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요코와 소스케에게 신경을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한쪽이 당장이라도 자신을 범인이라고 밝히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당사자들은 서로 상대방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P297
"유카씨를 죽인 흉기의 출처가 확인되었습니다." 부하가 보고하러올때마다 일기예보라도 전하는 것처럼야자키 경감은 가벼운 말투로 수사상황을 설명했다. "목욕탕 옆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데, 그곳에 이치하라다카아키 씨가 예전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등산도구가 있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최근에 누군가가 만진 흔적이 있고 등산용 나이프의 케이스도 하나가 비어 있더군요. 그게 흉기로 쓰인 나이프의 케이스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P298
그런데 조금 의외인 것은 경감이 그걸 근거로 내부 범행설을 거듭 강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부러 입 밖으로 낼필요도 없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부 범행설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던 나오유키조차 이후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P299
"죄송합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와도 될까요?" 나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젊은 형사가 야자키 경감을 보았다. "제가 이 서류를 읽는 동안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야자키가 말했다. - P299
"화장실 정도는 괜찮지않습니까?" 나오유키가 나 대신 나서주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닙니다." 야자키 경감은 부하가 가져온 서류를 손에 들고 아주 잠깐동안 생각하다 이내 허락했다. - P300
화장실을 나와 형사에게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형사는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약을 먹어야 해서 그래요. 부탁드립니다." "그럼 빨리 드십시오." 형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물을 담았다. 형사는 입구 근처에서있었다. 진통제를 가져오길 잘했다. 먼저 약을 먹었다. 그러면서 찬장 한쪽을 곁눈질했다. 바뀌지 않았다면 그 찬장에는타이머 스위치가 있을 것이다. - P300
야자키 경감은 조금 전 젊은 형사가 갖고 온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나를 보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어서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원래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이상한 긴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P301
"그리고・・・・・・." 경감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던졌다. "목욕탕 주변, 유카 씨의 방 주변, 모두가 식사를 했던 방에서도 머리카락을 채취했는데 그 결과.……" 그러곤 등을 꽂꽂이 펴고 선언하듯이 말했다. "어제 유카 씨의 방에서 나온 수수께끼의 머리카락이 또발견되었습니다." 그 얘기에 "예엣?" 하고 거의 모든 사람의 입에서 놀라운탄성이 흘러나왔다. - P302
"그렇게 단정하는 건 약간 이른 것 같습니다." 야자키는 일부러 느릿한 어조로 말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머리카락은여러분이 함께 식사를 했던 방에서도 발견되었으니까요."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각오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곁눈질로 시계를 보았다. 12시 5분 전. - P303
"즉, 누군가의 머리카락만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은 모두 채취했습니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주인을 알 수 있는 백발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빙둘러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은 바로 혼마 씨입니다." - P304
"나오유키 씨 말대로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혼마씨가 묵고 있는 방에서 발견된 검은 머리카락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게다가 그 머리카락이 문제의 머리카락과 모든 면에서 완전히 일치한다면 말입니다." - P304
"누군가기쿠요 부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건 아닐까요?" 어떤 사명감에서인지 나오유키는 계속 나를 변호했다. "진짜 범인이 기쿠요 부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게 아닙니까?" "그건 무의미합니다. 머리카락을 조사하면 밝혀질 테니까." 경감은 나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 P305
내가 계속 뒷걸음질하자 뒤에 있던 형사 한 명이 내 팔을붙잡았다. 야자키 경감이 명령했다. "가발 벗겨!" 또 다른 형사가 내 머리로 팔을 뻗는 순간・・・・・・.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내 몸이 허공에 붕 떴다. - P306
나오유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어서들 일어나세요!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화염에 휩싸일겁니다!" 그러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 소스케만이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 P307
"부인, 그쪽이 아닙니다!" 등 뒤에서 나오유키가 외쳤다. "거기서! 도망갈 셈인가?" 야자키 경감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쫓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화염 속을 걸어갔다. 무엇을 향해 걷고 있는지 나자신도 몰랐다. - P308
"나를 찾고 있었던 거야?" 내가 물었다. 상대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죽이려고? 내 말이 맞지?" "응, 그래." 불길 속에서 지로가 대답했다. - P308
"보고 싶었어, 지로." 그렇게 말하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로가 아니지. 당신의 진짜 이름은 히로미. 아지사와 히로미가 본명이겠지." "그리고 당신의 본명은 기리유 에리코 히로미는 웃고 있는것 같았다. "이제야 겨우 알아차렸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당신이 그렇게 변장을 했으니 알아볼 수 있어야지. 나나 되니까 알아챈 거라고." - P309
"덕분에 한시름 덜었어. 그 유서를 못 찾아서 난감했거든. 마호 씨가 도대체 어디다 숨겼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그 유서에 정말로 모든 사실이 적혀 있는 거야?" "내 자살이 거짓이었다는 점만 빼고." "그렇군." 히로미가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이런, 나만질문을 한 것 같군. 나한테 물어볼 말 없어?" - P310
그 사건이 있던 날 밤, 사실 나는 자고 있지 않았다. 지로 -실은 사토나카 지로라고 사칭한 아지사와 히로미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곧 다카아키 씨와 대면한다는 생각을 하자 약간 흥분이 되었다. - P311
불을 끄자마자 그가 나를 꼭 껴안았다. 지로와 나는 이불위로 쓰러졌고, 나는 그의 입술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키스를 해주지 않았다. 내 몸 위에 올라탄 채로 갑자기 상반신을 일으켰다. - P312
그리고 나중에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불길 속에 있었다. 옆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게 지로가 아닐까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냉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꿈과 현실이 뒤엉켰다. - P312
내가 알던 지로는 진짜 사토나카 지로가 아니었다. 어떤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이름을 사칭한 가짜가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짜는 나를 이용해서 자신이 진짜가 되도록 일을 꾸몄다. 그리고 끝으로 진짜 사토나카 지로와나를 죽이려고 했다. - P313
하지만 일련의 범행을 분석해 보니 그 혼자 꾸민 일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회랑정에 묵었던 사람 중에 공범자가 없다면 그가 도망간 뒤 ‘A-1 ‘방의 유리창이 잠겨있을 리 없었다. - P313
그걸 명확히 모르고는 완벽한 복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로의 정체가 아지사와 히로미이고, 현재 고문 변호사인 후루키의 비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다카아키 씨의 장례식 때 알았다. - P313
이치하라 집안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런 결단을 내린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어. 고바야시 마호, 이곳 지배인이 내 앞에 나타났거든. - P315
게다가 그 여자는 내가 사토나카 지로가 아니라는 것까지 눈치채고 있었어. 하지만 그걸 비난하진 않더군. 오히려 그 여자는 나에게 계속 아들 행세를 하라고했어. 대단한 여자야. 내가 다카아키의 재산을 전부 상속받으면 나를 자기 양자로 삼으려고 했거든." - P315
"출생의 진실? 그렇다면 그날 밤 사토나카 지로가 차로 친 노인이………." "내 할아버지야." 그는 태연한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 P316
"괜찮은 작전이었어. 일석이조가 뭐야, 일석삼조, 사조였어." "그러고 나서 당신은 어디에 있었어?" "내 집에 다카아키가 당신 방에서 아들과 관련된 자료를 발견하면 나를 찾아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 P316
"나한테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걸 알고 나를 후루키 변호사에게 부탁하더군. 아무래도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야." "다카아키 씨가 죽었을 땐 기뻤겠네." - P317
"신경이 쓰였던 건 유카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한명 더있다는 거였어. 그래서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려고 했는데, 그게 설마………." 그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일 줄이야." "내가 경찰에 붙잡히면 곤란할 거야." - P318
"왜 독극물을 사용하지 않았지?" "글쎄, 이유야 많지만..……." 가나에가 ‘예쁘다‘고까지 표현했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그가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을 볼 때마다 항상 목을 조르고 싶었거든." - P318
"이런, 곧 위험해지겠는걸." 히로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길이 이 방으로도 옮겨 붙기 시작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어느 틈에 꺼냈는지 나이프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으로 찌르면 불에 타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을 텐데." - P319
강한 가솔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히로미의 얼굴이 공포에 질렸다. "뭐 하는 거야?" "같이 죽어." 나는 두 팔로 힘껏 히로미의 몸을 껴안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러나 나는 두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순간을위해 지금까지 죽지 않았으니까.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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