, 헤매다가 그 저택에 다다르도록 되어 있었다. 내비게이션이나 휴대전화가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라 그런 기발한 비즈니스가 성립했던 것이다. "그 시절이 좋았다 ・・・・・・고 해야 할까?" - P23
‘멀쩡한 어른들이 진지하게 그런 토론을 하고 있었다니!‘ 앨리스는 황당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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